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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 Apr 15. 2019

열여덟. 열무김치

오~! 오~~!! 오~~~!!!

네, 저는 오늘 좀 흥분했습니다.

전업주부 9년 차, 랄라 댁 5년 차인 저를 이토록 흥분시킬 수 있는 것은 명품백도 명품 구두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올해 첫 열무입니다.


30분 거리에 있는 인근 도시에 한인마트 3개가 있습니다. 저마다 특색이 있는데, 그중에 제일 북쪽에 위치한 A 한인마트의 최대 강점은 직접 농사지으신 채소들을 판다는 것과 떡을 직접 뽑는다는 것입니다. 랄라에 온 지 두 번째 해에 우연히 A마트에서 열무를 만났습니다. 한 번도 직접 담아본 적 없어서 소심하게 아주 조금 사 가지고 와서 열무김치를 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쩜 이리도 맛있단 말입니까? 진정 제 손으로 담은 열무김치가 맞단 말입니까? 나에게 이런 놀라운 능력이 있었단 말인가요?


담은 열무김치를 금세 다 먹어치우고는, 이번에는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세인트 루이스(st.louis)에 있는 한인마트에 갔다가 또 열무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저번 열무는 작고, 미니미였는데 여기 열무는 길고, 크고, 두껍더군요. 그래도 너무 맛있게 먹었던지라, 새로이 발견한 저의 재능을 믿고, 또 열무를 샀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열무가 억세더군요. 그럴저럭 먹긴 했지만, 저번 그 맛이 아니었습니다. 역시 재료가 중요한 것이었어. 일 년을 꼬박 기다렸다가 A 한인마트에서 또 열무를 삽니다. 그렇지요, 바로 이맛입니다. 야리야리하고, 풋내도 안 나고, 적당히 부드러우면서도 아삭 거리는 식감.


오늘은 A마트에 가래떡을 사러 들렀습니다. 가래떡을 사서 계산을 하려는데, 주인아주머니께서 한 3초간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시더니 드디어 입을 여셨습니다.


"열무 나왔는데, "

"열무요? 열무 벌써 나왔어요?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어요."


오랜만에 갔는데 작년에 열무를 찾던 제 얼굴을 기억하셨던 걸까요? 이 동네에서 장사하려면 사람을 특성 따라 잘 기억해야 하지요. 암요, 그래야지요. 장사를 하다 보니 절로 그런 능력이 생기는 건지, 애초에 그런 능력이 있어서 장사 수완으로 내장되어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열무 언제 나오냐고 찾던 제 얼굴을 기억해주신 주인아주머니가 오늘은 어찌나 감사하던지요.


주인아주머니는 안에 아직 들여놓지도 않았다면서, 밭에서 뽑아 놓은 열무 한 상자를 보관 창고에서 꺼내 오십니다. 저는 너무 흥분해서요, 막 그 자리에서 발을 동동동 굴렀어요. 제가 정말 신날 때 절로 나오는 행동입니다. 기분이 좋아져서 막 아주머니한테 이말 저말 쏟아내며 커다란 비닐봉지에 열무를 담습니다. 한 단, 두 단, 세 단... 열 단을 담고는 약간 모자란가? 자꾸 욕심이 나 결국은 두 단을 더 담고 맙니다. 제가 12단의 열무를 빼내고 나니 상자의 절반이 텅 비었습니다. 오늘 정말 횡재했다는 생각을 하며 기분 좋게 가게를 나섰습니다.


다른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또 장을 보고, 랄라에 들어와서도 월마트에 들러 또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장 봐온 것들을 정리합니다. 한 번에 워낙 많은 양을 장 보기 때문에 정리하면서 냉장고와 냉동고 정리도 합니다. 그걸 다 하고 났더니 이번에는 아침에 치우지 못한 설거지거리가 싱크대 안에 한가득입니다. 열무를 빨리 절여야 한다는 마음에, 손이 급해집니다. 곧 신랑이 점심 먹으러 올 테니 점심 준비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열무를 씻어서 다듬으려면 (사실 열무김치 담기의 대부분은 이 과정이 80% 이상 차지합니다.) 싱크대를 깨끗이 정리해야 합니다. 빠르게 그릇들을 애벌 해서 식기세척기 안에 넣어 돌리고,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릇들은 부지런히 손 설거지해서 정리합니다.


