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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름 Sep 11. 2020

내가 어쩌다 여기에 살고 있더라?

어설퍼도, 미국살이.

 미국 대사관 인터뷰 날짜는 2월 4일이었다. 작년이 아니고 올해였다. 대사관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코딱지만큼 작은 호텔방에 짐을 풀던 2월 3일 밤까지만 해도, 5월 12일에 미국 어드매에서 무려 두 번째 이삿날을 기다리며 노트북을 펼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다. 아마 기대도 하지 않았다. 정말 인생 알 수 없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처음 방문했던 것은 대학교 졸업을 목전에 둔 마지막 방학이었다. LA로 들어가서 일주일을 머물고, 그랜드캐년-브라이스 캐년-요세미티를 아우르는 서부여행을 마치고 나서는 텍사스로 날아가 달라스-알링턴-오클라호마를 돌고 40여 일 머물렀었다. 당시 여행은 만족스러웠고, 그 후에도 몇 차례 LAX를 통해 미국에 들어와 여행하고는 했다. 심지어 신혼여행도, 미국에 계시는 남편의 친척 어른들을 뵙기 위해 미국 자유여행을 선택했었다. 다양한 나라를 여행해보았지만 미국처럼 수차례 와본 나라도 없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런데 그걸 의도한 건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미국에서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귀국 비행기를 타야 할 당일 시외삼촌 댁에서 뜬금없이 "면접보고 가거라"하는 말씀을 던지셨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미국은 나에게 매력적인 여행지일 뿐인데, 갑자기 여기서 살아보는 건 어떠냐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압박)이 훅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국에 사시던 그분들에게는 한국에 살고 있는 가련한 조카와 조카며느리에게 미국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큰 선물을 주는 것과 같다고 느껴졌던 것 같다. 그 태도가 그대로 전달되어서 더욱 거부반응이 올라왔다. 결국 우리는 "No, thanks."를 외치고 뒤도 안 돌아보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이후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한차례 더 미국을 여행했고 아이가 미국의 드넓은 공원과 호숫가에서 오리를 쫓아다니며 함박웃음을 짓는 것을 보고는, 그리고 지긋지긋한 아이의 비염이 단 2주일 만에 싹 나아버린 것을 목격하고는 마음을 정하게 되었다. 결혼 후 은근히 이민을 채근하던 남편에게 못 이긴 척 "그럼 한번 추진해볼까?"라고 말 꺼내기가 무섭게 모든 것이 휘몰아쳤다. 우선, 남편은 이민에 유리한 직업으로 과감하게 이직했다. 알만한 교육회사의 사업파트에서 일하며 경영 관련 커리어를 쌓아오다가 다 집어치우고 테크니션으로 전향했다. 오로지 이민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어떤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고, 회사에서는 오래 걸리는 취업비자가 아닌 주재원 비자로 미국에 하루라도 빨리 들어오기를 권하였다. 미국에 있는 로펌과 함께 서류를 꾸미고 스케줄을 잡고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매우 싱겁게 인터뷰가 끝나고나서 나는 이렇게 얼레벌레 미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어서 얼이 빠져있었고, 우리 아이는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다고 엉엉 울고있었으며, 남편은 큰산 하나를 무사히 넘어 싱글벙글이었다. 이렇게 우리가족은 각자 다른 감정으로 미국행을 시작했다. 이미 들어와있는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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