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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lina Apr 12. 2020

존버하고 있는 이들에게

버티면 답이 나올 것이라는 착각

*먼저, 비속어가 포함된 준말이나 일반적인 은어조차 정말 즐겨쓰지 않는데, 마땅히 대체할 단어가 없어 쓰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다.

 

왜 우리는 버티고 있는가

"Hang in there" 잘 버텨내라, 참고 견뎌! 라는 영어 문장이다. 거기 잘 매달려(hang)있으라는 뜻. 그렇다! 때때로(누군가는 항상..) 우리는 고리 끝에 간신히 걸친 채 살아간다. 존버라는 말은 특히 나같은 직장인들이 자주 쓰는 것 같은데, '버틴다'라는 그들의 경험을 정서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기 때문이지 싶다. 그렇게 다들, 버티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버티고 있는걸까? 버티는 것은 당연히 힘들다. 하지만 "아오.." 하며 버티는 고통 자체에만 집중할 뿐, 그렇다면 그 힘든걸 대체 왜 버티고 있는건지 스스로에게 심도있게 되묻는 케이스는 많지 않은 듯 하다.


고통을 버티는 이유는 1)버틸만한 목표가 있어서 2)버티지 않고서는 대안이 없어서,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목표는 승진이 될 수도 있고, 사업성공 혹은 다이어트 성공 후 내 모습을 보고 싶은 경우도 될 수 있다.


슬프게도, '존버'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일 수록 1)보다 2)에 가까워 보일 때가 많다. 당장 때려치고 싶지만 바로 이직할 곳도 없고, 그렇다고 유튜브로 돈 벌 엄두는 안 나고, 일단 버텨야지 등의 생각들이다.



돈 많이 번다는데, 나도 유튜브나 해 볼까? 하긴 개뿔 :)



사실, 당장 대안이 없어서 버티고 있다고 답하는 직장인이 상당수일 것이다. 이건 죄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무엇보다 버티기 경력 자체가 짧은 사회초년생은, 제대로 버텨보질 않았기 때문에, 버텼을 때 어떤 목표를 꿈꿀 수 있는 지 조차 감이 없다.


결국 직접 버텨보지 않은 채, 버틴 후의 결과물이 내 옆에 있는 '상사'겠거니 속단한다. 그리곤 "버텨봐야 내 미래는 저런 모습이구나~" 하고 1년도 안 되어 퇴사와 이직을 하곤 한다. (나도 초년생 때 그랬으니 공감은 하지만, 지나고보니 아니었다. 본인의 버티기 후 모습이, 왜 본받고 싶지 않은 나쁜 상사-물론 훌륭한 상사면 문제없겠지만-가 될 것이라 생각하는 걸까?)



버티면 답이 나올 것이라는 착각

버티지 않아도 될 대안을 열심히 만들라거나 혹은 버틸만한 비전과 목표를 설정하라는 이야기는 사실 하고 싶지 않다. 모든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너무 어려운 이야기다.


사실 어렵고를 떠나서 중간 단계가 빠져있다. 외부 대안을 만들든 내부에서 비전을 찾든, 당장 때려치지 않는 한 그 모든 것을 일단 버티면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안과 비전은 버틴 후의 결과물일 뿐이다.


결국 어떻게 버티느냐가 결과를 좌우할 것이다. 그러니 "일단 버텨! 그럼 답이 나올거야!" 라고 위로하는 것은 조금 막연하고 무책임하다. 고통과 싸우는 것과 고통을 참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냥 버티기만 한다고 발전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잘 버텨내야만 한다.

 


그러나 나는 때로 내가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고 의심한다. 어쩌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모른 채 힘든 시간을 그저 견디고만 있는 것을 노력이라 착각하진 않는지 가늠해본다.
『걷는 사람, 하정우』p.285




경력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 이유

고통을 참고 견디기만 해도 시간은 간다. 그렇게 쌓인 시간이 바로 '경력'이다. 나는 직업 자체가 사람을 많이 접하는 바이어, MD, PM, BM인데다 꼴에 팀장 정도 되다보니, 사람 보는 눈이 어느정도 생긴 것 같다. 이 정도 되니 느낀 것이, 경력의 숫자는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경력기술서를 아무리 본 다 해도 100% 검증하긴 힘들다. 더군다나 내가 몸 담고 있는, 시스템이 거의 없는 스타트업에서는 그 본판이 금방 드러난다. 버티는 체력이 주니어급보다 딱히 뛰어나지도 않을 뿐 더러, 오히려 자존심만 더 세서 고통을 참기만 할 뿐 현명하게 싸울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맷집이 아닌 전투기술을 늘리는 진짜 존버

그렇다면 잘 버틴다는 것은 뭘까. 자칫 버틴다는 것을 혼자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전혀 그렇지 않다. 버티기 내공은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 따라 아주 다른 양상을 보인다(혼자 아무리 잘 참다가도, 주변의 말 한마디로 상처를 받아 위태로운 순간이 누구나 있지 않은가).


때문에 잘 버티기 위해서는, 내가 잘 버틸 수 있도록 주변환경이 나를 도와주도록 유도하는 전략이 반드시 필요하다. 홀로 맷집만 키운다고 될 일이 아니다.


