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베란다에서 식물을 키운다. 화분 수가 꽤 많다. 사는 곳이 구옥 아파트라 베란다가 세로로 아주 긴데, 그 공간이 꽉 차다 못해 자리가 없을 만큼 많다. 하나 둘 화분을 들이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됐다.
저 끝까지 다 물 줄 애들
다행히 우리 집 베란다는 식물 키우기에 꽤 좋은 곳이다. 남향이라 빛이 잘 들고, 옛날 샷시라 창이 아주 커서 바람도 잘 통한다. 덕분에 화분 속 물이 금방 잘 마르는 편이라 과습 걱정도 별로 없다.
딱 하나, 굳이 문제를 꼽자면, 그만큼 물 줄 일도 많다는 거다. 그리고 이 물 주기가 생각보다 번거롭고 힘들다.
우리 집 베란다 수도꼭지에는 아주 오래된 고무호스가 달려있다. 지금 집에 산지 6년이 되어 가는데, 기억이 맞다면 16년 가까이 살던 전 집에서도 그 호스를 썼었다. 신축성 없고 딱딱한, 그저 엄청 길기만 한 반투명 호스 안에는 세월만큼 오래된 물때가 가득해서 물을 틀면 바닷속 미역 흐느적거리듯 호스 속을 울렁거린다.
이 오래된 호스는 길이만 길지 활용성이 썩 좋지 못하다. 한 자리에 꽈리를 틀어둔 채로 너무 오래 둬서 그런가, 그 모양으로 고정돼서 다시 몸을 펼 줄을 모른다. 그리고 아주 무겁고. 그걸 끌고 베란다를 돌아다니다간 팔목도 아프고, 자칫 그 무거운 몸으로 화분이라도 처 버리면 대번에 잘리고 부서질 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1L짜리 물조루에 물을 채워서 사용하는데 매번 쪼그려 앉아서(수도꼭지가 바닥 쪽에 있다) 물을 뜨고 들고, 이동해서 물 주고, 또다시 물 뜨러 가고를 반복하며 식물을 돌봤다. 베란다도 넓고 그만큼 식물도 많으니 해 좋은 날은 물만 줘도 순식간에 두 시간이 사라진다.
우리 집 베란다 물 주기가 꽤나 노동이라는 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한 번은 장기 해외 일정이 있어서 한 달 이상 집을 비우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동생이 대신 베란다에 물을 줬었다. 그리고 역시나, 이 말도 안 되는 반복노동 물 주기에 학을 뗐다.
“언니, 이거 물 매번 이렇게 앉았다 일어났다 떠가지고 수십 번 떠 나르는 거 너무 힘든데?”
맞다. 하지만 별 수 있는가. 물 뜨는 게 번거롭다고 식물을 말려 죽일 수는 없지 않나. 계속 그렇게 줄 수밖에. 식물용품을 사러 갔다가 새 호스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몇 번 만지작거리다 그냥 나오곤 했다. 이유를 말하자면 조금 부끄러운데, 내가 그걸 설치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우리 집 베란다 수도꼭지에 잘 안 맞으면 어쩌지? 설치하려면 다 뜯어야 할 텐데 그러면 환불도 안 될 거 아냐.
저렴한 건 가격도 몇 천 원 정도인데 그냥 사서 시도해 보면 좋았을 것을. 나는 괜히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 그냥 지금처럼 주면 되지. 괜히 물건 더 사서 자원낭비 하지 말자” 했다. 그게 솔직한 마음이 아니었다는 건 말하면서도 알았지만.
그러다 이번 생일. 변화가 생겼다. 동생이 생일 선물로 새로운 호스와, 물뿌리개 손잡이를 선물한 것이다. 새 호스는 가볍게, 길게 늘어나서 베란다 끝에서 끝까지 끌고 가도 휙휙 잘 딸려왔다. 끝에 달린 물뿌리개는 노즐을 바꾸면 물이 샤워기처럼도 쏟아졌다가 미스트처럼 부드럽게도 나오고, 물총 발사하듯 한 점으로 모여 강하게 튀어나오기도 했다.
익숙해져서 괜찮다고? 아이고 헛소리. 이렇게 좋은 걸 괜히 안 쓰고 지금까지 그 고생을 했다니!
신이 나서 베란다 여기저기 물을 뿌려보다가 내친김에 바닥 물청소까지 했다. 물이 잘 닿지 않아 더워지면 응애가 자주 출몰하던 오른쪽 베란다 끝과 왼쪽 베란다 끝까지 시원하게 물을 뿌렸다. 속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물을 뿌리며 발이 젖고, 머리가 젖어도 그저 신나고 즐거웠다. 분명 청소를 하는 중인데, 뭔가 물놀이를 하는 기분이다.
한바탕 베란다에 물을 뿌리고 물을 뚝뚝 흘리며 거실로 들어섰다. 발에 물이 묻다 못해 바지 아래쪽까지 흠뻑 젖었지만 왠지 실실 웃음만 나온다. 베란다 온습도계가 습도 70%를 표시한다. 집중 장마철 때나 보던 숫자다. 화분에 물만 겨우 줘서 매번 건조로 응애가 생기던 베란단데, 이번 여름은 왠지 응애 걱정 없이 보낼 수 있을 거 같다.
호스 하나 교체하니 이렇게 신날 수가. 이 좋은 걸, 이 쉬운 걸 겁내서 그렇게 오래 미련을 부렸다니. 오늘, 기분 좋은 경험과 조금 부끄러운 깨달음을 동시에 얻었다.
동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잔뜩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