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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Dec 06. 2020

금이빨 삽니다

1

“이거 결국 빼야 할 거 같은데요?”


영준은 상태가 안 좋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의사가 뒤이어 이가 그렇게 된 원인에 대해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지만 영준의 귓가에는 계속해서 ‘이를 빼야 한다’는 말만 맴돌았다. 의사는 진료의자에 달린 모니터에 엑스레이 사진 하나를 띄웠다. 자신의 설명을 듣고 있지 않는 영준을 보고 의사가 괜스레 헛기침을 하였다.


“저기 잇몸과 치아 뿌리 사이에 검은색 실선 같은 게 보이죠?”


영준의 눈이 화면 속 마우스 포인터를 따라 움직였다. 의사의 말대로 치아 뿌리를 따라가는 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금이 간 거예요. 저 틈새로 세균이 침투해서 염증이 시작된 거 같아요. 치아 뿌리 사이에 까만 부분이 보이죠? 염증이 심해져 잇몸뼈가 녹아 저렇게 보이는 거예요. 반대편이랑 비교해서 보면 차이가 확실하죠?”


영준은 의사가 조작하는 마우스 포인터를 따라 반대편 어금니로 눈을 돌렸다. 의사의 설명대로 잇몸뼈가 꽉 차있어서 하얗게 보였다. 영준은 다시 문제의 어금니를 바라보았다. 아프지는 않지만 불쾌한 미열이 저 검은 공간에서 계속해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럼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거죠?”


“음... 당장 잇몸을 열어서 뼈가 녹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염증을 제거할 순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저 실금을 따라 세균이 침투할 거고 그러면 다시 저 부위에 염증이 생겨 남은 잇몸뼈까지도 계속해서 녹게 되는 상황이 반복될 거예요.”


“치료하고 잘 관리하면 다시 염증이 안 생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먼저 말씀드리자면 실금을 다시 붙게 할 순 없어요. 지금 상황에서는 세균이 침투할 수 있는 길을 막을 조치를 취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아무리 잘 관리하신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우리 입안에는 항상 세균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또다시 저 통로를 따라 침투할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 마지막으로 잇몸뼈는 한번 녹으면 다시 생기지 않아서...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계속해서 녹아들어 갈 거예요.”


영준은 더 이상 질문을 하기 위해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나중에 임플란트라도 하려면 그나마 잇몸뼈가 좀 남아있을 때 하는 게 좋아요. 그렇지 않고 이대로 방치해 두었다가 잇몸뼈가 더 녹아버리면 임플란트를 하기 전에 뼈이식을 해야 돼요. 그런 단계까지 간다면 환자분께서 금전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 고생하게 되실 거예요.”


사실 그 어금니는 이미 5년 전에 죽었다. 그해 어느 여름밤, 영준은 강렬한 치통 때문에 잠에서 깼다. 나름 자신의 참을성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영준이었지만 그 밤만큼은 무의식의 심해에 빠져있던 그를 날카로운 치통이 수면 위로 낚아 올렸다. 바로 다음날 영준은 그가 사는 동네 근처에서 그래도 환자에게 무리한 치료를 권유하지 않는 것 같은 치과를 골라 찾아갔다. 검진을 받으니 세균이 치아 신경조직에 침투하여 염증이 생겼다고 하였다. 영준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의사는 신경치료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에 들어본 적은 있지만 한 번도 받아본 적은 없는 치료였다. 영준은 아마 약물 같은 것을 써서 신경을 살리는 치료라고 짐작하였다. 하지만 그 치료의 실상은 세균에 감염된 신경을 포함하여 치아 내부의 모든 섬유조직을 다 제거하고 그 빈자리에 인체에 무해한 충전재를 채우는 것이었다. 신경치료를 받아본 적이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신경과 섬유조직을 긁어낼 때 뼈를 타고 전해지는 울림을 느끼는 것은 살면서 굳이 다시 겪지 않아도 될 경험들 중 하나였다. 2주 가까이 지루하고도 불쾌한 치료가 끝난 뒤 의사는 금으로 크라운을 씌우는 것을 추천했다. 한번 문제가 생긴 이를 계속해서 사용하긴 위해서 그만한 조치가 없다고 하였다. 영준의 머릿속에 어머니가 입을 벌리고 웃으실 때 반짝이던 어금니가 떠올랐다. 괜스레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 영준은 자신의 생활비로 그 어금니에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 이후로 몇 년간은 금을 씌운 어금니뿐만 아니라 다른 치아들에서도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강해진(!) 어금니에 대한 신뢰가 커지자 영준은 다음 정기검진 때 의사가 예방차원에서 반대편도 금을 씌우는 게 좋겠다는 제안을 단번에 수락하였다. 또다시 통장 잔고는 여위었지만 평생을 함께해야 할 어금니를 생각한다면 그깟 40만 원을 또 들이는 건 전혀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방심하는 순간, 견고하다고 믿었던 가드 사이를 비집고 카운터 펀치가 날아온다. 방금 들었던 의사의 설명을 복기하면 당장 그 어금니를 뽑는 것이 여러모로 합리적인 건 분명하였다. 하지만 영준은 금이 아깝기도 하였지만 아직 30대 초반의 나이에 그것도 보통 이가 아닌 여러모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어금니를 뽑는 것 쉽게 내키지 않았다.


