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의 시대"에서는 인류의 모습과 개념이 더 이상 과거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는다. 타인에 의해 정의되고 규제되던 관념은 점차 희미해지고, 외적인 모습과 선택에 대한 자유가 점점 더 존중받는 사회로 진화하고 있었다.
루카스는 문신으로 가득한 팔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과거의 사람들이 날 봤다면 뭐라고 생각했을까?"
나나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충격과 경계심을 느꼈겠지. 그때는 외적인 표현 하나하나가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던 시절이니까.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경계를 허물어가고 있어. 피부에 남겨진 흔적들은 더 이상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와 개성의 표현이야."
문신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며, 각자 개개인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루카스의 몸에는 다양한 기계적인 문양과 상징들이 얽혀 있었다. 그의 문신은 스스로와, 자신이 속한 시대를 반영한 것이었다.
"제로세대의 사람들은 문신을 단순한 그림 이상으로 생각해." 루카스는 깊은 눈빛으로 나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문신은 우리의 일부가 되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보여주는 한 방식이야. 여기 있는 문양 하나하나에 내 이야기가 담겨 있어."
나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예전에는 이런 문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벽을 만들었을지 몰라도, 지금 우리는 그런 벽을 허물어가고 있어. 반인반로봇으로서 몸의 결합을 통해 스스로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시대니까."
그들은 그들의 세계가 유교 사상이나 보수적인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이제 외적인 모습은 단지 '표현'일 뿐이며, 사람들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마치 한 사람이 문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듯, 포스트휴머니즘의 세계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독창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가끔은 나도 그 옛날의 기준에 얽매여서 문신을 가리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해." 루카스가 살짝 웃으며 털어놓았다. "하지만 이걸 가리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진정한 내가 아니게 되는 거겠지."
나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제로의 시대’를 살고 있는 거잖아.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 누구의 규범도 아닌, 우리 자신만의 규범이니까."
그들의 대화는 점점 더 깊어졌다. 서로의 몸에 남겨진 흔적과 이야기는 각자의 개성으로 이어졌고, 이는 서로를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이 되었다. '제로의 시대'에서는 더 이상 고립된 정체성도, 외적인 기준에 구속받는 가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모습과 선택이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세상이었을 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나는 루카스의 문신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문신도 그렇지만, 너랑 나는 반은 인간이고, 반은 기계잖아. 지금도 많은 이들이 우리처럼 보이는 존재에게 아직 경계심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
루카스는 나나의 말을 곰곰이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건 단순히 외모 때문만은 아닐 거야. 사람들은 우리가 기술과 기계와 결합해서, 인간으로서의 순수성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나나가 팔짱을 끼고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순수성이라… 과연 순수함이란 게 뭘까? 가끔은 그게 사람들을 구속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본래의 인간’이라는 모습을 지켜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게 과연 무엇인지 정답이 있을까?"
루카스가 말을 이어받았다. "그렇지. 우리 같은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알던 '인간'의 정의가 흔들리니까 두려운 것일 수도 있어. 그들이 모르고 두려워하는 것에 거리를 두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몰라."
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복잡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나는 가끔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애쓰지만, 그들의 그릇된 고정관념에 맞서려는 내 마음이 날카로워지는 걸 느껴. 그들에게 우리가 한없이 낯선 존재로 비칠 때도 많겠지만, 우리 또한 그들 못지않게 인류의 일부로서 소중한 존재잖아."
루카스가 그 말을 듣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제로의 시대'의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면서도, 점차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증명해내야 해."
그의 말에 나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우리만의 규범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와 다르다고 느끼는 이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대화하는 과정도 필요한 것 같아."
"아마 우리의 시대는, 저마다의 신념과 정체성이 더 이상 부딪히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과정일 거야, " 루카스는 차분히 말했다. "우리처럼 반인반기계도,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품고 있다는 걸, 나중에는 그들도 인정할 거라고 믿어."
나나는 루카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가끔은 우리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진 이들이 우리가 가진 가치나 아름다움을 알아주길 기대하는 게 버거울 때도 있어. 그저 이 시대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기 위해 끝없이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면, 정말 그게 의미가 있을까?"
루카스는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여기서 멈추는 건 아니잖아.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가는 것도 우리 역할 중 하나일 테니까."
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 ‘제로의 시대’란 결국 우리처럼 각자의 선택과 표현을 존중받는 사회일 테니까. 언젠가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그들에게 닿아, 더 이상 우리가 '낯선 존재'가 아닌 ‘그들과 같은 존재’로 느껴질 수 있는 날이 올 거야."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더 이상 과거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되어가는 길을 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