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nda Jul 09. 2023

나의 여행이야기(2/3)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해 어느 정도 경제적인 독립이 시작되면서 내가 번 돈으로 해외여행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어학연수와 어학연수 후의 14일간의 유럽여행은 부모님의 지원이 있었다.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간 곳은 도쿄였다. 가장 가깝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도쿄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때는. 당시에는 내가 먼 훗날 이곳에서 살게 될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와도 여행을 자주 갔었다.

오빠들은 해외여행에 크게 관심이 없어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혹은 엄마와 둘이서 여행을 했었다. 물론 먼 곳은 아니었다. 가까운 아시아 여행을 했다.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부모님을 모시고 해외여행을 할 적, 핸드폰으로 지도를 길을 찾아가는 내 모습을 보고 아빠는 처음으로 스마트폰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핸드폰을 바꿨다.


부모님과 여행을 말리는 사람들도 참 많았다. 물론 부모님과 여행을 하다 보면 이래저래 제약 사항이 많기는 하다. 요즘 인터넷에 가족들과 여행하면서 하지 말아야 할 말들과 관련한 것들을 보면서 한참을 웃었다. ‘사람 사는 것이 다 똑같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1. 아직 멀었냐 금지
2. 음식이 달다 금지
3. 음식이 짜다 금지
4. 겨우 이거보러왔냐 금지
5. 조식 이게 다냐 금지
6. 돈아깝다 금지
7. 이돈이면 집에서 해먹는게 낫다 금지
8. 이거 무슨맛으로 먹냐 금지
9. 이거 한국돈으로 얼마냐 금지
10. 물이 제일 맛있다 금지

출처: 트위터

그래도 일상에서 모르는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나는 엄마와 아빠와의 여행이 좋다.

아빠가 호기심이 많고 여행 간 도시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도시의 역사에 관심이 많다는 것도
함께 여행하며 알게 되었고,
엄마가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좋아하고,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여행하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늘 보살핌만 받던 내가 부모님과 여행에서는 두 분의 완벽한 보호자가 된다. 나는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 부모님을 위해 새로운 세상을 구경 시켜 줄 수 있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해외에서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는 일, 지나가는 현지인에게 길을 물어보는 일 조차, 엄마와 아빠가 하는 패키지 여행에는 포함되지 않기에, 두분에게는 처음 해보는 경험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3박 4일 혹은 4박 5일, 휴가가 생기면 나는 여행을 했다.


어학연수 시절 함께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는 어학연수 후 7년이 지난 쯤에 런던으로 함께 여행을 떠났다.

그때 했던 여행은 추억여행이라 부를 수 있겠다. 7년 만의 맞이한 런던은 모든게 그대로라 좋았다. 예전의 살던 동네를 찾아갔고, 연수 시절 알았던 친구(여전히 런던에 살고 있는)들을 만났다. 또 연수 시절 맛있게 먹었던 우동집이 있었는데 정말 그때 기억으로는 그곳을 다시 찾아갔다. 레스토랑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았고 그냥 어디에 있었던 위치만 기억하고 있었다. 우동 맛은 그때 보다 더 맛있게 느껴졌고 또 정말 지도 없이 그 우동 가게를 찾아갔던게 신기했다. 학생 시절 뜨끈한 국물 음식을 먹으며 신나했던 그 시절의 감성이 올라와서 더 맛있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또 우리는 각자 일했던 아르바이트 장소를 찾아갔다. 다만 아쉬웠던 건, 서점이 사라진 것이었다. 옥스포드 스트릿 역 근처에 아주 큰 서점이 있었는데, 서점 안 스타벅스안에서 하루 종일 잡지와 책을 읽었더랬다. 그런데 그 서점은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변하며 서점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장소가 된 모양이었다. 우리의 추억 한켠도 함께 사라졌다.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크게 들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것들은 그대로였다.


여행을 하면서 런던에서 무언가를 특별하게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웠던 연수 시절에 장소들을 가서 보고 싶었다. 처음 히드로 공항에 내려  Tube(런던에서는 지하철을 튜브라고 부른다) 탔는데, 오히려 처음 대학시절 갔던 그때 보다 신기하고 새로웠다. 알던 장소이기에 그랬을까. 연수 후에 갑자기 영국에 대한 관심도가 커져, 영국 영화들을 많이 찾아봤었고, 영화 속 런던을 보며 ‘아 저기 내가 갔던 곳인데, 아 저기 내가 아는 동네인데' 하며 호들갑을 떨었었는데, 아마 그 그리움이 더 커 튜브를 탔을 때 오히려 기분이 새로웠나 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는 맛이 더 맛있는 법이라는 말을 하는 걸까.