“선생님, 그럼 오늘은 잇몸치료라도 해주세요.”


의사는 무슨 말을 하려 입을 떼다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부드럽게 눈을 한번 깜빡이고는 뒤에 있는 치위생사에게 마취주사를 준비시켰다. 어금니 주변으로 따끔한 벌침 같은 주사가 몇 방 놓였다. 어쩌면 진짜 벌침일 수도 있다. 예전에 한의원에서 근육통 치료를 받으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벌침으로 치료를 받았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벌침을 맞은 곳이 심각하게 부풀어 올라 피부과에 가보니 영준에게 벌침 알레르기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피부과 의사는 본인의 체질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함부로 검증되지 않은 시술을 받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그에게 충고하였다. 어린 시절 종종 아버지를 따라 할머니 산소에 벌초하러 다닐 때 벌에 쏘여본 적이 있었는데 조금 따끔한 느낌과 피부가 살짝 붉어졌던 것 같아서 전혀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어쩌면 크면서 체질이 바뀐 것일 수도 있다. 


치료는 염증이 생긴 어금니의 잇몸의 양옆을 절개하여 금속 줄톱을 염증 부위에 집어넣고 긁어내는 방식이었다. 정말 다행하게도 마취약이 잘 들어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줄톱이 만들어내는 기괴한 연주가 영준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만약 마취 없이 받는다면 분명 시작부터 졸도하고 말 것이다. 치료는 생각보다 길어졌는데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영준은 마지막엔 약간 졸기도 했던 것 같다. 의사는 약간 진이 빠진 목소리로 영준을 깨우고는 새로 온 환자를 보러 갔다. 입안을 헹구니 온통 시뻘건 것들이 섞여 나왔다. 영준은 치료를 위해 잇몸을 째고 다시 꿰맨 부위의 봉합실 끄트머리가 혀에 닿는 것이 거슬렸다. 한 시간 가까이 긴장한 채 빳빳하게 누워있어서 그런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약간의 현기증이 느껴졌다. 치위생사의 안내를 따라 진료실을 나왔다. 대기실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두 세분 앉아있었다. 영준이 소파에 앉으려 하자 수납 데스크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의식적으로 미소를 짓기 위해 얼굴 근육에 잔뜩 힘이 들어간 직원이 영준을 맞았다. 직원은 자신 앞의 모니터를 돌려 다음 주 진료 예약 스케줄을 보여주었다. 날짜와 시간의 행렬로 만들어진 표의 대부분이 빨간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영준에게는 딱히 선택지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처방전을 인쇄하여 건네주는 움직임을 보건대 아직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마냥 어려 보이는 외모가 아닌 것을 감안하면 전에 이런 종류의 일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치료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로 처방전을 들고 치과를 나섰다. 근처 약국을 찾아서 골목 차도 지나가는데 근처에서 신경에 거슬리는 마찰음에 이어 뭔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영준이 고개를 돌려보니 8차선 도로 한가운데 용달 탑차가 옆으로 벌러덩 누워있었다. 충돌 때문이었는지 탑 차 뒷문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 있던 박스들이 도로 위로 튀어나와 나뒹굴고 있었다. 골목에서 큰길로 갑작스레 나오다 부주의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하마터면 영준이 그 차에 부딪혀 크게 다칠 수도 있을 뻔하였다. 멀리서 달려오던 큰길 위의 차들이 사고가 난 것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휴대전화로 119에 신고하는 모습이었고 다른 몇 명은 차 내부에 있을 사람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영준도 그 주변으로 다가가 도울 일이 없을까 살펴보았겠지만 지금은 퉁퉁 붇고 얼얼한 잇몸 때문에 제코가 석자였다.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사고 당사자를 돕기 위해 모였으니 굳이 영준까지 가서 사고 현장을 번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영준 옆을 스쳐가는 사람들 사이로 근처에 있는 약국이 보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밖과는 다르게 한기가 느껴졌다. 마치 냉동창고 안으로 들어온 듯 서늘한 기운이 영준의 온몸을 감쌌다. 데스크 너머에는 안경 낀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동공이 풀린듯한 눈으로 미동도 하지 않고 서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홀린 듯한 모습이었다. 영준과 약사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몇 분간 흘렀다. 그러다 약사가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공간에 들온 것을 깨닫고는 영준을 바라보았다. 약사는 난생처음 보는 생명체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그 시선을 받고 있는 영준은 오싹한 기분이 등골을 스쳤다. 왠지 이곳에서 약을 받으면 안 될 것 같아 영준이 발을 돌려 나가려고 하는데 약사가 영준을 향해 다가오라고 손짓하였다. 영준은 왠지 거절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영준이 긴장한 채로 가만히 서있자 약사는 영준의 손에 들린 처방전을 가리켰다. 