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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Dec 13. 2020

금이빨 삽니다

4

영준은 멀리서 울리는 자동차 클락션에 눈을 떴다. 역시 좋은 술이라 그런지 숙취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영준은 홀로 소파 위에서 담요를 덮은 채 누워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소파 옆 탁자에는 영준의 옷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영준은 얼른 탁자의 옷을 집어 입고는 휴대전화를 찾았다. 바 테이블 위에 쪽지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애기 유치원 보내야 해서 먼저 들어갈게. 요새 거래처들 주문이 좀 줄어서 오늘은 쉬자. 어제 일은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는 거야 ;)'


그렇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게 아니었다. 남녀 사이는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도 언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르는 신비한 우주의 생성원리와 같은 것이다. 사장의 눈물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망할 빌리 조엘이 기름을 들이부었다. 그러고 보니 빌리가 최근 다시 서른 살 이상 차이나는 여자와 결혼했다는 뉴스 떠올랐다. 그런 특출 난 능력 있는(!)분이 만드신 노래를 들으며 이성과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시는데 목석이라도 움직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영준은 사무실에 더 있으면 자꾸 어젯밤이 떠올라 얼른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갔다. 어제의 여운을 씻어내기 위해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였지만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영준은 옷을 갈아 입고 집 근처 유명 브랜드 카페로 향했다. 한숨 더 자고 싶었지만 한량이면서 싸구려 로맨스 영화의 찌질한 남자 조연 같은 어제의 하루를 생각하면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아침시간이라 매장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대신 출근하면서 커피를 테이크 아웃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브래드는 카페 반경 2km 내에서 스마트폰으로 먼저 주문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해서 그런지 들어오자마자 바로 음료를 들고나가는 손님들이 꽤 많았다. 영준도 한때 저들처럼 커피를 들고 정신없이 출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 이불속에 웅크리고 싶어 하는 몸을 속이려 아침마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영준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빈칸이 광활한 이력서가 나타났다. 살아온 시간에 비해 막상 적을게 별로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공감하는 듯 노트북 화면 속 커서는 계속해서 깜빡이기만 했다. 그래도 뭐라도 써야 제출을 할 수 있다. 한두 시간 정도 지나니 빈칸을 채우는 글자들이 제법 많아졌다. 검토해볼 겸 처음부터 읽기 시작하는데 영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딱 봐도 뜬구름 잡는 듯한 장황한 문장들 사이에 열정만을 강조한 과장된 각오가 지뢰처럼 곳곳에 숨어있었다. 실무경력을 없지만 열심히 해보겠다는 동어반복은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닥터 스트레인지와 도르마무의 대화를 떠올리게 하였다. 경력도 아는 것도 없는 서른 초반의 중고신인의 열정을 누가 믿어줄 수 있을 것인가? 영준은 자신이 면접관이어도 전혀 신뢰가 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잠이 덜 깬 아침부터 이력서를 수정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것 같아 노트북을 덮었다. 영준은 머리를 식힐 겸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언뜻 보면 성경 같은 비주얼을 가진 책이지만 실제로는 과학서적이었다. 책을 산지 수년이 지나서야 완독 하였는데 책장을 덮고 나서야 표지의 사진 속 도넛 모양으로 촘촘하게 퍼진 점들이 궁수자리 방향의 은하수 사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영준은 고등학교 다닐 때 지구과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이상하게 몇 년 전부터 못다 한 지구과학 공부를 자진해서 하고 있다. 사실 공부라 하기엔 이런 종류의 과학책을 읽으면 현실에서 느끼는 스트레스가 우주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별 것 아니라는 깨달음을 통해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그리고 이 책은 대중을 위한 과학서적으로 아주 오래된 우주의 이야기를 쉽게 풀어 설명해주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 같았다. 영준은 책갈피가 꽂힌 부분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기원전 1000년경 아시리아 인들은 벌레가 치통의 원인이라고 믿었다. 벌레를 쫓는 이 주문을 보면 치통을 치료하기 위해 우주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누가 하늘을 창조한 다음에,

하늘이 땅을 창고하고,

땅은 강들을 만들고,

강들은 작은 물길들을 열어 놓았다.