7년만의 마주한 런던은 또 새로운 경험을 내게 선사했다. 특히 사람이 그러했다. 어학원에서 알던 친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영어를 배우러 온 학생의 입장에서 만났던 우리는 이제 직장인으로 만나게 되었다. 더 이상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신분이 아니었다. 인생의 소중한 추억 한 켠을 공유하는 건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된다. 우리는 밤새 그때의 이야기를 나누며 새롭게 다른 추억 한켠을 다시 덮어 쒸었다. 내가 런던에 다시 방문해, 친구들을 만난다면 우리는 또 오늘의 이야기를 나누겠지.

 

3박 4일 이의 여행이 되었던
7박 8일의 여행이 되었던, 여행을 통해 나는 점점 더 새로운 세계가 궁금해졌다.
내가 가보지 않은 길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내가 가보지 않은 길 위에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이후에 나는 혼자 하는 여행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그 궁금증이 더 컸기에. 새로운 길 위에서 알게 될 새로운 세상이 더 알고 싶었기에.


여러 여행 중 세 번의 혼자만의 여행이 있었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브런치에 다뤘었다).


2월에 갑자기 혼자 떠나게 된 뉴욕. 

겨울에 똑같이 겨울인 나라로 가는 것은 그다지 매력적인 옵션이 아님에는 틀림없다. 비행기 티켓값이 그 증명을 하는 것이 아닐까. 왕복 90만 원 정도로 대한항공을 타고 뉴욕을 갔다 올 수 있었다. 이 전 파리여행 시 에어비앤비에서 묶었던 경험이 너무 좋아 뉴욕 여행에서도 단연코 숙소는 에어비앤비로 예약했다. 내가 예약한 숙소는 뉴욕 윌리엄스버그의 부쉬윅(williamsburg bushwick)에 위치한 곳이었다. 층고가 매우 높은 갤러리 같은 숙소였다. 예전에는 공장지대여서 대부분의 집은 공장으로 쓰던 곳이라고 들었다. 숙소는 큰 거실 하나에 방은 네 개가 있었고, 그중 한방은 숙소 호스트가 실제로 쓰는 공간이었다. 밤늦게 도착한 뉴욕은 꽤나 무섭게 느껴졌다. 숙소로 가는 지하철은 왠지 모르게 으스스했고, 지하철을 내려 숙소로 가는 길목은 어둠이 깊게 깔렸다. 길거리에는 사람도 가게도 보이지 않았다. 숙소 도착하자마자 나를 맞이해 준 호스트를 보니 마음의 안정되었다. 뉴욕에 산지 5년 된 스페인 커플. 그리고 이미 숙소에는 가수 지망생이었던 미국인 숙박객도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짐을 풀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스페인 커플 역시도 스페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되었으며, 가수 지망생인 미국인 친구 역시도 여러 미국의 도시를 돌며 녹음을 하고 있었는데 뉴욕에 도착한지 얼마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렇게 4명 모두 여행의 여독이 모두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그 집에서 만났다. 딜리버리 음식을 시켜 먹는다 해서 도착하자마자 나도 음식을 같이 시켜 먹고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그 이후에도 다정한 호스트 덕에 나는 7일간의 여정동안 잠시 머무르는 이 공간을 내 집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내가 하루 일정을 마치고 들어오면 오늘은 어디를 갔다 왔냐며 다정하게 묻는 그들. 숙소 근처에 맛집을 추천해주기도 했고, 종종 와인을 마시며 밤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프리랜서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그들이 가지는 주요 일이었다. 집에 있는 가구들의 일부는 누가 버린 가구들을 가져다가 색을 다시 칠하고 때론 일부를 리폼해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누가 쓰다 버린 물건들을 새로운 가구로 탄생시켜 재사용하는 그들. 언젠가는 노숙자를 대상으로 가구를 만드는 일 교육하고 싶다고도 했다. 일종의 재능기부처럼. 그들에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손님들 방에 인테리어를 매일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꾸밀까 고민하기도 하고, 있는 가구들을 매일 재배치하기도 하고, 또 인테리어 의뢰가 들어오면 스페인으로 가서 일을 하다 오기도 한다고 했다. 또 지금 집은 스튜디오처럼 촬영으로 공간을 빌려주기도 한다고 했다.