영준은 그제야 자신의 손에 계속해서 처방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에게 건네주었다. 처방전을 받아 든 약사는 발소리도 내지 않지 안쪽에 있는 조제실로 사라졌다. 다섯 평 정도 돼 보이는 약국 내부는 갑갑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형언할 수 없는 을씨년스럽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벽면에는 군데군데 텅 빈 선반들이 보였다. 꽤 오래전부터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관리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영준이 계속해서 약국 내부를 훑고 있는데 벽에서 튀어나온 기둥 위에 걸린 약사 자격증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빛바랜 나무액자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고 그 안의 누런 종이에서 적어도 이십 년의 연륜이 느껴졌다. 자격증 두 개 중 하나는 방금 그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던 약사의 것 같았고 다른 하나에는 어떤 여자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남자와 함께 약국을 운영하는 그의 부인이 아닐까 싶었다. 한눈에도 선해 보이는 인상이 상냥한 사람일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상태는 사진 속 여자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영준은 어느새 액자 바로 아래까지 다가가 좀 더 자세히 여자의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고요한 적막을 가르는 종소리가 들렸다. 약사가 카운터 위에 있는 녹슨 종을 누른 것이었다. 종은 보이는 상태에 비해 그 울림이 남달랐다. 약사는 영준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느 누구도 여자의 사진을 보면 안 되는 것처럼. 곧이어 약사는 한 손에 쥐고 있던 약봉투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영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영준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는데 생각해보니 약값을 달라는 것 같았다. 영준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카드를 내밀었다. 영준의 손에 들린 플라스틱 쪼가리를 보고 약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새 카드를 안 받는 곳이 아직도 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따져 묻지는 않았다. 영준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다행히 지갑에 가끔 예비로 넣어두는 만 원짜리가 한 장 있었다. 남자는 카운터 아래 서랍을 열어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영준은 손에 돈이 잡히자마자 재빨리 약국을 나왔다. 바깥공기를 들이마시자 영준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깟 미세먼지가 대수인가? 영준이 심호흡을 몇 번하고 발길을 옮기려는데 그의 머릿속에 묘한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영준은 조심스럽게 유리문에 몸을 붙이고 약국 안을 들여다보았다. 약사는 영준에게 거스름돈을 돌려주고 난 모습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영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분명 눈은 영준을 향하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동공이 풀려 있었다. 영준이 볼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입꼬리가 부자연스럽게 많이 올라간 것이었다. 영혼이 빠져나간듯한 그의 눈동자는 이제 모든 것들을 빨아들일 것 같은 블랙홀로 변하였다. 영준은 온몸의 털들이 곤두선 채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불쾌한 기운을 떨쳐내기 위해 노래를 듣는 것보다 더 빠른 처방은 없을 것이다. 영준은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언제나 그렇듯 이어폰은 주머니에만 들어가면 신기한 모습으로 꼬여있었다. 아무리 바르게 정리해서 넣어두더라도 이어폰은 항상 억지로 그렇게 꼬기도 어려울 것 같은 상태가 되어있었다. 영준은 이어폰 줄을 정리하는 감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런 것 까지 사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줄을 푸는 것은 나름 재미와 보람이 있었다. 또한 영준이 계속해서 그렇게 하는 것에는 꼬여가는 듯한 자신의 인생도 이어폰 줄처럼 잘 풀리길 바라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영준은 몇 해 전 개봉한 영화의 주제곡을 재생시켰다. 극 중에서 여자 주인공이 남자 친구에게 생일선물로 만들어준 노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는 그 노래로 인해 둘 사이가 완전히 멀어지게 된다. 사실 여러 면에서 완성도가 높은 영화라고 하긴 어려웠지만 극장을 나서고 난 뒤 영준의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그 노래들이 영화 속 장면들과 반복되었다. 특히 <Lost Stars>를 라는 제목의 노래는 철학적인 가사와 애절한 멜로디가 자기 연민에 빠지고 싶을 때 들으면 필이 충만해지는 노래였다. 어느새 영준이 가장 좋아하는 클라이맥스 후렴부에 다다르고 있는데 갑자기 음악이 끊겼다. 충전된 지 얼마 안 된 데이터를 금세 다 써버렸다는 짐작에 영준의 입에서 탄식이 나오려 하는데 휴대전화가 진동하였다. 다행히도 데이터가 끊겼다는 메시지가 아닌 어머니의 전화였다.


