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격돌과 조화가 빚어낸 진주
온 세상이 하나의 국가였다면, 이스탄불은 그 수도였을 것이다. - 나폴레옹
이스탄불을 가보고 싶게 된 건 중학교 때 만났던 불가리아 친구 아센을 통해서였다. (아센의 부인은 대한민국 주재 외교관이었는데 그 때문에 아센도 한국에 있었다, 딱히 일을 하지 않는 터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당시에 영어도 서투른 중학생이었고 여행은 가본 적도 없었다. 반면에 아센은 해외 경험이 많았다. 나이도 많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던 터라 궁금한 마음에 "이제까지 가본 곳 중에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야?"하고 물어봤다. 아센은 이스탄불이라고 했다.
이스탄불은 소피아에서도 가까워서 여러 번 가봤고 그래도 질리지 않은 만큼 아름다운 도시라고 그랬다. 세계 여러 곳을 다녀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정말 어떤 곳인지 궁금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그날 저녁 집에 가서 아센이 이스탄불이 그렇게 멋있다고 했다고 얘기를 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계셨다.) 그때부터 이스탄불은 내 마음속에서 가봐야 할 장소로 남아있었다.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계절이 12번 바뀌는 동안 이스탄불을 세 번 다녀올 수 있었다.
이스탄불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다.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는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낭만적이고 장엄하다. 보스포로스 해협을 끼고 있어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교두보이자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운하, 그리고 동서양이 충돌하고 융합되었던 역사의 산 증인과 같은 도시다.
아야 소피아는 과거 비잔티움 제국 시절에 성당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었던 소피아 옆에는 지금은 초승달과 함께 미나렛이 서있다. 1500년 동안 도시가 동로마제국의 수도, 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거쳐 지금의 이스탄불이 될 때까지 굳건하게 서있는 아야 소피아는 경이롭다.
보스포로스 해협을 따라 산책을 했다, (처음에는 길이 길 줄 모르고 나섰는데 알고 보니 한 바퀴 돌기가 정말 멀었다.) 그렇게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니 오래된 성벽의 흔적들이 보였는데 바로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지키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었다. 한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불렸다. 두꺼운 성벽에 몇 겹으로 둘러싸인 이 철옹성 같은 도시는 절대로 함락되지 않는다고 했다.
근 오백 년이 지난 오늘날 한때 제국의 수도를 방어하던 이 성벽은 폐허로 남아있다. 비잔티움 제국의 빈자리를 채웠던 오스만 제국은 실로 대단했다, 하지만 지중해를 재패했던 이 대제국도 몰락했고 그의 빈자리도 지금은 우리가 아는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모로코, 시리아와 같은 개별 국가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국운은 언젠가는 다한다.
이스탄불의 거리를 보면 정신이 없다. 모스크바의 거리들처럼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잘 배열된 도시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미로와 비슷하다. 고대부터 사람들의 왕래로 형성된 길을 따라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형성된 자연스러운 거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거리들은 고유한 매력이 넘친다.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는 활기가 넘친다. 우리나라의 남대문 시장과 비슷하다. 물론 그랜드 바자르에서는 기이한 물건을 다루기도 하지만 관광객을 상대하는 특정 구역을 벗어나면 현지인이 이용하는 가게가 더 많다. 우리나라가 그렇듯 이곳에서도 그들만의 활기가 넘친다. 정신없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흥정에 만족하지 못해 발걸음을 돌리는 손님을 잡으려 목소리를 높이는 상인들.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너는 건 장엄하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를 건넌다는 것, 그리고 이 작은 해협을 통해 수많은 문명들이 만나고 그리고 충돌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해가 지는 시간에 해협을 건너는 페리를 타면 건너편 블루모스크와 아야 소피아 사이에서 지는 해를 볼 수 있다. 얕게 낀 연무와 미나렛 사이에서 붉게 지는 태양과 마주하는 건 가슴 벅찬 경험이다, 해협을 지날 때는 흑해로, 그리고 반대방향인 지중해로 항해하는 선박들이 보인다.
보스포로스의 갈매기들은 지나는 페리를 쫓아서 날아간다. 관광객들이 던지는 빵을 먹기 위함인데 갈매기가 그렇게 가까이 나는 모습을 이전까지 본 적이 없다. (여기는 갈매기들도 관광업으로 먹고산다.) 갈매기의 날개는 정말 아름답다. 거리의 새로 내몰린 비둘기 (약간 근본 없는)와도 다르게 바닷바람을 정말 잘 타고 날아간다. 늠름하다.
이스탄불의 공원들은 아름답다. 4월의 이스탄불은 튤립이 만개하는 철이다. 만개한 튤립들 사이로 해가 비추고 이미 푸른빛이 돌기 시작하는 나무들 사이를 따라 걷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햇살 비추는 언덕에 앉아 음료를 한잔 마시며 멀리서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아잔(이슬람에서 기도를 행하기 전에 내는 외침) 소리를 듣는 것은 내가 먼 이국의 땅이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하지만 어색하지 않다. 울려 퍼지는 아잔은 풍경에 스며들어 그 나름의 음악이 된다. 나무 사이로 보스포루스가 보인다.
사진을 찍는 나는 유럽에 서있고 건너편 보이는 육지는 아시아다.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 이스탄불은 항상 모두가 원하는 요충지였다. 그 때문에 전쟁도 많이 했지만 그 덕에 한때는 육로로 아시아에서 들어오는 대부분의 문물이 이스탄불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탄불은 인류가 걸어온 역사를 몸에 새긴, 그런 도시가 됐다.
다시금 나른한 9월 해지는 저녁 빛이 은은한 날 이스탄불 탁심광장부터 술탄 아흐메트까지 여유롭게 걸어서 산책할 날을 맘에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