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옹졸한 내 속이 향기롭게 넓어질 날이 오긴 올까...?
주문한 지 30분이 지났다. 들뜬 마음으로 주문했던 크리스마스 블론드 드립 커피는 아무리 기다려도 나올 생각이 없다.
오랜만에 쉬는 평일, 아침을 먹자마자 바로 카페에 왔다. 이번에는 반드시 뭐라도 써보겠다고 각오하며. 뭘 시킬까 고민하다가 이달의 커피로 ‘크리스마스 블론드’를 발견하고 주문했다. 이달의 커피는 매달 다양한 원두로 드립 커피를 내주는 메뉴다. 다만 따로 디카페인 메뉴는 없어서, 오후 카페인을 피하는 내게는 오전에 카페에 와야만 즐길 수 있는 특별 메뉴다.
어제저녁 카페에서 디카페인 음료를 받아 올라가는 길에 시향하라고 내놓았던 크리스마스 블로드 원두의 향이 얼마나 좋던지. 습 하고 들이마신 숨에 고소한 커피 향과 함께 달콤함이 훅 끼쳐 올라와 황홀했던 기억이 난다.
신나서 주문하고 보니 대기 번호가 13번이다. 하긴, 아침에는 늘 커피 손님이 많다. 다행히 나는 딱히 급할 게 없다. 오늘은 그냥 뭐라도 써 보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발 무언가 쓰기만 한다면 그걸로 나 자신을 한없이 칭찬해 주고 만족할 각오가 되어있다! 상태라서, 나름대로 여유가 있었다. 시간도 마음도. 대기 번호 13번 정도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
게다가 드립커피를 주문했으니 평소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원래 아침에는 드립 커피가 좀 오래 걸린다. 에스프레소 커피야 그때그때 내려서 주면 되지만 드립커피는 미리 내려놔야 하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에 비해서 주문하는 손님도 별로 없으니, 어떨 때는 내가 그 카페의 첫 드립커피 손님일 때도 있다. 그러니 ‘아침 드립’이 좀 늦게 나오는 거야,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능숙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10분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기다렸다. 15분도 좀 괜찮았던 것 같고. 20분....부터는 조금 짜증이 나서 ‘오전에 드립 커피를 주문한 자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라고 스스로를 달래야 했지만, 그래도 이때까지는 나름 잘 기다렸다. 하지만 25분이 넘었을 때부터, 내게는 여유도 품격도 전혀 없었다. 속으로 수없이 ‘그럴 수 있다. 급할 거 없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손님이 많은가 보지’ 되뇌며 애써 봤지만, 마음은 이미 성이 나서 끙끙거리고 난리다.
결국 시계가, 내가 30분 이상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줬을 때. 나는 마치 누가 이제 화내도 괜찮다고 허락해 준 것처럼 분연히 일어섰다. 30분이라니! 아, 이제 32분. 이게 말이 되는가! 심지어 아직 개인 컵 가져오라는 알람도, 메뉴가 준비되어 기다리고 있다는 알람도 안 떴다. 이건 뭐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암 그렇고말고.
언짢은 마음이 가득한 채로 카운터가 있는 아래층으로 향했다. 카운터 너머로, 유니폼을 입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직원 셋이 보인다. 다들 아주 바빠 보였다. 순간,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 많이 바쁜가 보다. 하긴, 지금 시즌이 시즌이라 손님이 많을 때지. 예전에 봤던 기사 내용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시즌 이벤트 기간에 업무량이 과다하게 늘어서 직원들이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혹시 모르지 않는가. 뭔가 주문 시스템에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동안 이 카페를 몇 년간 이용하면서 30분 넘게 음료를 기다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뭔가, 내가 주문 버튼을 누른 게 직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속 바쁘게 혼자 말하고 답하길 반복하면서 카운터 직원이 날 인지하길 기다렸다. 마침내 한 직원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주문하시겠어요?”
언제나 같은 친절한 목소리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들이 잘못했을 리 없다. 분명 시스템 문제야. 내 핸드폰이나, 데이터나, 애플리케이션이나, 주문 시스템이나 하여간 뭔가 다른 게 제대로 안 굴러간 게 분명해.
“커피를 주문했는데.... 30분이 넘어서요. 뭔가 잘못된 거 같아요.”