그물길이 여기저기에 늪지를 창조하고,

늪지들이 벌레를 만들었다.

벌레가 사마시에게 가서 울자

그의 눈물이 에아의 앞까지 흘렀다.

“제게 먹을 것으로 무엇을 주시겠으며, 마실 것으로는 또 무엇을 주시렵니까?”

“무화과 열매 말린 것을 주마. 그리고 살구도.”

“그게 제게 무슨 소용이 된단 말씀입니까? 겨우 무화과 말린 것과 살구라니요! 제를 높이 올려 주십시오. 그리하여 제가 이와 잇몸 사이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오 벌레야, 네가 정녕 그것을 원한다면, 에아의 억센 주먹이 너를 뭉개 버릴 것이다!

(치통을 막아 내는 마법의 주문)

주문의 활용 방법 : 싸구려 맥주, 그리고 기름을 함께 잘 섞은 다음, 이 주문을 세 번 외워서 약을 만들어 아픈 이에 바른다.


전에 영준은 이 부분을 피식하고 넘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 느낌이 달랐다. 정말 진지하게 한번 시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싸구려 맥주를 이용하는 부분이 끌리기도 하였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절박한 상황에 몰리면 미신에 휩쓸리기 쉬워지는 법이다. 가끔 현대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지 않던가? 영준이 휴대전화로 책의 그 페이지를 찍고 나자 문자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이영준 고객님.

언제나 행복과 사랑을 전하는 OO택배입니다.

고객님께서 기다리시던 소중한 상품을 가지고 배송 출발합니다.

상품명 : 식료품 및 잡화

배송 예정시간 : 익일 16:00~19:00 사이

보내는 분  : OOO

도착지 : OO구 OO동

운송장 번호 : 3558_0708_4102

기사님의 안전운행을 위해 자세한 정보는 OO택배 고객 앱으로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택배가 내일 오후에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영준은 어머니께 내일 택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어머니가 바로 답장을 보냈다. 상할 음식이 없기는 하지만 며칠 동안 이곳저곳 떠돌아서 내용물이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을까 걱정이 된다 하셨다. 가끔 영준은 어머니가 걱정하는 정도와 범위가 걱정이 될 정도로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토마스 모어가 말한 유토피아가 도래한데도 어머니의 걱정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영준은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머릿속에서 칼 세이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천재였기에 한국어를 구사했을 수도 있다. 입증할 근거는 없지만...) 영준은 만약 자신이 중고등학교 때 이 책을 읽었다면 물리천문학을 전공했을 거라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꾸벅꾸벅 졸면서 문제지에 침으로 웅덩이를 만들지 않고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의 별의 물결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타까운 시간들 덕분에 영준은 심야 라디오의 재미를 알게 되었고 그때 들었던 흘러간 팝송들을 지금도 그는 반복해서 듣고 있다. 물론 망할 놈의 빌리도 그때 알게 되었고. 먹고사는 것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독서를 하다 보니 어느새 헤드헌터와의 약속시간이 다가왔다. 사무실이 있다는 건물은 역 근처 대로변에 있어 찾기 쉬웠다. 안으로 들어가자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한쪽 벽면에 달린 안내판에는 층마다 입주한 회사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쓰여있었는데 대부분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곳들이었다. 이 건물에만 수십 개나 되는 회사들이 있는데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적으로 보면 얼마나 많은 회사들이 존재할까? 영준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직업이 회사원인 것이 수긍이 되었다. 헤드헌터의 사무실은 14층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눈높이까지 올라오는 파티션들이 내부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입구에 서서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영준은 개별 포장된 화과자 선물박스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출입구 자리에 직원이 앉아있었고 영준은 자신이 이곳에 온 용건을 전하였다. 직원이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하자 곧이어 창가 쪽에서 누군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은 어린 시절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 있던 두더지 잡기를 떠올리게 하였다. 동전을 집어넣고 게임이 시작되면 어느 구멍에서 두더지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얄미운 녀석.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닳고 닳은 붉은색 고무망치가 보이지는 않았다. 인상이 좋아 보이는 중년 남성(영준은 순간 문방구 아저씨가 떠올랐다)이 영준에게 다가왔다. 바로 후배가 소개해준 그 헤드헌터였다.