“아들~ 뭐하니?”


“점심 먹고 사무실 들어가고 있어요.”


“뭐 먹었니?”


“샌드위치 사 먹었어요.”


“에휴... 그 빵 쪼가리 먹고 일할 힘이 나겠어? 저녁에는 꼭 밥 챙겨 먹어라.”


“네 걱정 마세요. 점심은 드셨어요?”


영준이 퇴사를 한 것은 3개월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이야기를 어머니께 알리지는 않았다. 괜히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다. 계산기를 두드려 보니 반년 정도 많지는 않지만 모아둔 돈과 실업급여로 버틸 수 있다는 견적이 나왔다. 영준은 가족들에게 특히 어머니한테 자신의 각본대로 연기만 잘하면 다시 직장을 구할 때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근데 감기라도 걸린 거야 목소리가 이상하네?”


어머니는 귀신같이 영준의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들의 미묘한 변화를 단박에 알아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지만 가끔 그 사소한 차이를 구분해내는 어머니의 능력에 감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니에요. 코가 막혀서 그래요.”


영준의 코가 막혔을 때와 잇몸의 마취가 덜 풀렸을 때 목소리 차이를 전화로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어머니뿐이지 않을까?


“오늘 반찬 이것저것 좀 해서 택배로 보냈어. 내일 오후쯤에 도착할 거니까 퇴근하고 바로 집에 가서 받아서 잘 정리해둬라. 이번에 새로 담근 김치가 약간 짜던데 밥에 물 말아서 먹으면 괜찮을 거야. 그리고 이번에 민지네 엄마가 즈그 오빠가 보내준 고급 멸치를 좀 나눠줘서 볶아서 같이 보냈다. 역시 비싼 거라 그런지 크기도 크고 맛있더라. 거기다가 콩자반이랑 매실 원액도 같이 보냈다. 아!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땅콩도 볶아서 넣었으니 조금씩 아껴먹어. 땅콩을 너처럼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안 좋데. 근데 이번에 처음으로 땅콩을 볶아봤는데 재밌더라. 사 먹는 것보다 훨씬 개미가 있더라. 나중에 또 해서 보내줄게.”


어머니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영준에게 반찬과 먹을 것들을 보내주신다. 하지만 부모님과 따로 사는 여느 다 큰 자식들처럼 그도 어머니가 보내주신 반찬과 먹을거리를 잘 챙겨 먹지 않았다.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것이 귀찮은 것도 있고 밖에서 사 먹으면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었다. 몰론 설거지 같은 주방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종종 오랫동안 손도 대지 않은 반찬이나 과일들이 썩기 일쑤였다. 어머니가 아시면 마음 아파할 것이 뻔하니 가끔 어머니가 서울에 올라오신다고 하면 그전에 몰래 내다 버렸다. 오늘 부친 택배 이야기가 끝나자 어머니는 늘 그렇듯 주변 사람들의 근황을 전해주셨다. 최근에 어머니의 친구 아들이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서울에 있는 나름 괜찮은 사립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었다는 소식부터 며칠 전에 암으로 투병 중인 엄마의 고모님을 뵈러 요양병원에 갔는데 시설이 마치 고급 호텔처럼 삐까뻔쩍하게 좋아서 놀랐다는 것까지 일면식도 없거나 십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머니는 마치 바로 옆에 사는 이웃의 근황처럼 전해 주셨다. 영준이 어머니의 근황 토크를 듣고 있으면 분명 자신의 이야기도 누군가의 어머니의 입에서 입으로 떠돌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귀가 자주 간지러운 것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것 같지 않았다. 통화가 점점 길어질수록 마취가 풀리며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 일하로 들어가야 할 거 같아요.”


“어머 미안해 아들~ 내가 얘기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네가 말을 못 했네. 그래 밥 꼭 챙겨 먹고 일 열심히 해라! 우리 아들 사랑해~”


“네~ 저도 사랑해요 엄마!”


통화가 끝나자 다시 노래의 후렴 부분이 흘러나왔다. 영준이 노래에 감정을 싣기 시작하자 눈이 저절로 감기고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열심히 비음을 길게 뽑아내고 있는데 영준은 뭔가와 부딪혔다. 눈을 떠보니 그의 앞에는 덩치가 왜소한 어르신이 몸이 기우뚱거리다 중심을 잡고 있었다.  한참 유행이 지나 그만큼 때가 타버린 자수가 박힌 모자, 색이 바래 누런 빛을 띠는 검은 점퍼를 입고 있는 어르신은 한눈에도 거친 일을 하시는 분 같았다.