나는 뭔가 좀 민망한 느낌이 들어 슬쩍 주문 시간이 찍힌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주문 시간 오전 9시 19분 57초, 화면 위에 떠 있는 현재 시각은 9시 56분.
“어?”
확인한 직원이 놀란 듯, 심각한 얼굴로 반응하며 커피 제조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말을 건다.
“00 씨, 여기 손님이 거의 40분째 음료를 못 받고 계시는데, A-53 주문 들어갔나요?”
“53번이요? 어.... 네, 있네요.”
아. 주문 오류 아니구나. 그냥 진짜, 내가 음료를 못 받은 거구나. 와, 손님 진짜 많은가 보다. 대기 번호 13번이었는데도 30분을 넘게 기다리고 있는 거면 내 뒤에 온 사람들은 지금 얼마나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그렇게 속으로 놀라고 있는데,
“아, 손님 개인 컵 주문하셨나요?”
내 주문 번호가 들어가 있다고 확인해 줬던 커피 제조 직원이 말을 건다.
“네.”
“아, 그래서 그래요. 컵을 안 주셔서.”
뭐라고요?
순간 마음의 평화가 아작- 깨져나갔다. 내가 개인 컵을 안 가져다줘서, 내 주문 건을 계속 미루고 있었다고? 30분이나?
그동안 내가 몇 년간 이용해 온 해당 카페 무인 주문 시스템은 대략 이러하다. 카페 앱을 통해서 주문하면, 앱은 내 대기 번호가 몇 번 째인지 띄워준다. 그리고 음료가 다 만들어지면, 알림을 통해 해당 음료를 찾아가라고 신호해 주는 식이다. 덕분에 카페로 오는 길에 미리 주문했다가 들어와서 음료만 바로 받아 나가는 것도 가능하고, 주문하고 좀 기다려야 할 때도 카운터 앞에서 오래 기다리지 않고 음료가 다 만들어질 때까지 2층에 앉아서 편히 음료를 기다릴 수 있다. 나처럼 개인 컵에 음료를 받겠다고 주문하는 경우, 주문 후 컵을 카운터에 전달해 주기만 하면 된다. 혹시 컵 전달이 늦어져서 음료 만드는 직원이 기다리고 있다면, ‘기다리고 있으니 얼른 컵 가져오세요’ 하는 친절한 알람을 핸드폰에 띄워준다.
오늘 내 주문 후 대기 번호는 13번이었다. 평소 같은 시간대에 1, 2번 정도의 주문 번호를 받았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손님이 많았다. 그래서 주문 후 바로 개인 컵을 전달하러 아래층에 내려가는 것보다는 컵 가져오라고 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주문 쳐내느라 바쁜 직원에게 13번 뒤의 컵을 들이미는 것도 좀 그런 것 같았고, 무엇보다 이렇게 주문 대기 번호가 크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서, 컵 전달 후 다시 올라왔다가 음료를 받으러 다시 내려가야 하니까. 아니면 그 앞에서 음료 나올 때까지 주야장천 기다리던가. 그래서 그냥 2층에 얌전히 앉아 개인 컵을 전달해달라는 메시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런데 30분이 넘도록 아무 메시지도 알람도 뜨지 않았고, 뭔가 평소와 너무 다르고 이상해서 아래로 그냥 내려갔던 거고.
그런데 내가 컵을 안 줘서 내 주문이 계속 밀리고 있던 거라고요? 그러면 계속 참으면서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난 대체 언제 커피를 받을 수 있었다는 거죠?
보아하니, 확실히 오늘 아침 카페 카운터가 많이 바빴던 건 맞는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손님을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할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 같고, 그저 계속 들어오는 주문을 쳐내고 있는 상태라 굳이 개인 컵 가지고 내려오지 않은 손님에게 알람 메시지를 보내지 않고 대기 주문을 하나씩 처리한다던 게 어느새 이렇게까지 밀려버린 거였던 것 같지만.
그래도 ‘죄송하다’가 아니라, ‘네 탓이다’라는 말을 들으니 그 순간은 정말 마음이 불편했다.
기다린 시간이 무색할 만큼, 커피는 순식간에 나왔다. 내 개인 컵을 받아 스팀 처리하고 커피를 담는 내내, 제조 직원은 계속 말을 이었다.