“이영준 씨? 어서 오세요. 자 이쪽 회의실로 가시죠.”


그가 안내한 곳은 영준이 서있는 출입구 바로 옆 간이벽으로 막아놓은 듯한 조그마한 방이었다. 내부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 4개만으로도 꽉 차 보였다. 헤드헌터는 영준에게 명함을 건네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대충 김 과장한테 얘기는 전해 들었는데 이쪽 분야는 전혀 경험이 없다고요?”


“예, 그래도 최근 건설사 경력 있는 사람들을 많이 뽑는다고 들어서 알아보고 있습니다.”


“현장 근무는 얼마나 하셨죠?”


“반년 정도 됩니다. 사실 입사 때 본사 R&D 파트로 들어가서 2년 반 정도 연구나 현장지원 업무를 하다가 발령이 나서 퇴사 전까지 현장에서 근무했습니다.”


“준공까지 마쳤나요?”


“아뇨. 제가 나올 때가 골조공사는 끝났고 내외부 마감공사 작업이 한창일 때였습니다.”


“음...”


영준은 헤드헌터의 표정만 보고도 대충 어떤 말이 나올 건지 예상할 수 있었다. 일머리는 좀 부족해도 사람의 행동이나 표정으로 생각을 읽는데 선천적으로 타고났다고 자부하는 영준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우선 영준 씨 같은 케이스가 제일 안타까워요. 뭐냐면 퇴사 후에 새로 회사를 알아보고 있는 거예요. 보통 회사에서는 경력상 공백이 있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뭐랄까... 이래저래 문제가 있는 사람같은 냄새가 난다고나 할까요?”

영준이 다시 취직을 준비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을 헤드헌터가 다시금 짚어주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문지방에 걸려 멍든 엄지발가락이 다시 문지방에 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더욱 심각한 건 이쪽 분야에 실무경력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나이도 적지 않으신데 건설사 경력도 이쪽 업계에서 원하는 업무도 아니고요.”


영준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헤드헌터 펀치 세례를 받아내는 샌드백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아직 단념하지는 마세요. 이 분야로 넘어오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는 것 같으니까 잘 준비하면 분명 기회가 있을 거예요. 우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공백기를 최소화시키는 거예요.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영준 씨라는 상품의 감가상각이 계속해서 커지니까요. 회사 규모에 상관없이 크든 작든 어느 곳이든 자리만 나면 지원하세요. 운이 좋으면 경력이 없더라도 간혹 뽑히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사실 취업시장이란 게 주차장에 자리 찾는 것과 비슷해요. 아무리 좋은 외제차도 이미 주차된 소형차의 자리를 뺐을 순 없으니까요. 순전히 운만 작용할 때도 있다는 거죠. 지금 상황에서는 제가 어떤 자리를 추천해 드리기는 어렵다는 걸 이해 부탁 바랍니다. 그래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명함의 연락처로 연락 주세요.”


헤드헌터는 사무실 밖까지 영준을 배웅해주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영준은 날카로운 잇몸의 통증을 느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붉은 피가 섞인 침이 나왔다. 찬물로 입을 헹구자 연분홍빛 물이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영준은 가방에서 가글을 꺼내 입안에 머금었다. 치료 부위가 쓰라렸지만 왠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영준은 건물 밖으로 나와 지하철 타러 갔다. 누군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치고 앞질러 갔다. 순간 영준은 길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영준을 빼놓고는 모두들 어디론가 바삐 움직였다. 저 사람들은 어디를 가고 있는 걸까?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일까? 무슨 꿈을 좇고 있을까? 꿈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어머니가 들으신다면 그런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다그침만 들을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올랐다. 사실 그런 질문들은 영준이 의도적으로 생각한다기보다 갑자기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들이었다. 우주의 탄생과 종말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 궁리해봤자 당장 통잔 잔고가 몇만 원이 늘어난다든가 카드 할부 값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런 질문들을 하다 보면 현실을 살아가면서 하게 되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영준은 경험했다.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어도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나침반인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동네로 돌아왔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샌드위치 가게로 향했다. 익숙한 버스 장류장을 지나치는데 그 옆 자그마한 구두수선소가 영준의 눈에 들어왔다. 항상 지나가는 곳인데 이렇게 주목해서 보게 된 건 처음이었다.