“학생, 괜찮아요?”


“아... 괜찮습니다.”


“걸어가면서 노래 듣는 것도 좋지만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요. 앞길이 창창한데 다치면 안 돼요.”


“네...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어르신의 상냥한 반응에 영준은 조금 어리둥절 해졌다. 어르신의 뒷모습이 아까와는 다르게 전혀 작아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 길가에서 어떤 어르신과 부딪힌 적이 있었다. 영준은 피해 가려고 했지만 그분이 약간 의도적으로 영준에게 몸을 밀고 들어오면서 부딪혔다. 그래도 영준은 자신이 젊은 사람이기에 먼저 사과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 먼저 괜찮으시냐고 물었다. 한데 그분은 매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영준이 아무리 사과를 해도 ‘요즘 것들은 예의가 없다.’, ‘어른 공경을 할 줄 모른다.’, ‘말세다 말세’라는 말을 반복하며 사과를 받지 않으셨다. 중간에 '가정교육이 잘못되었다'를 들었을 때는 그건 좀 심하지 않냐고 대꾸를 하려다가 참았다. 그런데 방금 마주친 어르신은 전에 부딪힌 분에 비해 행색이 여유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표정과 말투에서 느껴지는 배려심과 정신적인 깊이의 수준이 훨씬 더 높으신 분이었다. 영준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면의 성숙도가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문득 어르신의 모자에 자수로 박힌 글자가 떠올랐다.


'A Happy Day'


집에 도착하여 약을 먹으려는데 약 봉투에 적힌 ‘식사 후 30분’이라는 글자가 영준의 눈에 들어왔다. 이제 통증은 칼로 잇몸을 계속해서 후벼 파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영준은 복용 지시를 무시할 수 없었다. 누군가 감시하거나 어긴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영준은 작은 것도 매뉴얼을 따라 해야 마음이 놓이는 타입이었다. 인덕션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기름을 둘렀다. 영준은 계란 두 개를 깨서 우유를 조금 부어 넣고 재료들이 온전히 섞일 때까지 열심히 저었다. 이렇게 아픈 순간에도 그는 간단한 스크램블 에그조차 자신의 레시피대로 만들었다. 이제는 통증으로 발까지 동동 굴렀지만 프라이팬 위에 계란물을 붓고 천천히 젓기 시작했다. 이제 영준의 입에서는 욕 비슷한 감탄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금방 완성된 스크램블 에그를 영준은 입안으로 빠르게 밀어 넣고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수십 년 같을 30분 뒤로 바늘이 빨리 움직이길 바랬다. 영준은 휴대전화로 동영상 재생 플랫폼을 열어 인기목록을 훑어보았다. 죄다 자극적인 소재와 제목과 영상들이 가득하였다. 이런 영상들의 조회수는 수백만 회가 넘었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일반인들이 직장 생활하며 받는 연봉을 매달 벌어들인다고 하였다. 분명 그들도 손쉽게 영상들을 만들지는 않을 것이지만 왠지 모르게 보통사람들에게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서 영상을 만드는 크리에이터를 한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같기도 하였다. 그러다 문득 영준은 검색 창에 '임플란트'를 입력해 보았다. 예상보다 많은 동영상들이 올라와 있었다. 대부분 치과의사들이 제작한 영상들이었다. 이제 치과의사도 그냥 병원에 앉아서 환자가 제 발로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시대는 지나고 자신의 병원을 알리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서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영상편집 능력도 갖추어야 하는 세상이 온 것이다. 영상들 속에 간간히 나오는 실제 시술 장면은 영준의 통증을 배가 시켰다. 그래도 영상들 덕분에 30분이 금세 지나갔다. 영준은 가방에서 얼른 약봉지를 꺼냈다. 투명한 봉지 안에는 알록달록한 원색의 알약이 대 여섯 개가 들어있었다. 그중 몇 개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네주었던 알약과 비슷해 보였다. 순간 영준은 자신이 매트릭스에 맞설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의 운명을 짊어지게 될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포마드로 빗어 넘긴 머리, 검은 선글라스, 발목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입고 수많은 스미스 요원 무리를 단번에 박살 내 버리는 The ONE이 바로 영준 자신인 것이다. 하지만 유치한 상상놀이는 금세 현실의 통증으로 산산이 깨져버렸다. 영준은 약봉지를 뜯어 입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영화처럼 약효가 바로 나타나지 않기에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래도 약을 먹은 것만으로도 통증이 조금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영준은 사람이 느끼는 감각이라는 건 어찌 보면 물리적인 요소보다 심리적인 요소에 크게 좌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매트릭스>가 괜히 명작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다시 한번 찾아왔다. 약효가 빨리 퍼지도록 하기 위해서 체온을 높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영준은 침대로 가서 바른 자세로 누워 이불을 덮었다. 영준은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언가 덮고 있으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 가끔 불안한 기분이 들 때면 자주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약간 답답한 것도 있었지만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나거나 천재지변으로 세상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이불이 다 막아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불은 치통을 막아 주진 못했다. 간혹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지진계와 비슷하게 생긴 기구가 영준의 머릿속에서 통증의 강도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바늘은 계속해서 돌아가는 드럼에 감긴 하얀 종이 위에서 폭풍우가 몰아친 거친 바다 위의 돛단배처럼 요동쳤다. 이제 영준의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오락가락하는데 갑자기 눈에서 뭔가 흘러내렸다. 배겟잎이 축축해진 것이 눈물인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였지?’


