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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근희 Feb 24. 2023

제주탐사, 동파에 터진 건 수도만이 아니었네

모든 것이 얼어붙은 제주에서 외치는, 자연아 내가 여기 있었다!

나를 감화 감동시켰던 은희네해장국을 뒤로하고, 우리는 단백질과 탄수화물로 가득 찬 배를 매만지며 '카페인을 대령하거라'라는 뇌의 명령을 받았고(생존을 위해 커피를 마시는 3명의 탐사대원) 재작년, 찌는듯한 8월에 제주에 방문했다가 들렸던 커피집이 1년 내내 생각이 났었기 때문에, 탐사대원들에게도 소개를 시켜주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기억을 되돌려보자면, 8월의 제주는 내 예상과도 너무 달랐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전신의 기운을 빼놓는 습한 더위는 가까이 오는 모든 것들에게 적대감을 갖게 만들 정도였고, 바람마저도 뜨거운 기운을 머금어서 불쾌지수가 천장을 찍었던, 제주에 대한 로망을 산산이 깨부수기에 충분하였고 왜 제주시민들이 서귀포는 습귀포라 부르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온몸의 물기를 탈탈 털어버리는 고장 난 인간탈수기가 된 느낌이었달까.  그 가운데 우연히 더위를 피해 살고자 들린(곧 죽어도 반드시 특별한 커피를 먹어야 한다는 호기심을 못 이겨 까다롭게 찾아낸, 주변인들에게 지독한 녀석이라는 배지를 받게 되었지) 카페에서 마신 커피는 잠시나마 그 힘듦을 잊게 만들어주었고, 전주로 돌아오고 나서도 간혹 시간을 넘어서 내 추억을 되살리던 커피가 되었다.


서귀포에서 건물을 지을 때에 나무문을 달아놓으면 건물이 완성될 때쯤에는 그 나무문이 썩어서 떨어진다던 표현이 인상 깊었는데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의 힘들었던 여행이었고, 그래서 더운 여름날이 되면 그때 먹었던 커피가 더욱 생각이 났을지도. 본격, 파플로프의 강아.. 아니 사람이 되어버렸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이름부터가 커피의 정체를 예상할 수 있는 '솔트스톤'이란 카페이다. 제주도의 현무암을 연상시키는 검은 먹색을 연상시키는 커피가 인상적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원래 커피는 검은색... 브랜딩과 텍스트에 홀린 거였을까, 원래 급박한 상황에서는 판단력이 흐려지는군'이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짭조름한 맛이 인상 깊은 커피를 파는 곳이다. 커피에는 일반적으로 5가지의 맛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단맛, 짠맛, 쓴맛, 신맛, 감칠맛이 그 5가지의 맛이고 그중에 짠맛이 주가 되는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는 나름 센세이션 한 커피였다.




땀을 육수처럼 줄줄 흘렸던 그 더운 날의 여행에서 짭조름한 커피는 마치 생명수와 같았고 그 좋은 기억을 같은 탐사대원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강력추천을 해서 데려갔었는데, 이 선택이 이번 제주탐사에 큰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다시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줬던 이 이야기는 좀 뒤에 다시 하기로 하고, 일단 각자가 커피를 골랐는데 나는 '한번 마시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맛, 마약커피'라는 텍스트에 홀려서 솔트해피투게더라는 커피를 주문했다.  




항상 새롭거나 신기하거나 독특한 대상에 있어서는 도전해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편의점에 새로운 맥주가 나오면 꼭 그 제품을 사 먹어본다든지 (잊지 않겠다 디아블로 맥주, 홍차맛 맥주..), 길을 걷다가 간판이 허름한데 역사가 있어 보이는 음식점에는 들어가서 먹어본다든지 (내상을 입거나 평생 단골이 될 수 있는 50% 확률의 슈뢰딩거의 음식점) 하는 등의 탐구심이 많은 성격이다. 그렇기에 '한번 마시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맛, 마약커피'라는 소개문구는 1초의 고민도 없이 내 흥미를 자극했고,  '수'는 대표간판메뉴인 블랙 스톤, '은'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좋은 것은 나눠 먹으라는 선조들의 교훈을 따라 우리는 여행을 지속하면서 커피 한 모금도 나눠마시는 애틋한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각자 티 타임을 갖으며 짧은 품평회를 하고나서 우리는 1100 고지를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 1차 여행의 목적이 제주 한라산을 등반해서 눈꽃을 잔뜩 구경하고 오는 것이었는데, 요 며칠 날씨가 따뜻해져서 제주에는 유채가 피었다는 소식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한라산 등반예약을 취소하고 제주의 동쪽을 탐험하기로 계획을 새로 세웠었는데, 제주로 떠나는 전날과 당일에 제주에는 눈이 엄청 내려버린 이 믿지 못할 현실은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인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대 (쳐) 맞기 전까지는'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흠씬 얻어맞았지) 그렇기에 일단 가서 가볼 만한 곳을 찾아보자 라는 지극히 p다운 계획을 세우고 왔던지라 1100 고지를 가보기로 했다.  물론 이날은 다행히도(?) 한라산 입산금지가 떨어졌다.