 자! 이제 가장 널찍하고 깨끗한 싱크대가 준비되었으니, 열무 다듬기를 시작할 수 있겠습니다. 12단이라 양이 제법 많네요. 항상 김치통으로 한 통 밖에 안 나와서 먹고 나면 아쉬워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담을 마음을 먹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한 번에 많이 담을 요량으로 욕심을 내었습니다.



열무김치 담그기의 첫 단계는 열무 손질입니다. 뿌리의 무가 크면 2,3등분을 해서 잘라줘야 하는데요. 제가 산 열무는 여리고 작아서 무가 있는 둥 마는 둥입니다. 칼로 살살 긁어내 잔뿌리나 겉에 붙은 이물질들을 털어냅니다. 그리고는 흐르는 물에 잘 닦아냅니다. 그다음에 먹기 좋은 크기로 듬성듬성 잘라줍니다. 저처럼 닦는 거를 먼저 해도 되고요, 자르는 걸 먼저 해도 별 상관없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열무를 손질하는 여기까지가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다음은 절이기입니다. 골고루 굵은소금 뿌려 절입니다. 보통 저도 그렇게 하는데요. 이번에는 열무 양이 너무 많아서 금방 숨이 죽지 않을 것 같았어요. 큰 대야가 넘쳐서 소금 뿌리기 번거로울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진한 소금물을 대야 가득 만들어  열무를 넣고 절였습니다. 이때 자꾸 만지면 풋내가 나요. 중간에 한번 정도 뒤집어주고 가능한 많이 만지지 않도록 합니다.


열무가 숨이 죽고 알맞게 절여졌으면 물에 씻어주는데, 아기 다루듯이 살살, 조심조심 다뤄주셔야 합니다. 열무는 소중하니까요, 안 그러면 풋내가 납니다. 잘 닦은 열무를 물 빠지게 채반에 건져놓고 다음 준비를 합니다.


양파, 마늘, 쪽파, 고추, 생강 등이 필요합니다. 양파는 채 썰어 놓고, 마늘은 쪽으로, 고추는 있으면 넣고 없으면 말아도 되고요, 저는 생강 대신 생강가루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풋내를 잡기 위해 밀가루 풀을 만들어 놓습니다. 물 빠진 열무에 위의 재료들을 넣고 잘 버무려줍니다.


이제 거의 다 되었어요. 소금물만 만들면 됩니다. 짭짤하다 싶게 소금물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면 보자기에 고춧가루 넣어 소금물 안에서 살살 풀어 색을 내줘요. 마지막으로 밀가루 풀에 버무려 놓은 열무와 재료들을 소금물에 투하합니다. 자, 완성되었습니다.


만들어 놓으니, 이번에는 3통이나 나오네요. 두 통은 김치 냉장고에 넣고, 한 통은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바로 익혀 먹으려고 상온에 놓았는데,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4월 중순에 눈이라니요, 이런) 익지를 않아요. 이번에는 고춧가루도 좀 덜 풀었더니, 색이 좀 심심합니다.


그래도 3통 열무김치 만들어 놓고 나니 부자 된 것 같습니다. 익혀서 열무 국수도 말아먹고, 비빔국수에도 넣고, 더워져서 냉면 찾음 거기에도 넣어 먹고, 또 그냥 밥맛 없을 때 갓 지은 밥에 열무김치만 따악 얹어 먹어도 한 그릇 뚝딱 일 테고, 목구멍 말라 밥알이 안 넘어갈 때 열무김치 국물만 떠먹어도 꿀꺽 넘어갈 거고, 이상하게 속이 더부룩할 때도 열무김치 국물 한 그릇이면 속이 뻥 뚫릴 거예요. 다재다능하게 변신 가능한 열무김치, 여름 식탁의 필수 메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나저나, 담을 때는 신나서 룰루랄라 시작했는데, 하루 종일 김치 담고 났더니(애들 먹고 싶다고 해서 무 잔뜩 넣어 막김치도 담았거든요.) 몸살이 오는 것 같습니다. 긴 하루였습니다. 대견한 스스로에게 이른 꿀잠을 선사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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