‘금이빨 삽니다’


수선소 벽에 붙은 문구였다. 영준은 종종 거리를 지나다 구멍가게나 열쇠 수리점, 철물점 등에서 금니를 산다는 표지나 입간판을 본 것이 떠올랐다. 영준은 만약 지금 문제의 어금니를 뽑아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못해도 그때 들인 돈에 반의 반 정도는 받지 않겠나 싶었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최저시급을 받는 처지에 부수입을 생기는 것이 어디인가? 이번 어머니 생신 때 용돈으로 드리면 딱 좋을 것 같았다. 늘 먹던 칠면조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래고 언제나 손님이 꽉 차지 않는 카페로 향했다. 아무래도 주인이 건물주인데 심심해서 취미로 하는 것 같았다. 카페 내부 곳곳에는 골동품 같은 장식들이 많았는데 왠지 유행이 지나거나 싫증이 나서 버릴 것들을 주인이 아까워 이곳에 놓아두는 것 같았다. 그런 것들 중에 카페 앞에 새워진 자전거만큼은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왠지 그것만은 장식용으로 놓아둔 것 같지는 않았다. 주인아저씨는 언제나처럼 부스스한 곱슬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을 한채 귀찮은 표정으로 주문을 받았다. 바로 이러한 매력포인트가 있기에 영준은 사람이 없는 조용한 카페를 가고 싶을 때 항상 이곳을 찾았다. 커피 한잔만 시키고도 하루 반나절을 내 집처럼 지낼 수 있었다. 영준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오랜만에 집중력을 발휘하여 이력서를 완성했다. 온라인 제출을 완료하고 나니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저녁을 드시러 가서 한잔하셨는지 마감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돌아오시지 않았다. 순대국밥을 먹으러 갈까 하다 맥주 생각이 났다. 영준은 집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가장 저렴한 맥주와 냉동 치킨을 사서 야외 테라스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군 복무 시절 전자레인지에 자주 돌려먹었던 그 제품이 요새 편의점에도 팔고 있었다. 편의점 체인이 영리하게 군필자들의 추억의 맛을 노리고 판매를 시작한 것이 분명하였다. 공복에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자 피로가 다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냉동 치킨을 집어서 입에 넣었다. 아무래도 그때 PX에서 동기들과 먹던 그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재입대해서 먹는다면 비슷할지도 모르겠지만 치킨 맛 때문에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갑자기 오전에 책에서 읽은 주문이 떠올랐다. 싸구려 맥주를 기름과 잘 섞은 다음 세 번 외우면 된다는 바로 그 주문. 혹시나 하고 아까 그 페이지를 찍어놓은 사진을 찾으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바로 그 변호사였다. 영준의 눈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 여자를 따라 움직였다. 냉장고 앞에서 서성이던 여자는 플라스틱 통에 든 소주와 영준이 산 것과 똑같은 500ml 맥주 한 캔을 사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내더니 소주와 맥주를 차례로 따르고 옆에 있는 냅킨을 몇 장 뽑았다. 그것으로 텀블러 입구를 막고 손목 스냅을 이용해 두세 번 돌린 뒤 탁자 위에 강하게 내려놓았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리고 술이 젖은 냅킨을 유리창을 향해 던졌는데 밖에서도 느껴질 정도로 찰지게 달라붙었다. 여자는 자신의 퍼포먼스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짓고 거침없이 원샷을 하였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장면이었다. 영준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칠 뻔했다. 다시 한번 더 그 시원한 음료를 제조하려던 여자가 창밖에서 자신을 우러러보는 영준을 발견했다. 뭔가 희한하다는 눈빛으로 소지품들을 챙겨 영준이 있는 테라스로 나왔다.


“뭐예요?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요?”


“편의점 들어갈 때부터요. 근데 소맥을 진짜 맛있게 마시나 봐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거든요. 저도 좀 배울 수 있을까요?”


“영업비밀이에요. 농담이고. 근데 정말 이 근처 사나 봐요?”


“그렇다니까요. 제가 못 미더우신가요?”


