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월 12일에 입대해서 2006년 1월 11일에 전역했으니, 거의 20년 전 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군대이야기는 별로 써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게 참 스스로도 놀랍다. 그 2년 동안, 삶에서 느끼는 감정의 극단을 가장 많이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아직도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잘 쓰지 않았다니. 잊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남자에게 군대에서의 경험이란, 어쩔 수 없이 절벽에 매달렸던(2년이나...) 기억 같은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크게 다시 복기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이지.
나 뿐만이 아닐테지만, 이 드라마 'D.P.'로 인해, PTSD 겪으시는 분들 꽤나 많을거다. 예전에 '벌새'를 보고나서 느꼈던 감정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내가 잊고 싶었던 내 삶의 구간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내 눈 앞에서 헤집는 기분. 다만 '벌새'와 차이점은, '벌새'는 기억이 나지 않던 구간의 기억을 끄집어 내는 반면, 이 드라마는 내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그 순간들로 나를 다시 데려가는 느낌이랄까.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고, 인간 이하의 폭력을 당하던 그 순간의 내 기억, 그 때 초단위로 느끼던 두려움, '차라리 죽는게 낫나'라고 생각했던 비관. 그런 것들로 날 다시 데려간다.
우리는 모두 폭력적인 시대를 관통하며 자라났지만, 군대에서의 폭력이 특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때야 선생님께 맞더라도,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으니 맞았던 거다. 물론 폭력이라는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그 폭력에는 그 폭력에 대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군대는 달랐다. 군대는 내가 잘했건, 잘못했건, 상관없이, 어떤 명확한 이유가 없이 거대한 폭력이 행해졌다.
[단지 이런 어이없는 이유로도 폭력은 가해진다]
납득할 수 없는 폭력은 놀랍게도 살면서 겪은 어떤 폭력보다 강도가 높았고, 그런 폭력을 받아내다보면, 어느새 그 비합리에 그대로 물들어버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 가장 약한 순간과 가장 폭력적인 순간을 모두 경험하는 곳. 그 곳이 바로 군대다.
내가 군생활을 할 때, 그 유명한 '김일병 총기난사 사건'이 터졌다. 막사 안에서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동료를 죽였던 그 사건은, '이상한 김일병' 혼자의 사건이 되었다. 김일병은 평소에 총쏘는 게임을 좋아했다나 어쨌다나. 그 덕분에 총쏘는 게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안좋아졌고, 군대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나에게 그 시기는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의 피해자'에서 '폭력을 가해할 수 있는 짬밥'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는데, 김일병덕분에 그런 이유없는 폭력은 강력하게 금지되었고, 나와 내 동기들은 짬 안될 땐 열심히 맞고, 짬이 될 땐 후임들 눈치 잘 보면서 무사히 군생활을 마쳤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런 사건이 일어났던게 다행이었던 것 같다. 비합리에 이미 물들었던 나는, 그런 사건이 없었으면 당당하게 그 비합리한 폭력을 자행했을테니까 말이다.
그게 바로 2004년~2006년이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고, 세상은 무지막지하게 바뀌었다. 그래서, 난 그 곳도 이젠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큰 착각이었다. 놀랍게도 그 곳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 작품 속 명대사처럼, 6.25때 쓰던 수통도 안바뀌는데 군대가 바뀔리가 없었다.
물론 작 중 배경은 2014년이지만, 폭력은 그대로더라. 누군가는 극화하는 과정에서 과장된 것이라고 말을 하지만, 그런 디테일은 단순히 과장하는 것으로 나올 수 없다. 누군가는 그런 일을 경험하고, 누군가는 그런 것을 증언했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런 것들 때문에 부대를 뛰쳐나갔고, 누군가는 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런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국방부는 과거의 이야기라며 지금과는 맞지 않다며 입장을 밝혔지만, 바로 그 다음 날, 해군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하던 꽃다운 청춘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폭력은 여전하다.
그래서 너무 슬펐다. 작품 자체는 되게 재밌고, 버디 수사물같은 느낌인데도 슬펐다. 드라마 타이틀도 슬펐고, 매 화마다 마지막은 특히 더 찡하고 슬펐다. 이상한 나라의 괴상한 폭력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는 청춘들이 거기 있었다. 나도 한 때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수 많은 청춘들이 그 드라마를 지켜 보았다. 누군가는 쓰린 기억을, 누군가는 앞으로 다가올 공포를 느끼며 그 드라마를 본다. 안타깝다.
폭력은 그대로고, 군대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우리가 봐야하는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닐까.
엔딩에서 다른 병사와 다른 방향으로 뛰어가는 안준호 이병의 눈빛에서, 그리고 호열이와 준호가 잡아낸 탈영병들이 왜인지 모르게 안심하는 듯한 그 눈빛에서 아주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희망을 본다. 우리가 앞으로 나가가야 할, 만들어나가야 할 방향을 본다. 지금은 아주 작아서 보일락말락하지만, 그 희망이 시즌을 더해갈수록 더 강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즌이 더 제작되면 좋겠다. 시즌만 더해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우리가 겪어온 이유없는 그 폭력도 이젠 공론화되고 바뀌어나갔으면 좋겠다.
안준호 이병에겐 미안하지만 다행히도 안준호 이병의 전역은 아직 500일이 넘게 남았다. 시즌 5개는 더 뽑아낼 수 있다. 힘내라.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