“원래 개인 컵에 주문하시면 컵을 주셔야 해요.”
그걸 내가 몰라요? 황당한 마음에 답했다.
“네, 알아요. 오늘은 대기 번호가 많아서 기다린 거예요. 바쁘신 거 같아서. 보통은 개인 컵 달라고 알람 주시니까요.”
“아, 네 맞아요. 알람을 드리는데.......”
말을 흐리던 그가 돌연 맨 처음 카운터에서 내 상황을 들었던 다른 직원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개인 컵에 하시면 개인 컵 가지고 오시라고 알람을 눌러야 하는데.......”
이제는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이 남자 직원이 내 주문을 인지했고 개인 컵 호출 버튼을 눌러야 했는데 안 눌렀다는 건지, 저 여자 직원이 당시 담당자라 눌러야 했는데 안 눌렀다고 탓하는 건지. 뭐가 됐던 내게 하는 사과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커피가 나왔다. “감사합니다.” 남자 직원이 인사를 하며 컵을 건넨다. 평소였으면 꼭 감사합니다 하고 받았을 테지만 마음이 언짢아서 도저히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컵을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목이 타서 뜨거운 커피를 벌컥벌컥, 컵의 반을 비울 때까지 마셔댔다.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내 감정이 ‘화’라는 걸 인식하자, 바로 기도가 나왔다. 얼마 전 내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다고 다시 배웠는데, 내 안에 화가 타고 있다면 그걸 기뻐하시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이건 주께서 기뻐하시는 게 아니지요? 그리고 참 별거 아닌 작은 일이기도 하고요. 그런데도 제가 지금 화를 내고 있어요. 주님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이 감정이 내 안에 머물지 못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머릿속에 용서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하나님이 주신 응답이라 생각하고 이를 붙잡아 계속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평소에도 용서하는 걸 참 못하잖아요. 제대로 성공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주님의 용서는 매일 받으면서, 저는 누굴 용서할 수 없다는 게 힘들어서 계속 기도 했었잖아요. 그만 미워하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나도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어쩌면 오늘이 그 시작일지도 몰라요. 이 작고 미약한 실수도 용서하지 못하면 어떻게 진짜 용서를 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 제가 용서할 수 있게 해주세요. 이 언짢음이 사실 부당하잖아요. 그 사람은 자기 일을 바쁘게 하다가 잠깐 실수했을 뿐인걸요. 나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도 제 못된 마음 좀 보세요. 주님이시라면 아까 그 상황에서 저처럼 느끼지 않았을 거 같아요. 직원의 인사에 분명 같이 인사해 주셨을 거예요. 저는 그걸 못했어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용서하고, 이 부당하고 내게 해롭기만 한 감정을 제 안에서 없애주세요.’
기도를 마치자, 주님이 그 기도를 기다리고 있으셨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개가 걷히듯 마음을 불편하게 하던 감정이 스르륵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러자 문득, 커피 맛이 어땠지? 어제 맡았던 그 달콤한 향이 났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나서 기대하던 맛이고 향이고 다 놓치고 그냥 벌컥벌컥 마시기만 했던 거다.
컵 안에 남은 커피 반 잔이 보였다.
천천히 다시, 한 모금 머금었다. 그새 조금 식어버린 커피에서는 어제 같은 향이 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화를 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 짧은 사이에 기대했던 모든 향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계속 분노에 차 있었다면 이 나머지 반도 제대로 맛볼 수 없었겠지.
다행히 커피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비록 가장 아름다운 향은 날아가 버렸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부드럽고 따뜻한 목 넘김은 아직 거기 있었다. 이마저 잃기 전에 정신 차릴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이것도 지금의 내 마음 실력으로는 황송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평상시의 나였다면 분명 다 식어 차게 변한 커피를 쓰게 삼키며 좌절하고 있었을 텐데, 그래도 아직 따뜻하잖아.
아직 다 식지 않은 커피를 입에 머금고, 혹시나 남아있는 향이 없을까 숨을 돌려보며, 어쩌면 다음에는 오늘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 커피에 온기를 남기는 데에 성공했으니 언젠가는 완전한 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얼마나 걸리려나? 제발 내년 크리스마스 블랜드는 제대로 향기로우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