“아뇨. 일단은 항상 의심을 하는 게 직업병이라... 혹시 날 스토킹 하는 걸 수도 있고...”


“충분히 매력적이시긴 하지만 제가 그런데는 소질이 없어서..."


“그런데에 소질이 있으면 잡혀가요. 철컹철컹!”


“아 네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근데 그 호칭은 좀 빼줬으면 좋겠는데요?”


“변호사님 말인가요? 변호사님?”


“네! 뭔가 아직 퇴근 안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뭐 죄송할 거 까진 아니고요... 같이 한잔 할래요?”


“좋죠! 혼자서 한잔하는 게 궁상맞은 것 같았는데”


“근데 오늘은 일이 일찍 끝나셨나 봐요?”


“아! 원래 더 일찍 끝났는데 그날은 잠시 잠들어서 그 시간까지 있었던 거예요. 오늘은 쉬는 날이었고요.”


“전 이 시간에 퇴근한 것도 엄청 일찍 끝난 건데.”


“그럼 오늘은 칼퇴하신 건가요? 근데 왜 혼자 편의점에서 소맥을 드시는 거예요?”


“누굴 만나서 술 마시는 건 귀찮은데 취하고 싶어서요.”


“무슨 일 있으셨나 봐요?”


여자는 잠시 망설이는 눈빛을 하더니 이내 지금이 아직은 낯선 영준에게 말하는 것이 기회라는 듯 입을 뗐다.


“음... 변호사가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제가 유부남인 파트너 변호사랑 만나는걸 그 사람 와이프한테 들켰어요. 사실 그 인간이 파트너가 된 게 자신의 능력보다 판사 출신 장인 덕분인데 그래서 들키자마자 바로 절 차 버리더라고요. 그리고 주위에는 제가 자기를 유혹한 것처럼 소문을 퍼트리더라고요. 설마 그 정도로 비열한 놈 인 줄은 몰랐는데. 내가 눈이 멀었죠.”


그녀는 다시 소맥을 말고는 원샷을 하였다.


“그 파트너 변호사라는 분을 사랑하지는 않았나 봐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아요?”


“뭐랄까 사랑한 사람에게 실망했다고 방금 같은 표정을 짓진 않을 것 같아서요.”


“그쪽 참 재밌는 사람 같아요. 점 같은 거 볼 줄 알아요? 적어도 사주팔자라도?”


“그냥 다른 사람들 말이나 행동을 추리하는 걸 좋아해요.”


“으... 뭔가 좀 으스스한데요. 그래도 나쁜 짓 할 것 같은 사람으로는 안 보이네요. 저도 관상은 좀 볼 줄 알거든요. 여하튼 몇 달 전부터 그 이상한 클라이언트 때문에 계속 야근을 하게 됐어요. 처음 맡은 소송건이기도 해서 시행착오가 필요했죠. 그런데 막힐 때마다 그놈이 준비한 것처럼 타이밍 좋게 필요한 자료나 도움을 주더라고요. 처음에는 후배니까 그런가 보다 생각했어요. 근데 자꾸 개인적으로 단둘이 있게 되는 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평판이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피하지는 않았는데 조금씩 공적인 관계를 넘어서는 행동들을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그때 정말 외로웠어요.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도 어떤 순간에는 감정적으로 완전 무방비 상태가 되는 때가 있잖아요.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그놈한테 넘어가 버렸죠. 유부남인 걸 알고 있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주위 친구들 중에도 그런 만남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몇 명 있기도 했고... 한데 나중에 보니 결국 나를 잠자리 파트너로만 생각하고 접근했던 거예요. 파트너의 파트너라니...”


“그럼 그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변호사 놈은 아닌 거군요.”


“무슨 노래요?”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와! 당신 진짜 뭐예요? 내가 그 사람 얘기를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노래는 남자의 노래니까요. 분명 누군가 그 노래를 변호사님 아! 아니 후배님에게 불러드렸을 거라는 게 저의 추측입니다."


여자는 입을 딱 벌리고 놀라 박수를 칠뻔했다.


“그런데 그 노래를 불러준 분과는 다시 만날 수 없는 건가요?”


