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겐 반갑지만 엄마에겐 마냥 반가울 수 없는 방학이 디가 왔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후 방학이란 걸 처음 맞이했을 때 우리 집은 학원을 보내는 것도 아니어서 다른 집 아이들처럼 방학이라 해서 특별히 짜인 스케줄이 없었다. 그래서 무방비 상태로 갑자기 주어진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건 아닌지 노파심도 생기고
초보맘으로서 긴 방학을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을지 고민하던 중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멘토 같은 선배맘이
조언을 해주었다. 초등 여름 방학, 겨울 방학을 합해 총 12번의 방학을 알차게 계획하면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배울 수 있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기회라는 것이다. 지나고 보니 참 지혜로운 조언이었다. 초등 아이들 중에는 긱자의 개성에 따라 공교육에 잘 적응하는 아이도 있지만 대량 생산되는 상품처럼 틀에
박힌 시스템을 거부하는 아이도 다소 지루하게 반복되는 단체 생활을 힘들어하는 아이들도 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후자의 성향이 강해서 방학 계획을 일방적으로 세우기보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지 항상 먼저 물어보았다.
방학의 원래 뜻은 '놓을 방(放)', '배울 학(學)'. 열심히 일한 어른도 재충전을 하며 쉬는 주말이 필요하듯
공부 또한 휴식을 하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해 보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초경쟁적인 사회 분위기와 부모의 과한 욕심으로 인해 초등시절 좀 더 즐거워야 할 학습이 대부분 피로와 과로로 얼룩지는
노동 수준으로 시달리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이런 세태가 서글퍼지기도 한다.
우리 집 두 아이들의 경우 방과 후에는 운동장에서 정신없이 노느라 학원은 고사하고 방과 후 수업조차도 제대로 들을 시간이 없다. 그래서 방학을 이용해 각자의 취미와 적성대로 방과 후 수업을 1-2개씩 신청하고 여유롭게 체험전을 많이 다녔다.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멀리 있는 놀이동산이나 명소를 가지 않아도 잘
찾아보면 가까운 공공기관이나 체험 장소가 꽤 많은 편인데 많은 부모들이 이것을 간과한다. 발품이나 손품을 팔아 검색하면 경제적으로, 체력적으로 큰 부담 없이 즐겁게 방학을 보낼 수 있다. 실제로 우리의 세금으로
지어진 각 지역의 청소년 수련관이나 도서관, 박물관만 해도 다양하고 알찬 프로그램이 많다. 대부분의
수업이 무료 혹은 수강료가 있어도 저렴한 편이라 연령대별로 다양한 체험을 골라 들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이런 프로그램은 학습 내용을 주입시키기나 선행을 하는 학교 수업과는 달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체험
수업이라는 점에서 질적으로 차이가 크다. 청소년 수련관이나 박물관 수업은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지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화하는 쌍방형 수업이라 아이들이 참 즐거워했던 기억이 난다. 두 아이의 초등 과정에서 이런 기회를 적극 활용해서인지 앞으로 몇 개월 뒤면 고등, 중등이 될 우리 집 남매는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 중에 하나가 공부일 정도로 교과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지적인 호기심을 잃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마냥 신나 하고 즐거워야 할 이런 현장학습이 욕심과 정보가 넘치는 일부 부모들에
의해 스케줄이 빡빡한, 학원식의 사교육화가 되어가는 과정도 가끔 보게 된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에너지 상태와 분포가 다르다 보니 아이들 성향과 맞지 않거나 끌리지 않는 체험 학습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 특히 이동 거리가 멀거나 아이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책과 마찬가지로 체험학습도
본인의 수준보다 조금 낮은 단계일 때 아이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엄마의 욕심에 의해
학년을 속여가며 고학년 수업을 듣는 경우까지 있다. 이런 경우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몇몇 친구들에 의해 나머지 친구들이 덩달아 피해를 보게 된다.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때 가급적이면 자기 학년에
맞는 체험 수업을 듣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아웃라이어>의 1만 시간의 법칙에서 소개된 것처럼 두뇌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은 외부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몰입인데, 공교육의 가장 아쉬운 점은 인위적으로 짜인 수업 시간표가 아이들의 몰입을 의도치 않게 방해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창의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 그리기나 과학 실험 등은 하다 보면 2~3시간이 금방 지나가는데, 학교에서는 정해진 스케줄을 따라가야 하니 서둘러 마쳐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방학 기간만이라도 두 아이가 실컷 몰입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짜기 앞서
비워두거나 의도적으로 내버려 두었다.
아이들이 방학을 어떻게 보내나 가만히 관찰해 보면, 나름대로 참 재미있게 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루 종일 빈둥거릴 것 같다가도 만화책이나 관심 있는 책만 뒤적거리는 날도 있고, 컴퓨터에서 특정 캐릭터나 사물을 찾아 비슷하게 흉내 내며 스케치만 하는 날도 있다. 가루쿡이라는 일본산 먹는 지점토로 간식을 만들며, 둘이서 깔깔 대며 동영상 촬영하는 날도 있으며, 문구에서 하드보드지 및 각종 재료를 사 와서 만들기를 할 때도 있고, 평소 해보지 못한 요리를 하며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런 다채로운 과정을 통해 방학 기간만이라도 평소 스케줄에 쫓겨 미처 해보지 못한 창의적인 활동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듯하다.
아이들에게는 정말 필요한 것은 무언가를 집어넣는 일방적인 교육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과 다양한 재료들이다. 이런 의미 있는 쉼의 시간들이 새 학기를 맞이했을 때, 또 새로운 학습을 향한 강한 흥미와 호기심으로
이끌어 이어주기도 한다.
요즘 아이들은 과거 우리 때에 비해 알아야 할 것도 배워야 할 것도, 다녀야 할 곳도 많아 정말 바쁘다.
부모가 앞서서 방학마저 수동적으로 무언가를 배우는 일로 채우기보다는 아이도 엄마도 좀 더 느긋한
마음으로 한 템포 쉬어가는 시간으로 만들면, 몸도 마음도 재충전도 되고, 즐거운 추억도 한가득 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