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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정훈 Sep 02. 2021

리틀 포레스트 - 도망쳐도 괜찮아.

살다 보면, 꽤나 답답한 문제들에 마주할 때가 있다. 사실 엄청난 '삶의 위기'라고 까지 말하긴 어렵지만, 그저 가만히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기엔 또 힘이 들고, 답답한 일들 말이다. 그럴 땐 그저 어디로든 도망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우리를 바로잡고, 우리를 다그치는 충고는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고 도망치지 말라'는 충고다. 맞는 말이다. 문제를 피하기만 해서야, 문제는 그대로 있을 뿐, 나는 변하는 것이 없다. 우린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은 도망치고 싶어한다. 그리고 우린 결국 도망친다.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 아주 먼 8년 전의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시절 난, 회사를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퇴사 다음 날,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편도로 끊고, 무작정 떠났다. 그렇게 며칠 걷다보니 제주도가 지겨워졌고, 그렇게 돌아왔다. 그리고나선 취업 전까지 4개월동안 그저 마냥 책만 읽어댔다. 그렇게 백수아닌 백수로,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고 그저 흘려보낸 시간이 있었다. 그저 남들도 한 번쯤 있음직한 방황기의 이야기, 성인이 되어서야 겪었던 사춘기 아닌 사춘기의 이야기이다.


근데 지나고보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시간 중에, 그 시간만큼 충만한 만족과 여유가 있었던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마치 언젠가 또 가질 그 시간을 위해서 일을 하고 살아내는 것처럼, 그렇게 또 나는 열심히 달려간다. 이 영화는 그 시절, 그 마음들을 떠올리게 한다.


임용고시에 떨어진 혜원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밥을 지어먹고, 오랜 친구들을 만나고, 그렇게 그렇게, 서울로 돌아가는 시간을 조금씩 미룬 채, 1년이라는 시간을 그 공간에서 끼니끼니를 해결하며 보낸다. 이 영화는, 그저 혜원이 고향으로 도망쳐 온 1년이란 시간을 지그시 함께 바라본다.



결혼하고 나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먹는 것에 대해 준비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혼자 지내던 시간보다 압도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특히 휴일의 경우에는, 한 끼 한 끼, 둘이 모두 달려들어서 굉장히 성실히 준비하고, 성실히 정리한다. 마치 삼시세끼를 찍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하다보면, 밥을 짓고 먹는 것밖에 하지 않았는데 휴일이 모두 지나가버릴 때도 있다. 그런 날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굉장히 충만한 휴식을 취했다는 만족감과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삼시세끼를 보며 그 재미없는 밥짓기와 반찬만들기를 바라보는 이유도, 우리에게 메꿔지지 않는 그런 충만함을 느끼기 위함이 아닐까.  이 영화 역시 그렇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행위인 '요리'와 '식사'를 더 인상깊고 멋지게 그려내고, 더불어 우리가 매일 3번씩 하는 그 행동들은 어떤 행동보다도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우리에게 설득시키는 것만 같다. 그 따뜻함이 좋았다.

그 따뜻한 화면을 1년동안 함께 응시하며, 우리도 그 1년을 혜원이와 함께 같이 겪어내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 화면을 보고나면 왜인지 모를 불안한 마음도, 마음 한 켠에서 우리를 건드린다. 아마도 그 불안함은, 그저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가 저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여유와 충만에 대해서 막연하게 느끼는 불안함일 것이다. 혜원이는 1년을 시골에서 밥먹는 것만 하며 보내버렸는데, 그 이후에는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는 건지, 시골에서의 삶은,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여유롭지만은 않을텐데, 그 빈곤함은 어찌 견뎌내려고 저러는지. 그런 현실적인 불안함 말이다. 우리는 영화 속의 주인공을 보며 알듯모를듯한 그런 불안감에 휩싸인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인생은 길다'고 말하면서, 인생이 길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인생은 놀랍게도, 우리의 생각보단 훨씬 길다. 그리고 그 길고 긴 인생 중의 저 1년은 어쩌면 가장 소중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저런 여유가, 저런 1년이, 저런 장소가, 우리만의 '작은 숲'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아주심기'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말이 우리에게 전하는 울림이 만만치 않다. 우리가 초등학교 실과시간에 배웠던, 외웠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아주심기'란 '묘목을 더 이상 옮겨 심지 않고 완전하게 심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우리는 어쩌면, 이 나이까지도, 아니 이 나이 너머 아주 많은 날들이 흐른 뒤까지도, 우리의 '아주심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 말이 전해주는 묵직한 울림이 계속 마음 속에 남는다.  

다급한 마음을 가다듬고, 저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얼토당토 않은 상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충분히 힐링이 된다. 
도망쳐도 괜찮고, 쉬어도 괜찮다. 그저 밥을 해먹는 일만 1년내내 해도 상관없다. 젊은 우리에겐 아직 시간도, 여유도, 너무나도 충분하다. 그 안도감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역시, 이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분명히, 우린 힐링이 된다. 구석에 넣어놨다가,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해질 때, 조용히 꺼내보고 싶은 영화. 정성들인 끼니와 좋은 친구들만 함께 있다면, 어디든 우리에겐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보장된다는 걸 알게된 시간. 한 여름밤, 냇가에서 인삼주를 기울이던 그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 생각난다. 좋은 영화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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