영준의 질문에 여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사람은 3년 전에 죽었어요. 변호사시험을 합격하고 대형 로펌에 들어가게 돼서 정말 기뻐했어요. 입사 전에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대형병원에 가서 정밀 재검사를 받아야 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술 담배도 안 하는 사람이라 큰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대장암 4기였어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거짓말하는 줄 알고 이제 그런 농담은 나한테 안 먹힌다고 했죠. 그런데 그가 오른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게 웃으면서 맞다고 말했어요. 진실을 말할 때마다 짓는 그 미소로 말이죠. 몇 분간 멍하게 있다가 갑자기 화가 나더라고요. 왜? 그가 그렇게 되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어요. 제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는데 그는 정말 담담해 보이더라고요. 마치 이건 자신의 운명이고 다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말이에요.”


영준은 여자가 그 노래를 듣고 사무실로 찾아왔을 때 얼굴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맞아요. 그 노래는 그가 저한테 자주 불러주었던 노래예요. 나이에 맞지 않게 애늙은이처럼 흘러간 노래들을 좋아했는데 로스쿨 입학식에서 저를 처음 보자마자 딱 그 노래가 떠올랐대요. 마치 그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노래라고 느껴졌다나 뭐라나. 닭살 돋는 고백이긴 했지만 하지만 진심이 느껴졌어요. 그가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정말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을 텐데 허밍으로 그 노래를 읊조리는데...”


영준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 하얀 나비가 슬픈 날개 짓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바탕 울어재끼고 나자 나비는 다시 생기를 찾은 것 같았다.


“왜 자꾸 추한 모습만 보이게 되는지... 뭔가 그쪽이랑 같이 있으면 자꾸 그 사람 생각이 나요. 만약 둘이 서로 알았다면 절친이었을 거 같네요.”


“혹시 아는 사이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말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비슷하네요. 오랜만에 다른 사람한테 속에 담아둔 얘기도 하고 실컷 울고 나니 홀가분 해진 기분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여자는 감사인사와 함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이 가벼운 뒷모습이었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제 슬슬 영준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은 맥주를 비웠다. 냉동 치킨은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버렸다. 군 복무 시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동안 모든 것을 다 안고 갈 수 없음을 버릴 수 있을 때 버려야 한다는 법을 배웠다. 영준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벗어던지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여자의 남자 친구였다는 사람을 상상해보았다. 외모는 모르겠지만 행동이나 성격이 영준과 비슷하다는 그 사람. 혹시 아는 사람이었을까? 하지만 그의 주위에 그렇게 일찍 세상과 작별한 사람은 없었다. 혹시라도 마주친 적이 있지 않았을까? 영준은 여자에게 그 노래를 불러주는 상상을 해 보았다. 그 남자에 빙의되어 후렴구를 따라 부르는데 다시금 찌릿하고 통증이 느껴졌다. 아까 편의점에서 책에 나온 주문을 외웠어야 했다. 바닥을 기어가 가방 속 약봉투를 꺼내었다. 봉투 안에는 마지막 한 봉지가 잡혔다. 영준은 순간 먹을까 말까 망설여졌다. 혹시 이번이 꿈에서 그녀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가 갑자기 사라진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영준은 망설임 없이 약봉지를 뜯어서 입안으로 쏟아 넣고 냉수를 들이켰다. 그리고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침대에 누워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 배꼽 위에 올렸다. 갑자기 머릿속에 책에서 보았던 주문이 사진처럼 떠올랐다. 영준은 마음속 속으로 주문을 읊조렸다.


아누가 하늘을 창조한 다음에,

하늘이 땅을 창고하고,

땅은 강들을 만들고,

강들은 작은 물길들을 열어 놓았다.

그물길이 여기저기에 늪지를 창조하고,

늪지들이 벌레를 만들었다.

벌레가 사마시에게 가서 울자

그의 눈물이 에아의 앞까지 흘렀다.

“제게 먹을 것으로 무엇을 주시겠으며, 마실 것으로는 또 무엇을 주시렵니까?”

“무화과 열매 말린 것을 주마. 그리고 살구도.”

