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설의 전설이 흐르는 유목민의 땅
중국과 카자흐스탄, 그리고 타지키스탄의 사이에 위치한 키르기스스탄은 우리나라보다 약 두배 정도 크다, 하지만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로 우리나라와 비슷하기도 하다. 키르기스스탄의 인구는 600만 명 정도로 우리나라에 비해 10배 정도 적다.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키르기스스탄의 수려한 산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로 국토의 92%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균 해발고도가 2700M이니 산 위에 세워진 나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다만 풍화 과정이 진행되어 산세가 험하지 않은 한반도의 산지와 달리 키르기스스탄의 산지는 매우 험준하여 등정하기가 어렵고 위험하다, 또한 정상 부근의 해발고도가 높아서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이 쌓여있다.
모스크바에서 같이 공부하던 키르기스스탄 친구의 초대로 키르기스스탄을 찾았다. 모스크바에서 키르기스스탄의 수도인 비슈케크까지의 비행시간은 4시간, 짧은 거리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키르기스스탄까지 운항하는 직항 노선이 없다, 따라서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한다면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가서 다시 키르기스스탄으로 향하는 것이 좋다.
키르기스스탄의 민족적 자부심 마나스
키르기스스탄에 처음 도착하면 만나는 것은 비슈케크 공항의 이름은 마나스 국제공항이다, 처음에는 어리둥절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키르기스스탄의 건국신화의 주인공의 이름인 마나스를 공항 이름으로 정했다고 한다. 마나스는 키르기스 민족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구하고 민족국가를 세우게 된다는 내용이다, 마나스 대서사시의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마나스가 책으로 쓰인 자료가 아니라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 문학의 서사시라는 점인데 전통이 단절되지 않고 살아남아 현재 지금은 키르기스스탄 국민들의 자부심이자 구심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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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비슈케크에서 가장 큰 바자르인 도르도이 바자르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정말 별걸 다 구할 수 있는데 과일부터 옷가지, 신발까지 없는 게 없다. 느낌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재래시장과 비슷한데 규모가 훨씬 크다.
키르기스스탄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무슬림 인구가 많다, 대부분의 키르기스인은 무슬림이지만 소련의 오랜 영향으로 많이 세속화되어 히잡을 쓰지 않고 사우디아라비아처럼 보수적이지도 않다. 사진의 우측 상단에 보이는 머릿수건은 친구에게 물어보니 히잡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간단하게 걸치는 게 요즘은 유행이 되고 있다고
호준, 이거 마셔도 되는 물이야
세차게 흐르는 계곡 앞에서 친구가 말했다,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이라 맑고 깨끗하다고, 호언장담하는 친구를 믿고 손에 가득 담아 빙하수를 마셨다.
"저기 혹시 말을 타볼 수 있어요?"친구가 길을 지나던 아저씨에게 묻는다, 저 멀리 보이는 말들의 주인인가 보다. 나중에 물어보니 한동안 방목할 말이라고 한다, 인상 깊은 점은 뒤는 산으로, 앞은 계곡으로 막혀 별도로 사람이 돌보지 않아도 말들이 도망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힘든 것은, 매일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구한말 어려웠던 시기 연해주로 이주한 많은 한인들은 일본과 소련이 전쟁상태에 빠지자 소련 정부의 우려로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추방당한다, 때문에 현재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그리고 키르기스스탄 등의 국가에 많은 수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이 같은 역사의 어두운 면은 키르기스 사람들에게도 있었는데 바로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이 키르기스 인들을 강제 징집하고 노역에 동원하자 키르기스스탄에서 대폭동이 일어났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해 많은 이들이 사망한 것이다. 위 묘지에는 앞서 언급한 저항운동을 포함하여 스탈린 시기 반대운동을 벌이다 사망한 사람들의 위령탑까지 같이 있다.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사랑받는 음식인 '라그만'은 국수에 소고기와 얼큰한 국물을 추가한 위구르 음식이다. 현재 위구르스탄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중국의 영토이지만 많은 위구르족 사람들이 키르기스스탄에서도 살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현재 독립한 주권국가이지만 이전에는 소련에 속한 공화국중 하나였다. 오랜 시간 소련의 영향을 받으며 수도인 비슈케크(당시 이름 프룬제) 또한 대부분의 소련 도시와 비슷하게 지어졌고 모든 면에서 소련의 시스템과 닮아있다.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민족주의의 물결이 이는 요즘은 과거 소련의 흔적들을 지우고 있어 조금씩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지만 CIS(독립국가연합) 국가의 거리 이름은 '레닌대로', '붉은 거리', '가가린 거리'와 같이 사회주의적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얘는 러시아인, 얘는 아제르바이잔인, 이 친구는 내가 잠시 좋아했었는데 타타르인이야
학교에 가보면 비슷하게 생긴 친구들과 공부하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르게 친구가 보여준 단체사진에는 보기에도 생김새가 달라 보이는 친구들이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자세히 물어보니 구성은 키르기스인, 러시아인, 우즈베크인, 아제르바이잔인, 카자흐인 그리고 타타르인 정도로 다양했다.
공식 통계자료를 보면 키르기스스탄의 인구구성은 키르기스인이 65%, 우즈베크인은 14%, 러시아인도 12% 정도로 다양한 인종 구성을 가지고 있다, 소련 시기를 거치며 많은 인구가 섞이며 지금도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모여서 살고 있다.
최근 카자흐스탄에서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어서 많은 수의 카자흐스탄에 살고있는 인종적 러시아인이 러시아로 돌아가서 국적을 취득하고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키르기스스탄은 아직 괜찮다고 한다.
이식쿨 호수로 가는 길
키르기스스탄에는 전설적인 호수인 이식쿨이 있다, 면적은 6300 제곱 킬로미터나 되고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700 정도로 큐모가 큰데 날씨가 좋은 날에는 근처의 산맥들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이식쿨 호수를 방문하던 그날 날씨가 좋지 않았다, 시정이 생각보다 안 좋았지만 마지막 기회이기에 무리해서 여정을 떠났다, 수도 비슈케크에서 이식쿨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3시간 정도다.
우리는 3시간을 달려 이식쿨 호수 근처의 도시 '발릭치'에 도착했지만 이식쿨은 안갯속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연현상이니 어찌하리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잠시 쉬었다가 비슈케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뚫고 비슈케크로 갔다, 4월이니 해는 7시쯤 저물었다, 가로등이 거의 없는 도로 사정상 헤드라이트에만 의존해서 산간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 낮에는 장엄해 보였던 능선들이 지금은 섬뜩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드는 무서운 길을 지나 잠시 차를 세웠다. 하늘을 보니 수많은 별들이 반짝인다, 공해가 없는 땅에서 별을 볼 기회가 언제 올지 몰라 계속 지켜봤다.
차를 타고 가는데 도로를 수십마리의 양때가 덮어버린다. 중앙아시아나 코카서스에서는 도심을 벗어나면 자주 있는 일이다. 마치 횡단보도 신호에 걸려 멈춘 차 처럼 가축이 도로를 가로질러 가는 것을 구경하면 시간이 빨리간다.
그렇게 키르기스스탄에서의 일주일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