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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n Mar 14. 2022

호수효과

4

 남자의 이름은 지수였다. 곱상한 외모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식사를 마치자 지수가 낮술을 하러갈건데 같이 가겠냐 물었다. '어라 이분 보소?' 지하철을 타고 서너 정거장을 가면 꽤 유명한 맥주 양조장이 있다고 했다. 교통카드를 구입하고 지하철에 올랐다. 역에서 빠져나와 펼쳐진 동네는 시카고 다운타운과 달리 5층 이하의 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를 따라 10분쯤 걸어가자 양조장이 나왔다. 건물 외벽에는 이곳의 시그니처 로고로 보이는 하얀 거위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었다. 지수는 맥주 애호가였다. 한국에 있는 웬만한 양조장은 다 가보았다고 했다. 뭘 골라야 할지 감이 오지 안았다. 지수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묻고 메뉴판을 진지하게 보더니 하나를 추천해주었다. 신맛과 함께 향긋한 풀내음이 느껴졌다. 그 뒤로 추천해준 것들도 다 마음에 들었다. 한모금씩 홀짝 거리다 보니 어느새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지수는 이미 서너잔은 비운 것 같았다.


“근데 반지는 왜 안 끼고 있어요?”


지수의 말에 오른손을 쳐다보았다. 있어야 할 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결혼한지 오년이나 됐다는 거 다 거짓말이죠? 어린 남자애가 귀찮게 할까 봐 철벽 치는 거 잖아요.”


아무래도 아침에 샤워 할 때 잠시 벗어두고 깜빡한 것 같았다.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서 정신이 없었던 것 같았다. 양조장 밖으로 나왔을 땐 해가 건너편에 보이는 섬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양조장 이름은 거위가 많이 사는 저 섬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날아가는 새들의 모습은 아무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운타운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배가 고파졌다. 지수는 그렇지 않아도 유명한 피자가게 한 곳을 찍어두고 있었다며 바로 가보자고 했다. 주변의 손님들의 테이블을 둘러보니 보통 시카고 하면 떠올리는 떠올리는 치즈가 듬뿍 들어간 딥 디쉬 피자를 파는 곳은 아닌 것 같았다. 주문한 피자가 나오고 둘이서 허겁지겁 반쯤 먹었을 때 1층 한쪽 벽에 붙어있는 무대의 조명이 켜졌다. 사회자로 보이는 안경 낀 백인남자가 간단한 소개와 함께 누군가를 무대 위로 불렀다. 알고보니 이곳은 스탠딩 코미디쇼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수는 공연을 보면서 연신 웃어댔다. 내가 알아 듣지 못하는 미국식 유머가 익숙해 보였다. 외국에서 산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아뇨 그냥 주변 사람들 따라 웃은거에요. 같이 웃다보면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해서."


 마지막으로 공연을 마친 키가 작은 여자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통통한 얼굴에 안경을 끼고 있었 는데 밖으로 나가지 않고 주방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때 우리 테이블 담당인 서버가 주방에서 나왔다. 키작은 여자를 발견하자마자 정말 반갑게 껴안았다. 그리고 주방 안으로 다시 들어가더니 한손에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피자 박스였다. 서버가 준 피자를 받은 여자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찼다. 피자 한판에 저렇게 행복한 웃음을 짓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마 공연료를 피자로 받았나 봐요. 저도 한번 올라가서 공짜 피자 한판 받아올까요?"


 지수는 술도 깰 겸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하루종일 함께 해서 그런지 시간에 비해 오래 알던 사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낯선곳에서 잠시 스쳐가는 인연일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의 이름도 얼굴도 그저 흐릿하게 기억 나겠지. 호텔 앞에 도착했다. 작별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내 팔목을 잡았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언제 돌아가요?”


“어... 일주일 뒤에? 근데 그건 왜?”


“같이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는데 벗어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알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 때 전화가 왔다. 남편이었다. 방금 클라이언트와 점심으로 스시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고 했다. 나중에 돌아오면 같이 가보자며 들떠서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고 피곤해서 먼저 자야할 것 같다며 전화를 끊었다. 가운만 입고 서 있는 내모습이 창에 비췄다. 유리창을 통해 넘어온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지수의 손길이 닿은 팔목만은 여전히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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