“그게 제게 무슨 소용이 된단 말씀입니까? 겨우 무화과 말린 것과 살구라니요! 제를 높이 올려 주십시오. 그리하여 제가 이와 잇몸 사이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

오 벌레야, 네가 정녕 그것을 원한다면, 에아의 억센 주먹이 너를 뭉개 버릴 것이다!


마지막 문장을 다 읽고 나자 갑자기 몸이 아래로 푹 꺼져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힘이 영준을 매트리스 아래로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힘은 영준이 버텨 보려 할수록 비웃기라도 하는 듯 더 강해졌다. 그리고 곧이어 영준은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자 영준은 단번에 다시 과거로 돌아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천장에 덤덤이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준은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휴대전화의 날짜를 확인하니 그녀를 갑자기 사라지 날 이후였다. 영준은 주저하지 않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을 텐데 계속해서 무미건조한 통화연결음만 반복되었다. 영준은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왠지 모를 불안한 상상들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영준은 천정을 덤덤이를 올려다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덤덤이는 그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준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괜스레 곰팡이 얼룩에게 야속함이 느껴졌다. 한 시간 정도 집안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미안한데 우리 집 근처로 와줘.’

보통 그녀가 보내는 메시지와 달리 차가움이 묻어났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마음이 상한 게 분명하였다. 영준은 곧바로 택시를 타고 그녀의 집 근처로 향했다. 주로 밤에만 가봐서 그런지 낮의 모습은 상당히 낯설었다. 근처 시장에는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주변 상가건물 1층에는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약국, 패스트푸드, 화장품 가게, 카페가 영업 중이었다. 그 위로는 각종 전문 의원들과 초중고생을 타깃으로 하는 입시 또는 예체능 학원들이 보였다. 중간중간에는 피트니스센터들도 있었는데 각자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눈에 띄는 색과 모양의 간판들을 달고 있었다. 정신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나름의 조화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차츰 동네의 모습이 익숙해질 때쯤 그녀가 나타났다. 평소 에너지가 넘치는 것과 다르게 기운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영준을 보고도 계속해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영준의 예상보다 심각한 상황인 것 같았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며 근처 카페로 영준을 이끌었다. 그녀가 자신과 영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둘은 카페 점원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며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따뜻한 허브티를 주문하였다. 그녀는 피곤한 듯 카페의 제일 구석진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다시는 연락 안 할 줄 알았는데...”


“설마 그럴 리가?...”


“일주일 만에 연락해놓고 만나서 하는 말 치고 너무 태평한 거 아냐?”


“미안... 연구실에서 중요한 프로젝트 마감이 있어서... 정신이 없었네...”


영준은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아무리 연구실 일이라고 해도 어떻게 일주만에 연락할 수 있어? 내가 그렇게 갑자기 사라진 이유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어?"


"아니 정말 궁금했어. 하지만 며칠 지나면 네가 알아서 먼저 말해줄 거라 기다렸지."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해 고통받았던 시간을 떠올리자 영준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말을 되받아쳤다.


"오빤 항상 그런 식이야. 뭐든지 내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


"나 방금 산부인과 다녀왔어.”


영준은 강력한 카운터 펀치가 자신의 턱에 제대로 꽂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약을 먹고 난 이후로 가끔씩 배가 아팠어. 생리주기도 길어지고 갑자기 기분도 오락가락 정도가 점점 심해졌어. 그러다가 오빠 만나기 전날 도저히 참지 못하겠어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어. 그리고 다음날 오빠랑 같이 있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온 거야. 어제 받은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내가 직접 와서 들어야 할 것 같다고."


“그래서 의사가 뭐라고 그랬는데?”


“걱정 마. 오빠가 두려워하는 일이 벌어지진 않았으니까.”


“근데 왜 말 안 했어?"


“말했다면 뭐가 달라질까?”


영준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부턴가 영준도 그녀의 생리주기에 민감하게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영준은 자신이 원치 않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그녀에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곤 했다.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직접 물어보진 못하지만 그녀가 어서 확인시켜주길 원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다그치고 있던 게 분명하였다. 어쩌면 그녀는 갑작스러운 생명의 잉태보다 초조해하는 영준의 모습이 더 무서웠을 것이다.


“오빠는 나랑 결혼할 생각 없지?”


