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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알 Jun 20. 2024

어떤 사람이 작가라고 생각하세요?

공공기관에서 글쓰기 강의를 할 때, 첫 시간에 자기소개와 수업에서 얻고 싶은 것을 간략하게 말하는 시간을 꼭 보낸다. 봄에 한 수업에서 한 분이 자기소개를 끝마치지 못하고 울먹였다. 자기소개 시간에 울먹이는 사람을 종종 본다.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한 사람의 인생을 판단할 수 있는 잣대는 없다. 하찮은 인생도 없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모양으로 치열하게 산다. 저마다 자기 상황에 맞추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바르게 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치열함을 아무도 안 알아준다. 직장에서 치이고, 가정에서 의무와 책임에 지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내느라 죽을힘을 다 해 버텼지만, 아무도 애썼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분명히 죽을힘을 다했는데.


치열한 시간은 가슴에 선명한 흔적으로 남았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자기에게만 보인다. 주변과 비교하면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에서 그럴듯한 결과를 남긴 것도 아니다. 정신 차려 보면 머리는 희끗하고 주름은 늘어나고,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육체만 남았다.


이럴 때 허무가 와락 포옹한다. 그러면 너널너널한 '나의 시간'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슬며시 찾아온다. 그러면 글이나 써 볼까, 그림을 그려볼까, 두리번거린다. 이는 긍정적 신호이다. 비로소 자신을 찾는 문 앞에 서게 되었다는 말이니까. 이제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시선으로 내 인생을 쓰다듬겠단는 결심이다.


글쓰기는 무기력에 활기를 불어넣는 좋은 수단이다. 내가 겪은 것을 말이 되든 되든 활자로 쏟아놓는 것만으로 신이 나고 쾌감이 있다. 나는 이것만으로도 글쓰기의 역할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글을 쓰고 싶다면, 나아가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고 싶다면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타인 특히 '잘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 역할을 주로 한다. 그래서 내 경험을 말하는데 쭈뼛거리고 꺼린다. 이야기를 해서 조롱을 받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숨어있다. 글쓰기는 이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글쓰기는 전복적 수단이 된다.


글쓰기는 상담실 같은 구석이 있다. 글쓰는 사람은 상담자이자 내담자 역할을 동시에 한다.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공감 받지 못하는 고민이 있으면 일부러 상담실을 찾는 이유가 뭘까? 상담실에서는 내담자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상담사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고, 내담자는 말하는 사람이 된다.


에세이는 경험을 기반으로 하는 '나의 이야기' 쓰기이다. 우리는 모두 경험체로 나의 이야기, 정확히는 내가 겪은 실패, 성취, 땀을 쓰는데 자신이 있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쏟아내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읽지 않는다.

경험을 기반으로 한 에세이가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유이다.


자기 경험을 쓸 때 글을 쓰는 사람은 상담사이자 내담자가 되어야 한다. 일단 자기 이야기를 신나게 한다. 그러고나면 상담사가 활약해야 한다. 상담사는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안내해야 한다. 글쓰기에서 상담사가 어떻게 될까? 바로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어야 한다. 쓰기는 읽기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마치 뱃속에 있는 아기와 엄마의 탯줄에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작가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수업 중에 이 질문을 꼭 한다. 그러면 주로 원고료를 받고 글 쓰는 사람, 직업으로 글 쓰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작가란 자기가 쓴 글을 자기가 다듬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다.


저자가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면 편집자의 피드백을 받는다. 그럴 때 전체적 방향에 대한 피드백을 받지, 에디터가 문장이나 전체 구성을 구체적으로 고치거나 하지 않는다. 이걸 저자가 해 낼 수 없으면 기획출판을 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생각은 좁고 어딘가로 쏠려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출간작가라도 말이다. 특히 원고를 쓸 때는 달리는 말처럼 옆을 못 보고 앞만 보기 때문에 방향이 쏠리기 쉽다. 그럴 때 객관적 시선을 가진 편집자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된다.  


가령 이번에 출간한 <혼자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의 마지막 챕터는 '나이 듦을 이해하고 준비하기'이다. 이 꼭지는 초고에 없었다. 초고를 보냈더니 나이 듦과 죽음의 결정권을 독립된 챕터로 분리하면 좋을 거 같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내가 생각해도 좋을 것 같고, 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드백대로 주제를 설정하고, 그에 맞는 영화와 글감을 찾았다. 그래서 총 6 꼭지로 독립된 한 챕터가 완성되었다. (목차가 궁금하시면 링크를 클릭)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3587259


는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다. 아마 대부분의 책을 쓰는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책을 쓰고 글쓰기를 강의한다. 그 비밀은 책을, 텍스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 강의는 내가 잘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텍스트를 잘 읽어내는 문해력이 활약하는 영역이다.


세 권의 책을 출간했지만, 여전히 작가로서 정체성을 설명하고 증명해야 한다. 책 제목이라도 물어봐 주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보게 된다. 대부분은 책을 낸 것에 관심이 없고, 무슨 책인지는 더욱 관심이 없다. 책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책을 출간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첫 책을 출간한 후에는 나를 설명하는 일도 좋았다. '제가 책을 낸 사람이거든요.'


지금은 출간을 알리는 것도 선별하게 된다. 출산율만큼 독서 인구 절벽인 시대에 책 출간 소식은 그저 '자랑질' 혹은 '무용한 일'에 시간 보내는 사람쯤으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글쓰기 강의를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자기 이름으로 책을 쓰고 싶은데도 다른 사람이 쓴 책에 관심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쓰고 싶어서 수업에 참가하는데도 책을 읽는 사람은 소수이다. 그러면 신변잡기 이야기만 쓸 수 있고 강의실 밖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글을 쓸 수 없다. 신변잡기 글을 공적인 편의 글로 바꿀 힘이 생기지 않아서 수업이 끝난 후에는 글을 안 쓰게 된다.


읽는 사람 중에 글을 안 쓰는 사람은 있어도 글을 쓰는 사람 중에 안 읽는 사람은 없다. 안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나도 (아마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책 쓴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지도 모른다. 이렇게 가상의 상담실에서 상담사와 내담자가 되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상반기 내내 꼼짝없이 갇혀 작업했지만, 이 수고로움이 허튼짓이란 생각에 괴롭다. 나는 책을 쓸까. 있는 일이 읽고 쓰는 일이라서 쓰고 있는 같다.


덧. 이 책 역시 브런치북과 '영화로 인생 읽기'란 매거진이 씨앗글이 되었다. 물론 '씨앗'으로만 활용했고, 거의 다른 글로 바꾸었다. 이렇게 계속 읽고 쓰는 터라 자꾸 책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아래는 씨앗글이 된 브런치북과 매거진입니다. 

또 하나는 출간을 알리는 글이기도 합니다. 쓰고 싶은 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7804587

https://brunch.co.kr/magazine/readinghearts


https://brunch.co.kr/brunchbook/lifeinmov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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