기억을 들춰보지만 최근 몇 년 동안은 없었던 것 같았다. 이제 약기운이 좀 퍼지는 듯 몸이 허공에 뜬 것처럼 몽롱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어렴풋이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너무 흐릿해서 무슨 장면인지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아마 영준이 마지막으로 눈물을 흘렸던 순간인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사람의 실루엣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굴까? 영준은 흐려져가는 의식을 어떻게든 붙잡아서라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이어 무대 위의 조명이 꺼지듯 실루엣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방 안은 어두웠다. 영준은 정말 잠시 눈을 감았다 뗀 것 같았는데 이미 해가 지고 늦은 밤이 되었다. 창을 통해 가로등 불빛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그런데 영준이 사는 집은 아파트 12층이었다. 창 밖에 가로등이 보일 리가 만무하였다. 정신을 차리려 의식적으로 눈에 힘을 줬다 풀었다 반복하는데 천정에 못 보던 자국이 영준의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눈코입 같은 형상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그렇다. 5년 전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 살던 자취방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건물치고 벽과 천정 벽지 곳곳에 곰팡이 자국이 있었다. 침대에 누우면 똑바로 보이는 천정에도 하나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의 얼굴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영준은 도무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그 얼룩에게 ‘덤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잠들기 전 덤덤이를 보면 그날이 영준에게 어떤 하루였는지 정리가 되었다. 덤덤이가 웃는 듯이 보이면 즐거운 하루였고 울고 있다면 슬프거나 아쉬운 날이었다. 그런데 그 자취방을 떠난 이후로 생각조차 나지 않았던 덤덤이가 지금 바로 영준의 머리 위에 있었다. 혹시 덤덤이가 그냥 곰팡이 얼룩이 아닌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던 것일까? 볼 때마다 그 표정이 변한다고 느꼈던 것 영준의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로 얼굴의 모습이 변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영준은 온몸에 닭살이 돋아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방 안을 둘러보니 뭔가 이상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아닌 것 같았다. 대각선으로 보이는 방의 왼쪽 구석에는 주방이 있었고 싱크대 옆으로 꼬마 냉장고가 보였다. 그 벽면을 따라 책장이 맞붙은 일체형 책상과 붙박이 옷장이 보였다. 정면으로 문이 하나 보였는데 집안에 있는 방의 문 이라기보다 복도로 나가는 현관문 같아 보였다. 그 아래로 단차가 있는 대리석 위에 신발 몇 켤레만 제멋대로 뒤집어져 있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앉은뱅이 밥상이 펼쳐져 있었고 맥주캔과 먹다 남은 과자봉지가 어질러져 있었다.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자 영준은 지금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차렸다. 바로 5년 전에 살았던 자취방이었다. 영준은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왜 자신이 그 방에서 눈을 뜨게 된 것일까? 정말 실제상황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가 없어서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하지만 현실 일리가 없다. 만약 머리가 이상하게 되어버려 미쳤다면 모를까? 자고 일어나니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안쓸 진부한 소재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이 꿈 속이라는 것인데 영준은 살면서 이렇게도 생생한 꿈을 꿔본 적이 없었다. 영준이 앉아있는 매트리스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베개 옆에 놓여있던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온 것 같았다. 휴대전화를 집어 누가 보낸 것인지 확인한 순간, 영준은 놀라서 그만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 세 글자가 나타났다. 그녀였다.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녀를 처음 보았던 순간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 나는 것만 같았다. 영준은 마치 방금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를 만지듯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들어 메시지를 확인하였다.


‘많이 아파?’


영준은 그제야 어금니의 통증이 느껴졌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상황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 아니면 메시지를 보자 없던 통증이 생겨났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꿈에서도 현실 같은 통증이 느껴지는 게 가능한 것일까? 휴대전화의 날짜를 확인하니 5년 전이었다. 의문들만 계속해서 머릿속에 가득해지는데 다시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었다.


‘지금 가도 돼?’