이제 영준은 온몸이 굳어져버렸다. 그녀는 어느 정도 자신의 질문에 대한 영준의 반응을 예상했지만 실제로 그런 모습을 보이는 영준을 보고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오빠는 항상 나에게 간접적으로 자신은 독신주의자라고 강조했어. 마치 내가 언젠가 불현듯 결혼하자는 말을 꺼낼까 봐 두려워서 먼저 그 싹을 잘라버리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랑 결혼 생각도 없는 사람이랑 계속해서 만나는 게 잘하는 짓일까?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는 언젠가 직장에 들어가서 돈도 모으고 사랑하는 사람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데 나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사람 옆에서 혼자서 냉탕 온탕 왔다 갔다 하는 나 자신이 한심해 보이더라. 그리고 언제부턴가 나랑 자는 거 빼고는 밖에서 데이트하자고 먼저 말하지도 않고 내가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면 귀찮아하는 티를 팍팍 내면서 마치 내가 오빠 인생의 방해물인 것 같이 연구실 일이나 친구들 만난다는 핑계로 날 혼자 둔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 이제 나도 참을 만큼 참았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지쳤어. 오빠 옆에 있으면 내 미래가 보이지 않아. 오빠가 요새 졸업이랑 취업 준비를 동시에 하니 신경 쓰일까 봐 말 안 하고 있었어. 근데 오빠를 더 이상 배려하다가는 내가 말라 버릴 것 같아.”


그녀의 말이 끝나자 테이블 위의 진동벨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빨간 LED 불빛을 번쩍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지금 이 순간이 심각한 상황임을 알려주려고 일부러 그런 것처럼. 영준은 진동벨을 집어 들고 음료를 받으러 갔다. 그녀가 영준에게 했던 말들 모두 맞는 이야기였다. 영준은 그녀가 정말 좋았지만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자신과 그녀의 운명이라고 믿었다.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그때 졸업 후 진로 문제로 부모님과 대립하고 있던 때였다. 정신이 온통 거기에 팔려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이제부터 잘하겠다는 말이 더 이상 진심으로 들리지도 그것이 영준의 진심도 아니었다. 다른 핑계를 대는 것은 오히려 그녀를 모욕하는 일이었다. 영준은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꿈이고 현실은 바꿀 수가 없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는 그녀를 이렇게 꿈에서조차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오빠는 자신이 불리하면 꼭 이렇게 말이 없어져. 어쩌면 나보다 오빠가 먼저 헤어지려는 마음을 먹었는데 그런 불편한 말을 직접 하기 싫으니까 내가 먼저 하게끔 유도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야. 근데 지금 보니까 내 생각이 맞는 거 같아.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정말 이렇게 비겁한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그래 내가 해줄게. 우리는 그만 헤어지자.”


그 뒤로 테이블에는 음료를 마시는 소리 이외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마실 음료가 사라지자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영준도 일어섰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그녀가 영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집으로 갈 거지?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둘은 애매하게 떨어져 걸어갔다. 이제 그동안 영준이 갖고 있던 모든 의문이 풀렸다. 자신 때문에 고생했을 그녀에게 너무 미안하였다. 그녀를 배려한답시고 홀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만든 과거의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배려한다고 믿었던 행동들 속에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영준의 이기심이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히죽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류장에 도착하자 영준이 타야 할 그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알림이 떴다.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


영준은 자신이 말해놓고도 놀랐다. 이별하는 연인에게 안아달라니...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영준은 눈치 없게도 진심이었다. 그녀도 처음엔 놀란 기색이었지만 영준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먼저 영준을 껴안았다. 그녀 특유의 향기가 영준의 콧속으로 밀려들어왔다. 순간 영준의 코가 시큼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영준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갑자기 영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꼈는지 그녀가 포옹을 풀고 영준을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우는 거야?”


“몰라... 으흐 그냥... 흐흐 눈물이 나와.......”


영준은 한동안 그녀 앞에서 서럽게 눈물을 한바탕 쏟아내고 난 뒤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그녀가 보였다. 영준의 퉁퉁 부어오른 눈에서 다 쏟아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정류장에 서있는 그녀의 모습이 흐릿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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