그들에게 일은 어떤 의미일까.


혼자 여행에는 당연히 외로움이라는 단어는 불가항력적인 요소이다. 특히 뉴욕이라는 도시는 혼밥을 위한 도시는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정말 식당에 나 빼고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도 괜찮다 여러 번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음료를 시켜 먹는 것에 눈치가 여간 보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카페에서 한 끼를 때웠다.


한 번은 정말 용기 내어 혼자 재즈바를 찾아갔다. 늦은 시간 재즈바에 혼자 찾아가는 것도, 재즈바에 들어가기 위해 혼자서 줄을 서는 것도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다들 친구들과 연인들과 그렇게 줄지어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은 어쩜 혼자 여행하기 위해 좋은 장소는 아니다 생각하며, 쭈뼛쭈뼛 괜찮은 척 서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작은 체구의 일본인이었다. 누군가의 인사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혼자 왔냐며,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어왔다. 자기도 혼자 왔는데 같이 공연을 보지 않겠냐며 제안을 해왔다. 혼자 와서 위축한 나를 알아본 걸까 아니면 재즈 공연을 들어가기 위한 긴 줄에 혼자 서 있는 동양 여자인 내가, 혼자 온 그녀에게도 한눈에 보였던 걸까. 그렇게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함께 테이블을 잡고 공연을 즐겼다.


우연히 만난 그녀는, 도쿄 출신이었고, 도쿄의 유명한 대학을 나왔으며, 뉴욕으로 건너온 지는 4년 정도가 되었다고 했다. 음악을 전공한 그녀는 재즈 음악에 매료되어 도쿄에서도 재즈 반주를 했었는데, 그곳에서 한계를 느껴 안정적인 도쿄의 생활을 뒤로하고 무작정 뉴욕으로 넘어왔다고 했다. 뉴욕으로 온 지 4년이 되어가지만, 영어가 크게 늘지 않는 것 같다는 그녀. 제대로 된 밴드에서 소속되어 공연을 한 적이 없다고, 뉴욕 로컬 밴드에 들어가기에는 영어가 부족해 밴드 멤버들과 대화가 안 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도 뉴욕에 살면서 시간이 될 때면 이렇게 좋은 재즈바에 와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어 뉴욕에 사는 게 행복하다는 그녀. 비록 현재까지는 큰 성과가 없지만 앞으로는 두려움을 이겨내 어디서든 공연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뉴욕 삶은 힘들지만 한 번도 뉴욕의 온 걸 후회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공연이 시작되었다.


처음 보게 된 재즈 공연. 좁게 수직으로 길게 펼쳐진 곳 끝에 무대가 있었고 우리는 무대의 한 3번째쯤 되는 테이블에 앉아서 공연을 보았다. 한껏 차려입고 온 중년의 커플도 있었고, 청바지와 운동화 차림으로 친구들과 공연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 처음 본 그녀와 나지만, 동양인 두 여자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그들 사이에 섞여 함께 맥주를 마시며 공연을 즐겼다. 재즈 공연은 공연장 안의 분위기와 더해져서 그랬는지, 이루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몰입해 최상의 결과물을 내는 모습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연주자 중 한명이 마이크를 잡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점점 재즈에 사람들이 관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자기도 안다며. 누군가는 얼른 재즈일을 그만두고 다른 길로 접어들라고 충고를 한다고 한다. 그래도 끝까지 이렇게 공연을 할 수 있는 건 본인이 사랑하는 것은 재즈 음악이고 이를 끝까지 지지해 주는 와이프가 있기에 가능하다고.

호기심에 갔던 재즈바, 그날은 완벽한 밤으로 끝났다.


뉴욕에서 만났던 그녀는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 지금 뉴욕에서 어떤 재즈 연주자가 되어 있을까?
 그리고 그 공연장의 그들은 여전히 재즈 공연을 하고 있을까.


어쩜 내가 그렇게 새로운 길을 궁금해했던 건 여행을 통해서 만나게 될 내가 모르는 어떤 누군가의 삶이, 결국 사람이 궁금해서였는지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여행 이야기 (1/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