그녀는 항상 영준의 곁에 있고 싶어 했다. 함께 있어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 사귀기 시작할 무렵 영준은 그녀의 이런 애정공세가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준도 그녀와 닮아가 시간이 생길 때마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기분이 어떤 것인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영준이 아직 답장을 보내지 않았는데 그녀에게서 연이어 메시지가 왔다.


‘오빠! 나 버스 탔다! 20분 뒤면 도착할 거야! 저녁은 못 먹었지? 먹고 싶은 거 있어?’


‘맞다! 씹는 게 불편하겠구나... 죽 같은 거 사갈까? 아... 오빠 죽 싫어하지...’


‘그래도 아플 땐 맛있는 거 먹어야 하니까 내가 근처에서 적당한 거 사갈겡! 기다려용~~~’


영준은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기억 속의 화장실보다 훨씬 비좁아 보였다. 어떻게 이런 화장실을 2년 넘게 사용할 수 있었을까? 확실히 사용하는 공간의 크기가 한번 커지면 다시 작은 곳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예전에 이 방을 구하러 다닐 때 보았던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원룸 화장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이 거의 똑같은 타일, 세면대, 수납장으로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공사 당시에 가장 쉽게 구할 수 있거나 가성비가 좋은 자재였을 것이다. 아니면 한 업체에서 이 동네 원룸 공사를 다 맡아서 했을 수도 있다는 게 영준의 추론이었다. 수도꼭지를 돌리자 물이 시원스레 쏟아져 나왔다. 영준은 손으로 물을 받아 입안을 헹구고 세면대에 뱉었다. 분홍빛 핏물이 세면대를 타고 배수구로 사라졌다. 침을 뱉으니 피가 섞여 나왔다. 꿈에서 피를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영준은 이게 정말 꿈이라면 내일 일어나자마자 로또라도 한 장 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다시 입을 헹구고 입을 크게 벌려 문제의 어금니를 찾았다. 금으로 된 왕관이 반짝거려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금을 씌우기 전 신경치료를 받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영준이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정황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지금 이 시점이 5년 전 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영준은 세면대 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거울과 타일은 미세하게 수평이 맞지 않았다. 영준은 이런 세세한 것 까지 꿈에서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자신의 얼굴이었다. 오늘 아침과 비교해 보면 피부에 생기가 있어 뽀송뽀송할 뿐만 아니라 손가락으로 누르면 튀어나올 것처럼 탱탱하였다. 최근에 눈에 띄던 목주름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회춘에 감탄하던 영준에게 유명 화장품 광고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매끈하고 반들반들한 피부를 뽐내는 중년의 여배우가 자신 있게 '놓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영준은 지금까지 전혀 미용에 관심은 둔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니 피부의 탄력을 되찾아 준다거나  주름을 사라지게 해주는 화장품에 여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영준이 자신의 미모에 뿌듯해하며 화장실 밖으로 나오는데 복도에서 누군가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느낌이었다. 영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영준은 신원미상의 침입자에 대응하기 위해 주위에 뭐라도 집을 게 있는지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미 침입자는 어떻게 알았는지 단번에 제대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현관문의 걸쇠가 풀렸다. 문이 열리자 침입자는 순식간에 영준을 덮쳤다.


“오빠 냄새~”


익숙한 목소리였다. 침입자는 영준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그녀는 영준의 냄새를 정말 좋아했다. 영준은 사람의 냄새가 그렇게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그녀를 덕분에 처음 알게 되었다. 나중에 영준은 그녀에게도 특유의 살 냄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마다 지문이나 홍채의 모양이 유일한 것처럼 살 냄새도 그러하였다. 그녀에게서는 향수나 샴푸를 써서 풍기는 화학성분이 만들어내는 기성품의 냄새가 아니라 시큼한 땀냄새가 희미하게 섞인 신생아 같은 향기가 났다. 두 사람은 한동안 현관에서 껴안은 채로 서로의 향기를 즐겼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가 두 손으로 영준의 가슴을 밀치며 떨어져 나왔다. 두 눈이 반짝거리는 장난기가 가득한 소녀가 오른손의 검은 봉지를 높이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빠가 좋아하는 순대 사 왔다~ 아플 땐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야 빨리 낫는다구! 불편할 수도 있지만 치료받은 반대편으로 먹으면 되지 않을까?”


영준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하지만 정말 순대를 사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한데 어찌 보면 그녀 다운 선택이었다. 방금 웃은 것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니까.


“왜 웃는 거야!”


“아니야. 갑자기 목이 간지러워서 헛기침을 한 거야.”


“아닌 거 같은데... 뭔가 날 비웃고 있는 것 같단 말이야... 내가 오빠 웃는 거랑 헛기침이랑 구분 못할 줄 알아?”