<견디지 않고 싸우는 버티기 전략 3단계 순환구조>
치열한 과정 → 명백한 결과 → 겸허한 자기평가


나름 잘 버텨왔다고 자부하고, 상사를 통해서도 동일하게 평가받은 내 직장생활을 가만히 돌아보며, 잘 버티는 3단계 순환구조를 적어본다(각자 삶은 다르게 풀어간다. 내 생각은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첫째, 과정의 치열함이다. 과정이 치열하다는 것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단순히 야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다. 상사나 동료가 의구심을 갖거나 동의하지 않는 내 생각 혹은 방향성에 대해 끊임없이 설득하고 지지 않는 것이다.


강한 정신적 체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대부분은 이 과정을 겪기도 전에, 위에서 하라는 대로 그냥 하면서 마음만 힘들다. 그리곤 "버티고 있다"고 말한다. 그건 그냥 참고 있는거지 (내가 말한) 잘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답답한 양반이라고, 말 해 봐야 안 통할 것이라 해도 가서 이야기 하고 설득 해 보는 것. 친한 사이라도 공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얼굴 붉히는 한이 있더라도 짚고 넘어가는 용기. 어리디 어리고 철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내 업무를 진행하는 데에 중요한 인물이라면 자존심 접고 쿨하게 부탁하기.


"해 보긴 했어?"라는 물음피곤할 정도로 스스로에게 당당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하루하루 겪다 보면, 일주일, 한 달, 일 년이 금방 간다. 외롭겠지만, 그렇게 버티기 내공이 쌓인다.


둘째, 명백한 결과다. 사실, 치열한 과정을 겪으면 보다 나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과가 좋으면 스스로 만족스러운 것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잘 버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시작한다.


잘 하고 있나..싶어 꼬치꼬치 캐묻던 게 덜 해질 것이다. 동료가 나와 일할 때, 전 보다 열정적으로 책임감 있게 업무를 하는 것이 느껴질 것이다. 대놓고는 아니겠지만 어느새 공기가 그렇게 바뀌어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결과는 좋아야 한다.



무슨 업무든 하나는 결과가 좋아야 한다. 결과는 명백하고 냉정하다.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은 직급, 직책을 떠나 조직 내 암묵적인 영향력을 크게 발휘한다. 누구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또, 잘 버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헐떡이며 좋은 결과를 냈는가? 슬프지만, 당신께는 곧 더 높은 목표가 주어질 것이다(재충전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행복한 일이겠지만, 최소한 적자 비즈니스인 스타트업에서는 무한히 뛸 뿐이다). 더군다나, 언제나 뛰어난 결과만 내지도 못할 것이다.


더 높은 목표로 가는 과정에서 실수를 하거나, 안 좋은 결과를 낸 스스로를 보며 실망하거나 자책하는 순간이 온다. 그동안 승승장구를 해 온 사람일 수록, 더 큰 임팩트를 받을 것이다(자존심에 금이 갈 수도 있고).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겸허 해 지는 것이다. 감정을 빼야 한다.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본인의 과오를 인정한다고 해서 평가 절하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상사라면 오히려 칭찬할 것이다(내 경험이지만, 칭찬을 받으니 처음엔 좀 의외였다).


담담히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은 꽤나 용기가 필요하고, 일이 다시 돌아가게끔 숨을 고르는 것 또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내공이 쌓인 리더십일 수록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외면했던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 그 다음 단계로 진화한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시 진화한 버전의 '치열한 과정'이 시작된다. 이렇게 버티기 선순환 구조에 들어간다.



버틸 능력이 생겼을 때 비로소 드는 의문

버티기 진화를 단계 겪고나면, 생각이 많아진다. 다음번 버틸 상대가 기다리고 있고, 딱 보니 버틸 법한 사이즈는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전처럼 구미가 당기질 않는다.


얼마나 잘 버틸 수 있는지에 대한 치열한 검증 과정이 끝나면, 이제 버텨야만 하는 이유와 명분에 대해 반문하게 된다. 왜일까?


그 힘든 과정을 극복할 수 있었던 본질적 동기는 사실 회사나 비즈니스를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는 나 자신을 증명하고자 버텨왔을 것이다. 내가 어느정도까지 이뤄낼 수 있을까, 나는 남들과 똑같이 행동하지 않을거야 등의 다짐을 되뇌이며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왔을 것이다.


자타공인 높아진 스스로의 가치를 두고, 이제는 기회비용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걸 또 하느니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회사에서 나가 직접 비즈니스를 해 보면 어떨까? 하는 둥의 딴 생각들 말이다.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이 정도 수준이 되면 답은 둘 중 하나다. 1)매력도가 있으면서도 버티기 능력이 필요한 다른 미션을 어떻게든 찾아서 기존 둥지 안에 있거나 2)하루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서,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오만한 자신을 데리고 가서 이리저리 깨져봐야 한다.


예민한 리더는 해당 직원의 이러한 마음을 잘 알아차리고, 1)로 유도하기 위한 매력있는 비전을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한편, 2)의 경우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미 인정받는 둥지에서 벗어나 또 다른 도전을 한다는 것, 즉 예전에 겪었던 과정을 다시 zero base에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가치판단에 따라 결정할 뿐, 정답은 없다.






나도 버티고, 너도 버티고. 다들 버티고 있다고 해서 시작해 본 '버티기'에 대한 고찰. 이 글을 통해, 지금 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잘 버티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해 보는 기회가 된다면 좋겠다. 맷집이 아닌 전투기술을 늘리는 것이 진짜 '존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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