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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눈을 떴을 때 머리가 멍했다. 싸구려 와인을 마셔서 그런 것 같았다. 다행히 호텔 프론트의 모닝콜 덕분에 늦잠을 자진 않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바디로션을 발랐다. 속옷만 입은 채 옷장을 열었다. 회색빛 트위드 투피스가 걸려있었다. 오늘을 위해 한국에서 새로사서 가져온 옷이었다. 호텔 식당에서 간단하게 스크램블 에그와 크로와상 그리고 커피를 마신 뒤 밖으로 나왔다. 호텔에서 성당은 걸어서 20분정도 거리였다. 하늘에서 주리의 세례식을 축하하는 것처럼 따뜻한 햇볕이 쏟아졌다. 성당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맨 앞좌석에서 우뚝 솟은 다니엘이 나를 보고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그 옆으로 주리를 안고 있던 민지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주리는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아기천사 같았다.
본 미사가 끝나고 세례미사가 시작됐다. 주리를 안은 다니엘과 민지 그리고 나는 제단 앞으로 나와 신부님 앞에 섰다. 다니엘과 민지 그다음에 대모인 내가 차례로 주리의 이마에 성호를 그었다.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주리는 간지러운 듯 꺄르르 웃었다. 곧이어 우리는 성수대 앞에 섰다. 신부님이 주리에게 성수를 붓기 시작했다. 이마위로 떨어지는 성수가 반짝였다. 그때 성수대 건너편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스테인드글라스는 바로 미술관에서 보았던 그 그림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모든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가운데 있는 여자는 성모 마리아였다.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여자. 그때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고 성모의 몸이 떠오르고 있었다. 순간머리가 핑 돌며 어지러웠다. 마리아는 나를 덮치려고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 민지가 보였다. 눈가가 퉁퉁 부어있었다. 병원 응급실인 것 같았다. 흑인여자 의사는 내가 빈혈로 기절했다고 했다. 다행히 초기 응급조치가 좋아서 큰 문제가 없으니 잠시 쉬 었다 가라고 했다. 그리고 ‘Congratulations!’이라는 말과 함께 윙크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뭘 축하한다는 거야?”
나의 질문을 들은 민지의 충혈 된 눈에서 눈물이 다시 맺혔다.
“너 임신이래!”
너무도 낯선 단어였다. 생전 처음 듣는 말 같았다. 다니엘이 나타났다. 내가 깨어있는 모습을 보고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민지는 다니엘의 품안으로 들어갔고 그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민지가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 남자는 어디 갔어?”
“누굴 말하는 거야?”
“응급조치를 해준 한국남자! 당신 친구 아니었어?”
“응? 민지 친구 아니었어? 방금 병원 밖으로 나가던데...”
나는 민지와 다니엘이 말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챘다. 지수였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팔에 꽂힌 링거 바늘을 빼고 응급실을 뛰쳐나왔다. 아무리 찾아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병원 현관에서 환자복 차림의 맨발 동양여자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처다보았다.
민지의 집에서 하루를 머무른 뒤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민지와 다니엘은 내가 걱정되었는지 얼굴만 봐서는 한국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민지부부와 나의 대자녀인 주리에게 작별인사를 남기고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때 포대기에서 주리의 손이 튀어나왔다. 왠지 모르겠지만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카고에 올 때 약속받은 일등석에 다시 앉게 되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샴페인을 주문하려는데 이제 홀몸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대신 탄산수를 시켰다. 이미 이륙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비행기는 출입문을 닿지 못했다. 엔진에 문제가 생겨 다시 점검중이라고 했다. 출발이 지연된 것을 사과하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승무원이 아까 시킨 탄산수를 가져왔다.
“고객님. 이륙이 지연된 점 죄송합니다.”
“아마 호수효과 때문이겠죠.”
“죄송한데 다시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