영준은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뽀얀 피부, 약간 매부리 같지만 오뚝한 콧대, 볼 때마다 만져보고 싶은 탱탱한 볼살, 쌍꺼풀은 없지만 크고 깊은 눈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오른쪽 눈 아래의 작은 점. 잊고 있던 그녀의 얼굴 구석구석이 온전히 되살아났다. 그리고 지금 영준 앞에서 씩씩대고 있는 모습은 정말 귀여웠다.


“근데 떡볶이도 사 왔어. 순대만 사려 했는데 떡볶이가 너무 맛있게 보여서...”


영준은 그녀만큼 떡볶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간식으로든 끼니로든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떡볶이를 먹었다. 그녀에게 떡볶이는 산소 같은 존재였다. 반면에 영준에게 떡볶이는 아주 가끔 같이 있는 누군가 먹고 싶다고 할 때나 먹는 정도였기에 그녀의 떡볶이 사랑이 신기하였다. 연애 초기 영준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키지 않지만 그녀를 따라 떡볶이를 먹으러 자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홍대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그녀가 근처에 유명한 떡볶이 가게가 있다며 가보자고 졸라댔다. 그날따라 영준은 별로 떡볶이가 먹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저녁식사 시간인데 분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맛집이라 매장에 앞에는 줄이 길에 늘어서 있었다. 종업원 말로는 입장하는 데만 적어도 한 시간을 기다려야 된다고 하였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영준은 점점 자신의 불편한 기색을 그대로 들어냈다. 떡볶이를 먹을 때 영준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젓가락을 들고 괜스레 죄 없는 떡볶이만 괴롭혔다. 숨 막히는 식사시간이 지나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영준에게 떡볶이를 먹는 게 그렇게 싫냐고 물었다. 영준은 그건 아니지만 저녁식사로 떡볶이를 먹는 건 싫다고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 사건 이후로 그녀는 영준에게 떡볶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마치 한 번도 둘이서 함께 떡볶이를 먹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영준이 연구실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 근처 분식집 앞을 지나쳤다. 평소 같았으면 별로 눈길도 주지 않고 갔을 텐데 그날따라 영준의 눈에 매대 앞에 서서 떡볶이를 먹는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연인은 행복한 표정으로 서로 떡볶이를 먹여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연애 초반의 영준과 그녀의 모습처럼 오버랩되었다. 어찌 보면 좋아하는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은 본능적인 감정일 것이다. 한데 영준은 그날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고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너무 몰라주었다. 뒤늦은 미안함이 찾아왔다. 다음날, 영준은 그녀에게 먼저 떡볶이를 먹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나 싶어 영준에게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영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얼굴에 놀라는 표정과 함께 혹시 영준이 평소처럼 장난치는 것이 아닌지 반신반의하는 눈빛을 띄었다. 그러다 영준이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라는 걸 깨닫자 정말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당장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영준을 이끌었다.


“시장 골목에 있는 그 분식집에서 사 온 거야?”


“응! 우리 저번에 먹었던데! 오빠가 거기 맛있어하는 거 같아서~”


“오! 역시 떡볶이 전문가야~"


"내가 고추장 맛은 좀 알지! 근데 정말 먹을 수 있겠어?"


“조금 불편하긴 한데... 여기 떡볶이는 어렸을 때 살던 동네 시장에서 먹던 그 맛이 같아서 거부할 수가 없단 말이야. 그리고 네가 알려준 데로 천천히 반대편으로 씹어 먹으면 되지!”


“으구으구 귀여웡~~~”


그녀는 자신보다 네 살이나 많은 영준에게 귀엽다는 말을 자주 하였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영준은 귀를 의심했다. 자신을 귀엽다고 한 여자는 그의 어머니를 제외하고 처음이었다. 사실 어머니도 영준에게 ‘귀. 엽. 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영준은 밥상 위의 쓰레기를 치우고 그녀가 사 온 먹을거리를 올려놓았다. 투명한 비닐봉지 꾸러미들을 풀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순대와 떡볶이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영준은 자신도 모르게 지금 그녀와 함께하는 이 순간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영준과 그녀 사이에 놓인 따뜻한 음식에서 올라오는 아지랑이는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영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떡해... 많이 아프구나?”


그녀는 어느새 영준의 옆으로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폭신한 가슴과 함께 살갗의 향기가 영준을 감싸 안았다. 영준은 이 순간이 현실이든 꿈이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를 감싸고 있는 그녀의 온기를 이외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만이 영준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녀가 바로 매트릭스 안에서 방황하는 영준의 ‘네오’인 것이다. 한참 동안 영준은 그녀의 품 안에 파묻혀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밤새 잠에 들지 못하고 신음하는 아이를 간호하는 엄마 같은 눈빛으로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영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입을 맞추었다. 방금 립밤을 바른 것 같이 그녀의 입술은 촉촉하고 체리 맛이 났다.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밤은 더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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