눈으로 가득찬 세상. 가지마다 앙상해진 부분을 하얗게 채운다.


1100 고지로 올라가는 길은 너무나 아름다운 관경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눈을, 많은 나무를 본 적이 없었다랄까. 도로를 제외하면 사방의 모든 것이 하얗고 하얀 세계였으며 그 세상을 받치는 건 나무들로 이루어진 기둥이었다. 대자연이라는 표현이 자꾸만 입에서 나오면서, 정신없이 사진기를 들고 찍다가 아무리 찍어도 이런 감동을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는 길목을 타임랩스로 걸어놓고 눈으로만 즐기기 시작했다. 충만하게 채워진 겨울의 한 자락. 비로소 나는 제주를 방문함으로 겨울이란 계절의 본모습을 알 수 있었음을 고백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동하다가 눈이 쌓여있는 적당한 곳이 있으면 차를 멈춰 세우고 내려서 한 무리의 설인(?)마냥 즐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런 부분에서 참 속도가 잘 맞는 팀이었다. '은'은  매년 눈사람을 만들고 눈오리, 눈하트 등을 만들면서 사람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눈을 좋아하는데 물 만난 고기처럼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기로 마음먹었는지 눈 위에서 눕고 구르고 던지고 진정 즐길 줄 아는 프로였다. '수'역시 은과 함께 겨울의 제주를 만끽하고 있었다. 나는 관찰지 시점으로 해서 두 사람을 열심히 찍고 담아냈는데, 나도 카메라 장비만 없었다면 뛰어들었을 정도지만, 관찰자로 우리의 모습을 담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에 본업에 충실하는 것으로!



나중에는 나도 눈 속을 해치고 들어가서 함께 사진을 찍고, 신발이 꽁꽁 얼어가고 바지 속으로 눈들이 잔뜩 들어올 정도로 함께 뛰어놀았으며, 1100 고지를 가는 길목에는 수많은 가족들이 썰매를 들고 와서 아이들을 태우며 겨울을 만끽하는 모습들이 펼쳐졌다. 다들 어떻게 알고 썰매를 챙겼을까, 커뮤니티의 힘이란 대단해.  그렇게 겨울을 만끽하며 천백고지로 점차 다가가고 있을 무렵, 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모습들이 펼쳐졌다.



바로, 여기저기에 차를 대고 즐기는 사람들로 인해 벌어진 끔찍한 도로 정체. 1차선밖에 없는 도로에 갓길에 생각 없이 차를 대고 썰매를 타러 가거나 눈을 즐기는 사람들로 인해서 도로는 혼잡했고 심지어 다리 쪽에다가도 차를 대는 사람들로 인해서, 30분 이상을 기다리며 정체가 풀려 해결이 되기를 기다리는 상황도 자주 벌어졌다.  


즐거워야 할 여행의 노정이 몇 사람들의 몰상식한 행동으로 인해서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 자기의 시간은 중요하고 남의 시간은 가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이기적인 모습들. 왜 제주에 사는 시민들이 여행객들을 반가워하지 않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1년에 천만명 이상 방문객이 방문하는 제주, 이곳에 살아가는 주민들의 입장에서 '육지' 사람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비치어질까. 그리고 해외에서 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볼 때에 한국은 어떤 이미지일까에 대한 자문을 해본다.



천백고지를 오가는 동안에 벌어졌던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의 양심이나 위험한 도로 따위가 아니었다.  도로 정체가 길어질수록, 우리들은 공허한 시선과 다급한 눈빛을 번갈아 보이며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지도 앱을 켜고, 주변의 간판들을 유심히 살피며 겨울임에도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솔트스톤에서 마신 커피가 우리의 방광을 자극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방문하는 곳마다 화장실들은 동파로 인해서 사용불가였고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도로는 밀리고 날씨는 춥고, 조금씩 신앙심이 커져가는 기분을 느끼며 (주님 제발 이번방문지에는 화장실이 열려있기를) 화장실을 찾았다. 아무리 춥다고 한다 해도 이렇게 모든 곳에 화장실이 동파가 될 수 있을까.  무슨 다른 숨겨진 흑막이 있는 건 아닌가, 유럽처럼 화장실 유료화를 위한 큰 그림은 아닐까.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면서 손바닥에 참을 인을 새기며 참아가던 우리는 간신히 천백고지에 도착하였고, '은'과 '수'는 한 마리의 날렵한 노루와 같은 모습으로 차를 버리다시피 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나는 아직은 그래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솔트해피투게더는 다른 음료에 비해 양이 적었다) 티를 내고 있진 않았지만 조금씩 차오르는 무언가(?)의 존재를 느끼며 홀로 차를 지킨다.  아무래도, 세 명 다 조급해하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 같은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내심 호흡을 가다듬으며 하나님과 부처님과 각종 신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꽤나 긴 시간이 걸려도 오지 않기에 혹시 여기 화장실도 사용불가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스스로에 하면서 기다리는데 다행히도 두 탐험가는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나타났다.  들어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사용하는데 대기가 길었다고, 하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겪을 일이 아니었을까.


