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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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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대 Mar 05. 2016

엄마, 내가 하는 일은 말이야.

나는 웹기획자입니다.

"딸이 여러 번 설명해줬는데 잘 모르겠네요. 컴퓨터 하는 거예요."


웹에이전시에 다니기 시작한 때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너 출장도 다니니?

무슨 소리인가 싶어 물으려던 찰나 들리는 말. 컴퓨터 고치는 그런 거 하는 거 맞지?

무려 종이에 그려가면서 설명을 했는데도 엄만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언론홍보학과를 전공하고 2년 가까이 아동문학 출판, 교육 관련 회사에서 영업기획 업무를 하다 퇴사했다. 어렵게 입사한 첫 회사인 만큼 부푼 마음과 단결된 의지로 열심히 일했는데, 교육 프로세스 기획에 참여하고 싶던 나를 연신 영업 보직으로 뺑이를 돌렸다. '현장'을 잘 알아야 기획도 잘 한다는 이유였다.

물론 그 이유에 토 달 생각은 없다. 실제로 제주를 뺀 전국 출장에서 지점 선생님들과 고객을 만나며 얻은 경험은 지금도 실감 나게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밤늦도록 이어지는 접대를 가장한 친목 술자리와 어떻게 하면 쟤한테 일 시키고 나는 놀까 궁리하던 9년 차 사수와 숫자놀이에서 보이는 뻔한 비리들이 나를 자꾸 밀어냈다. 이것이 사회생활인가 중2병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때 새로 온 팀장이 날 물 없는 우물에서 꺼내어 막 소독한 수영장에 밀어 넣었다. 이름 번지르르한 신사업 TFT 팀이었다.


내일은 없다. 당장 그만 둘 마음으로 가방도 없이 회사를 다녔던 내가 가장 신나게 일했던 6개월 이었던 것 같다. 하는 일은 고객에게 보내는 소식지, 홍보물 제작과 홈페이지 개편 작업, 비밀이야 몇 개. 구성원은 팀장 1 차장 1 과장 1 신입 1. 회사 입장에서는 곧 나갈 것 같은 신입이 한 명 붙여줄게. 였겠지만 난 훨훨 날아다녔다.

소식지에 실을 우수사례 발굴을 위해 고객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월마다 이슈를 쫓아다니고 책을 추천하고 글을 썼다. 노후된 홈페이지는 디자인은 물론 기능부터 뜯어 버렸으면 하는 마음에 자진해서 야근을 하고 개발자와 싸우고 디자이너 언니랑 친해졌다. 점심메뉴 고르는 게 가장 큰 고민이었던 사수 과장은 편하게 회사를 다니고 날 더더 굴려서 독하게 만들어줬다. 어찌어찌 홈페이지는 오픈을 했고 소식지에 소개해달라는 업체는 늘어 신사업팀은 흩어지고 웹 홍보팀이 생길 정도로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 내가 아니라 팀이. (당시엔 내가 다 했다고 착각을 했다.)

참 즐겁게 일했다.



구구절절 7년 전 첫 회사 얘기를 꺼낸 이유는. 지금 내가 하는 일에 큰 영향을 줬기 때문이다. 기획이란 개념을 알지도 못한 신입이 어쩌다 웹기획 PL이 되어 울고 웃고 일하던 그때 하고 싶은 일을 결정했다.

웹기획자가 되고 싶다. 웹에이전시로 가야겠다. 당장 회사를 나와 당시 100명 이상의 직원이 있던 에이전시로 이직을 했다.


다시 글 처음으로 돌아가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하겠다며 기업을 뛰쳐나와 이직한 회사와 일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면 엄마가 잘 이해를 할까 고민했다.

"엄마 웹서핑 하지? 자주 가는 홈페이지도 있지? 내가 그런 거 만들 거야." 했더니, 그럼 네이버 같은 거냐고 물으셨다. "아니, 거긴 포털 회사고 여긴 에이전시야." 그럼 영업하냐는 질문에 "아니... 나는 기획자라서 설계하는 일이지. 돌아가던 사이트가 고장 나면 고치기도 하고." 컴닥터 같은 거구나?


