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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근희 Jan 28. 2023

제주탐사대에겐 아지트가 필요하다.

여행자도서관 너로 정했다.

한 해 동안 12번의 제주 여행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자는 우리의 이야기는 점점 만남을 지속할수록 뼈대에 살이 붙기 시작했다. 한라산에 피어난 눈꽃을 보고 오자라는 첫 번째 목표를 수립한 후에 그에 맞는 계획들을 만들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첫 번째는 한라산 정상 등반에 대한 예약을 하는 것으로, 어린 시절의 기억과 달리 요즘은 산의 정상을 올라가는 데에도 매일 정해진 인원만이 가능하고, 예약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정해진 높이 이상을 올라갈 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는 한 산악인의 이야기는 국내에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라도 되듯이, 어느덧 유명한 국내의 산들은 저마다의 기준을 세우고 입산인을 가려 받고 있었다.  자연을 누리는 것에도 자격과 순서가 필요하다는 것은, 물론 자연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헛헛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한라산 등반 예약을 끝내는 큰 미션을 완료했다는 성취감에 취해 그날은 이자카야에 둘러앉아 기린이치방 맥주와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꼬치들에 매혹되어 버렸고, 나머지 일들은 내일의 나에게 맡겨버리자는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야 말았다.


'역시 전문가가 구우니까 마시멜로우도 결이 다르고나!'


내일의 내가 할 일을 오늘의 내가 해치우는 것도 괜히 미안하니깐.


등반 예약도 성공하였고, 비행기를 예약하고 숙소를 잡고 렌터카를 알아보기만 하면 우리의 첫 번째 계획은 성공적으로 탄탄대로를 달릴 것 같았지만, '세상일은 내 마음같이 되지 않는다'라는 어머니의 말씀 따라 하나 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는데 우리는 결국 너무 돌아가고 말았다.


'오늘(12일) 낮 제주도 서귀포 지역에서 찍은 모습들입니다. 아직 1월 중순 한겨울인데 유채꽃을 비롯해 매화, 동백 같은 봄꽃들이 가득합니다. 때아닌 봄날씨가 이어져 오늘 제주의 낮기온이 16.5도를 기록할 정도가 되자 꽃들도 만발한 겁니다.'


매섭게 다가왔던 겨울이 어느덧 봄이 되어 녹고 말았다. 1월 12일의 뉴스에서는 제주에도 봄이 찾아왔다는 소식들로 요란하였고, 그 봄의 기운은 내가 사는 지역까지도 전해졌다. 요 며칠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며 돌아오는 길에 차갑게 데워진 밤공기를 마시며 '은'과 거리를 걷던 기억이 생생한데, 밤공기가 차갑지 않고 목에 두르던 목도리가 방바닥에 떨어져 발에 치이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라산 눈꽃은 사라졌겠네요. 유채가 피었답니다.'

'다른 계획을 세워봐야겠네요!'




성공적일 거 같았던, 완벽한 듯 보였던 우리의 첫 번째 계획은 날씨요정이 영 힘을 쓰지 못하여서 무산되어 버렸고 약속했던 1월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발을 동동 굴렀어야 했었지만, 지나치게 태연하였다. 그건 아마도(P이기 때문이겠지) 12번의 제주행이 남아있기 때문이었을까. 여느 날처럼 각자 시간이 괜찮았기에 여행계획을 세워보자는 취지아래 우린 만났고,  1월이 10일도 안 남은 상황에서 이대로는 우리의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길 것만 같았기에 다른 코스를 찾아봐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 이전에 '은'이 알려줬던 '여행자 도서관'이란 곳에 가보자고 제안이 나왔고 나도 마침 그곳이 궁금했기에 발걸음을 옮겼다.



6시까지만 문을 여는 이 도서관은 이름부터가 일반 서점은 아닌 거 같아서 궁금증에 가보고 싶었고 마침 이야기도 나왔겠다 한번 가보자는 느낌으로 P답게 이동하였다. 전주의 웨리단길을 넘어 한옥마을에서 살짝 떨어진 곳인 다가동에 위치한 이곳은 '여행을 계획하고 꿈꾸는 공간'이라는 문구아래 운영되고 있는 장소로 입구를 들어서기 전까지는 어떠한 공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이곳이 우리의 아지트가 될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여행을 계획하고 꿈꾸는 공간'이라는 문구에 맞춰서 국내외를 통틀어 여행에 관련해 다양한 방식으로 쓰인 책들이 시야가 닿는 모든 곳마다 놓여있고, 재즈풍의 노래가 LP판을 통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이 공간은 정말 여행자를 위해 만들어진 장소인 것처럼 방문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취향을 저격당하고 말았기에 나는 꼼짝없이 우리의 아지트로 정하자고 선언해 버렸다. LP와 재즈, 여행자의 조합이란, 베짱이 같은 삶을 한때 꿈꾸던 나에게는 참기 힘든 유혹인 것이므로.


여행자 도서관의 2층 뷰.


여행자 도서관에서 우리는, 제주에 관련된 다양한 책들을 책상에 가득 쌓아두고 각자 시간을 들여서 이것저것 마음에 드는 것들을 적었다가 지웠다가, 서로 보여주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둘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결국 이번 여행은 눈꽃대신 제주 동부의 자연들을 거닐면서 오름투어를 해보는 것으로 정했다.

또한, 그 와중에 한 명의 여행자를 추가로 영입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 매번 제주에 올 때마다 상징적으로 들리는 우리만의 장소를 하나 만들어보기로 이야기를 하였고 그렇게 우리의 제주기행의 첫 번째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8일부터 시작되어, 29, 30일 3일 동안의 여행동안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그리게 될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은 사람이 콘텐츠인 것이고 우리가 즐거워하고 스스로에게 솔직한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그 하얀 도화지는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이 글을 적고 있는 새벽 4시. 이 시간으로부터 13시간 뒤,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떠난다.




그리고, 떠나려는 이 순간 우리의 계획을 비웃듯이 전국에 한파와 눈이 가득하였다.  (젠장)

저번 여행처럼 또 2박 3일의 여행이 비행기가 뜨지 못해, 연장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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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사족을 달자면 다른 지역에도 정말 좋은 장소들이 많이 있겠지만, 전주라는 도시는 참 재미있는 게 이 도시는 로컬 시민들에게조차도 마케팅을 안 하는(이라고 쓰고 못하는) 행정적으로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기에(마치 LG마케팅 부를 보는 것 같은 이 기시감) 이런 장소는 누군가가 넌지시 알려주어야만 알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보통은 탐험을 하다 이끌려 들어간 곳이 마음에 들어서 누군가에게 전하고 그렇게 알음알음 서로 간에 정보를 전하는 아날로그 한 도시인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한옥마을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한옥마을보다 더 전주다운 좋은 장소들('슬로우 시티'를 표방하는 만큼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지나는)이 참 많다. 이런 장소들도 차차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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