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영진 Nov 30. 2021

(방콕) Where is Chai? 2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Chai의 사진)




이 새끼 이거, 일부러 그러는 거 아냐?



방콕으로 향하는 야간버스에 함께 앉은 어리고 예쁘장하고 가느다란 게이는 내 왼쪽 어깨에 머리를 의탁하고 가는 숨을 골랐다. 이따금씩 버스의 덜컹거림에 실례했다는 듯 모가지가 꼿꼿해지기도 했지만 재차 거절의 예의도 없이, 상대의 의견 따위는 묻지도 않은 채 편히 안착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즐겨 애용해왔다는 듯 거부감 모양에 허이, 잠시 기가 차기도 했으나 뭐 닳는 것도 아니고 하여 사이좋은 커플처럼 머리를 맞대기도 했다. 그렇게 방콕의 새벽이었다.



내가 없어 보이나? 녀석은 쓸데없이 친절했다. 어디서 택시를 탈 수 있냐는 물음에 버스를 타는 게 좋을 거라며 북부 모칫 터미널의 버스 정류장으로 안내하고선 동분서주, 카오산으로 가는 버스를 수배했다. 그리곤 간명한 영어로 성의껏 버스요금과 예상소요시간을 일러주었다. 명함이라도 한 장 주고 밥이라도 한 끼 사야하나? 태생적인 선심에 대략적으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자 녀석은 우리는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듯 깔끔하게 이별을 고하며 쫙 달라붙는 블랙진에 워커부츠의 잔상으로 멀어져갔다.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일절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뭐지, 이 서운함은? 안타깝게도 녀석의 설파했던 버스요금과 예상소요시간은 녀석과의 별리에 대한 나의 상상만큼이나 깔끔하게 빗나갔다. 버스는 공짜였고 소요시간은 보다 짧았다. 그렇게 다시 카오산이었다.



캐리어를 끄집었다. 카오산 로드와 람부뜨리 로드를 사이에 두고 곧게 뻗은 대로를 따라 삼센 로드로 향했다. 이전, 중국 아가씨 모모와의 3박 4일 기나긴 데이트 중 그 근처 한 곳이 담당되었던 터라 그리 생소하지만은 않은 거리를 되짚어 강을 나누는 다리에 닿았다. 보슬보슬하던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는 가운데 강변에서 서성이던 우기의 악취가 호구 손님이라도 맞은 양 버선발로 덮쳤다. 오물 뿐 아니라 시체까지 더불어 발효된 듯한 유독함이 즉각적 반응을 초래했다. 냄새 좆같네. 설핏 인상을 구기며 캐리어를 세우고 기어이 담배를 빼물었다. 쪼옥, 깊이 빨리는 연기가 강직한 빗줄기에 난타당하며 위중하게 분산되었다. 네 손가락에 감싸인 그 한 개비가 수명을 다할 무렵 골목의 끝자락에서 걸음이 멈췄다. 땀과 빗물이 뒤범벅이었다. 그렇게 삼센 로드의 Where is Chai였다.



호스텔의 범국제적 랭킹을 절대 신봉하기에 투숙이 가능할 리 없었던 한인게스트하우스를 치앙마이 우유네에 이어 방콕에서마저 선택했던 데에는 나름의 속내가 분명했다. 어디 게스트하우스 매니저 자리 같은 거라도 없나? 부득이한 회향에 발악하고자 일말의 기대를 품어보았던 것, 결국 이는 무산되었고 백수건달로 변이한 지금에 와 회고하자면 그건 잘된 일이었다. 질척한 미련이 아닌 새로운 국면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별채를 따로 둔 본채는 좌측에 싱글룸이 자리 잡아 남은 거실이 복도처럼 기다랬다. 그 입구에서 듬성한 콧수염이 있을 뿐 대체적으로 평이한 인상의 40 중반 사내가 정자세로 앉아 간소한 다구를 통해 보이차를 달여 마시고 있었다. 새끼, 개폼은...... 설핏한 웃음이 비껴 흘렀다. 차 좀 아냐? 한번 읊어볼래? 오랫동안 그 바닥에 몸담았던 자로서 차를 하는 자들 특유의 오만이 떠올라 입꼬리가 올라섰다. 내가 왜 다동이야, 차 다(茶)에 아이 동(童), 그래서 다동이야! 그 이름을 세기말 때부터 썼다고, 알아 이 양반아! 단지 차를 달여 마시고 있다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무심을 둘러쓴 그 태도에 비위가 뒤틀렸다. 안녕하세요, 짧고 또렷하게 건네는 인사에 거기서 신발 신으시면 안 됩니다, 하는 냉담이 돌아왔다. 일순 공기의 틈이 생겼다. 거기에서 공동이 번져갔다. 그 공동에서 편견이 전개되었다. 이튿날 말을 섞고 나서야 서로 간 태도가 누그러지고 때론 살가워졌으나 첫인상은 그러했다. 스커트와 셔츠, 거기에 캐리어까지 오색찬란한 꽃무늬로 도배한 내 몰골을 느리게, 그리고 가만히 올려다보는 그 시선이 엷은 적의를 품고 하대하는 양 느껴졌다. 너 같은 놈들 많이 봤지...... 뭐 그런. 차 한잔 잡숴보시라는 소리도 없었다. 



목조계단과 계단참을 넘어 방으로 들어서자 깨어있는 이 하나 없어 사방 고요한 가운데 아침 8시까지만 작동한다는 에어컨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바람의 정면에 마주서자 웃옷을 벗어젖힌 몸뚱이에 매커니즘의 효력이 곱으로 작렬했다. 눅눅했던 세포 하나하나와 근육의 마디마디가 환호하며 널브러졌다. 과감한 전희에 돌입한 기분이었다. 이따금씩 삐걱대는 마룻바닥의 투정마저도 아늑했다. 거기에 느릿한 샤워가 더해진 후 심적 매무새는 이전과 완강히 결별하듯 분명한 마침표를 찍고 단단하게 정돈되었다. 다시 찾은 1층 복도 바깥에서 갓 눈을 떠 담배를 태우고 있는 두 여인과 맥주를 마셨고 개중 한 여인과 부대찌개에 소주를 넘겼다. 엎질러진 물을 끝까지 흡수한 탈지면처럼 몸뚱이는 그제야 간밤의 불면과 맞물려 나른한 한계를 호소했다. 돌아와 몸을 눕히자 기억은 삽시에 멀어졌다. 밝은 오전에 뛰어든 잠이 봄꽃처럼 아마득했다.



수면의 게이지가 풀에 임박하자 전신에 엷은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재그시 뒤척거리다 일으킨 몸뚱이는 모래주머니라도 매단 양 묵직했다. 팔목에 매달린 고장 난 시계의 시계침은 일관된 위치를 점하며 사후 세계를 떠돌고 있었다. 남아도는 시간에 대한 확인보다는 흡연이 절실했다. 미끈하게 마른 상의를 드러내고 강력한 펌을 장착한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꽃무늬 스커트 차림으로 1층에 내려섰다. 그와 동시였다. 와하하하, 자다 나온 모양이...... 모양이...... 와하하하......



필요 이상으로 커다랗고 또 흠씬 과장된 웃음이었다. 비몽사몽간 비척거리는 가운데 눈꼬리가 집히고 눈꺼풀이 모아졌다. 뭐야? 삐딱하게 고개가 올라 조준된 시선이 사선으로 내리꽂혔다.



예뻤다. H였다.



<계속>



 

작가의 이전글 (방콕) Where is Chai?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