엄마는 누가 들어도 알만한 직업을 가지길 바라셨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쉬운 풀이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는데 잘 안됐다. 다음이나 네이버에 들어갔으면 스무고개 넘는 문답이 이어지지도 않았을 터. 그렇게 미완성된 이해관계가 지속되던 중에 엄마는 누구네 노트북이 고장 났다는데 왜 그런지 한 번 가보라고 전화를 한 거였다.


힘이 빠졌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봤다.


웹기획자.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지?
하고 싶은 일을 할 기회는 없었다.


 웹에이전시로 이직을 하던 첫날 파견을 나갔다. 10분 정도 기다린 시간을 제외하곤 의자에 앉지도 않은 채 모니터와 키보드를 안고 카니발을 타고 강남역 어느 건물에 짐을 풀었다. 당시 오픈이 임박한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QA가 급했던 기억이 난다. 해외에서 공수한 것을 포함해서 10대의 모바일을 줄 세우고 새로고침을 누르며 틀린 그림 찾기를 했다. 출근해서도, 점심 먹고 나서도, 밤에도 계속했다.

Wireframe은 뭐고 버전 관리 가이드가 어떻게 되며, IA, WBS, QA, User scenario 같은 생전 처음 듣는 용어를 궁금해하기도 전에 오픈 준비부터 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운이 나쁘다고 했다.


Quality Assurance : 품질보증, 오픈 전 전체적인 항목을 체크한다.


 QA는 분명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때 난 기계공장에 온 기분이었다. 눈은 따갑고 목은 뻐근하고 몇 시간 동안 찾은 틀린 그림을 디자이너, 개발자에게 보여주면 잘 확인한 게 맞냐며 이럴 리가 없다며 호통을 치는 덕에 주눅 들어 다시 보고. 틀린 게 맞다며 문서를 만들어내느라 또 눈이 아프고. 왜 틀린 건지 물어보면 사수는 문서를 보라 하고. 문서를 보면 이해가 안 가고. 그래서 틀렸다고 하면 내가 틀렸다고 하고. 이해와 대화를 요구하는 내가 이상한 곳이었다.

몇 개월째 외부 미팅 회의록 작성, 파견지에 빠진 인원 충원, 산출물 수정 등의 일을 했을 뿐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세스를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래 원래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그렇게 일한 에이전시 초기, 내가 인지한 웹기획자는 '의심 많은 문서 제조기'였다.

엄마한테 그렇게 설명할 순 없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니 잘 포장해서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에 대한 욕심이 채워지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조직과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민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배우겠다며 들어와서는 참을성 없이 군 나도 문제였겠지만 비효율적인 업무 프로세스가 존재했던 것도 정확하다.  말하고 싶은 게 천지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 그만.

짧고 굵게 다닌 회사를 조금 시끄럽게 나오면서 높은 분에게 그간의 마음을 다 말했다. (아무것도 몰라서 가능했다.) 별 놀랄 일도 아니란 듯 덤덤하고 쿨하게 악수 한 번으로 나를 보냈다. 지금 그 회사는 인원이 1/5로 줄었다. 나 같은 사람이 많았나 보다.


그리고 나는 대기업 서비스 기획 부서로 이직을 했다.

그다음엔 광고 마케팅 회사 웹 기획 부서로.

그다음엔 글로벌 웹에이전시 기획 부서에서 일했고.

지금은 작은 에이전시 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요즘은 엄마와 나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자주 한다.

어떤 사이트를 오픈했는지. 이번 제안 PT는 어땠는지. 수주는 잘 했는지. 괴롭히는 고객은 없는지. 선금, 잔금은 제 때 받으면서 하는지.


'의심 많은 문서 제조기'의 인상으로 꾸준히 일을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면 7년 사이 이만큼 올 수나 있었을까.

누가 등 떠밀어 시키지 않고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이직도 여러 번, 무너지기도 백번, 울기도 천 번, 참으로 쉬지 않고 일어나는 시트콤같은 삶이었다.


이젠 내가 생각하는 웹기획자의 업무와 역량에 대해 몇 가지 에피소드와 함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나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싶은 마음으로 첫 글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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