* 제주 여행 팁,  '겨울에 마시는 커피는 위험하다, 특히 모든 화장실이 동파가 될 경우에는 신앙을 갖는 게 도움이 된다'


천백고지에 도착해서, 먼저는 엄청난 인파에 한번 놀라고 건너편에 보이는 한라산의 모습에 다시 한번 감탄을 하면서 천백고지를 즐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쌓인 눈들을 밟고, 해치면서 사진을 찍고 추억을 만들기에 바빴으며, 자연스럽게 우리도 그 움직임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다. 무릎 이상으로 푹푹 빠지는 눈을 밟으면서 내가 밟는 곳이 땅이 아니라 순수하게 눈으로 이루어진 곳이라는 걸 깨닫고 아연실색하기도 하고, 나무를 흔들어 눈을 쏟아지게 만들고 사진을 찍으려던 나의 계획은,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나무들조차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환경에 꺾어지기도 하면서, 끝없이 사진을 찍었다. 살아가면서 처음 보는 이 풍경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고 우리는 추위도 모른 채 한동안 천백고지에서 사진을 찍고 구경을 하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제주의 겨울을 만끽한다.



천백고지에서의 잊지 못할 시간을 보내고 나서, 우리는 사려니 숲길을 가기로 했다. 그곳도 대자연이 숨 쉬는 멋진 절경을 볼 수 있다기에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마음적이나 육신적으로나)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었지만, 솔트스톤의 커피는 우리가 그럽게 가볍게 여길 상대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도로는 정체가 되기 시작했고 또다시 우리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곡 소리만 안 났지 다들 사색이 되어가는 표정이었고, 이제는 나 역시도 정신줄을 놓는다면 큰일이 날 것 같은 긴박한 상황. 다행히도 사려니 숲길 주차장에는 전기차 충전소가 있었고 우리는 전기차 충전을 하면서 화장실을 먼저 갔다 오고 사려니 숲길을 즐기기로 정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는 게 어디 많던가, 사려니 숲길 화장실 역시 동파로 인해서 물통이 깨지고 물이 흘러넘치고 있었고 그 흘러넘치는 물통을 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닌.. 참을 수 없는 무언가가 강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제주여행에서 가장 단호하고 재빠르게 의견을 냈다. 

'눈이 내리지 않은 도심으로 가보죠. 가장 가까운 농협에 전기차 충전소도 있고 하니까 그쪽에 가서 급한일도 해결할까요?'


최대한 침착한 척 말을 했지만, 그래도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나 싶은 느낌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제주도가 정말 크다고 느꼈던 것이, 제주의 동쪽과 서쪽의 느낌이 너무 달랐다. 서쪽은 뉴스에서 나온 대로 온통 눈으로 가득 찼던 얼음왕국이었지만, 동쪽은 풀이 푸릇푸릇 피어나는 봄날의 햇살이 내리쬐는 제주였다. 그래서 천백고지를 올라갈 때는 눈으로 가득 찬 제주를 만끽했고, 내려오는 길에는 말들이 봄날의 망아지마냥 초원을 뛰노... 는 장면은 아니지만 여물을 우걱우걱 씹으면서 자유를 갈망하며 들판을 바라보는 제주였었기에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전략이었고 모두가 동의하였다.


하지만 그럴싸한 계획은 우리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려니 숲길 주차장을 나가는 길목에서, 유독 얼음이 많았고 눈도 쌓여있었던 그 좁은 길목에 우리의 차는 보란 듯이 눈길에 밀려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염없이 헛바퀴를 도는 자동차에 아연해진 우리는 주변의 도움을 구했지만 아무리 밀어도 차는 요지부동. 힘을 줄수록 차와 달리 나는 요지부동 할 수 없었다.


우리의 마음과 달리 태평했던 붕붕이의 뒷모습..


일단은 견인 서비스를 부르기로 했고, 나와 '수'는 차 안에서 견인차를 기다리기로 했고 '은'은 가까운 화장실로 험난한 길(900미터 거리)을 뚫고 내려가보기로 했다. 하얀 설원 위에 외로운 여행자가 되어 우리를 뒤로하고 화장실에 도달하기 위해 떠나는 '은'의 뒷모습을 응원하며 우리도 각자 마음을 다스리며 견인차를 기다린다.


각자 흩어진 '은'과 '근', '수'는 무사히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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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의 시선

2화, 제주탐사대에겐 아지트가 필요하다.

3화, 제주탐사, 날씨요정의 횡포, 결항 또는 연착?

4화, 본격적인 제주탐사에 앞서, 체력보충시간

5화, 제주 탐사, 은희네 해장국부터 시작


'은'의 시선

1화, 혼저옵서예

2화, 제주 행 비행기 탑승은 2Gate 입니다.

3화, 제주도도 식후경이다.

4화, 여행 속도가 맞는 이들의 제주 여행



제주여행이 기록될 사진공간.

https://www.instagram.com/talkwithpentax/   '근'의 시선  

https://www.instagram.com/mome_morable/  '은'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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