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 이야기-
이 책의 첫 챕터는 작가 김영하의 어이없던 여행기에서 첫 여행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나에게도 첫 여행은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기억이자,
이토록 여행과의 질긴 인연을 이어가게 만드는 원천이었다.
대학시절 내내 배낭여행이라는 걸 왜 한번도 떠나보지 않았는가.
왜 그 긴긴 방학을 넘쳐나는 시간을 어찌 쓸 줄 몰라 손 안에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줄줄 흘리며 방관만 했던가.
졸업을 앞두고 절친과 탄식을 하던 나는 참으로 애매한
졸업식이 있던 2월 겨울, 유럽여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겨울이지만 젊으니까, 비수기니까 더 좋을 거라는 생각에 무작정 떠난 여행.
어마어마한 시간을 함께한 친구이지만,
어쩌면 여행 취향만큼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좋은 교훈도 얻었고,
15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 흘렀어도
아직도 이 친구를 만나면 재탕에 재탕을 거듭하며 웃어대는 에피소드도 얻었다.
우리의 여행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거치는 코스였다. 한국인들이 많이들 간다는 코스였고,
주요 관광지 위주로 한국인 여행자 표본을 보여주듯 주요 명소, 블로그 맛집들을 찍으며
제법 무난한 여행을 해나갔었다.
그러나 여행은 제 아무리 철저한 계획 신봉주의자라 할지라도,
미세한 위기 상황들에 봉착하게 해서
갈등과 해결이라는 서사 구조를 겪어나가게 하는 매력이 있는 놈이라,
무사주의 여행을 하던 우리에게도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쳤으니
바로 이탈리아의 기차파업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탈리아가 파업을 쉽게 하는 나라인지,
어떠한 예고도 없이 줄이 늘어지게 서 있는 승객들 앞에서
당당하게 문을 닫으며 파업을 외쳐도, 당연시 하는 나라라는 걸.
로마의 일정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건너가 바티칸에 있는 숙소에서 자는 게 우리의 계획이었다.
이미 숙소도 한달 전 예약을 마친 상태였고,
눈 앞에 기차만 타면 편안한 숙소에서 오늘 하루를 잘 마무리 할 줄 알았다.
기차는 운행하지 않았고, 밖은 깜깜했고, 당장 오늘 밤 잘 곳이 없었다.
어디서 파업 소식을 알고 달려들었는지 택시를 태워주겠다는 기사들이 자꾸 흥정을 해댔고,
그들이 몰려들때마다, 우리가 갈 곳없는 겁먹은 존재라는 걸
모두에게 드러내는 거 같아 자꾸 불안했다.
몇몇 배낭여행족들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기차 대합실에 큰 짐을 내려놓고
그 짐을 침구삼아 잠을 청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도저히 그런 곳에서 잠을 자기에도 두려웠지만
오늘 밤 가지 못하는 호텔 숙박비보다 더 많은 돈을 택시비로 지불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국 급하게 숙소를 찾아보기로 하고 역 주변을 살폈지만,
줄을 서있던 그 인원들이 이미 숙소를 찾아 들었는지
왠만한 숙소는 방이 남아있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삐끼인지 부랑자인지 관광객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괜히 더 의식이 되었고,
결국 찾아 찾아 발견한 허름한 한 여관급의 숙소 이름은
웃기게도 'sayonara' 였다.
이탈리아의 사요나라라니.
어찌 되었건 지붕이 있고 문이 있는 곳에서
밤의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떨치고자
그 숙소를 들어섰고,
외관에서 보이던 허름함보다 더 깜짝 놀란건 방 내부의 모습이었다.
분명 침대와 화장실이 딸린 평범한 호텔의 구조를 하고 있었지만,
2월의 겨울, 난방이 전혀 되지 않아 하얀 입김을 방에서 뿜어야 했고,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변기가 있던 자리라 예상되는 공간에는
변기가 아닌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친구와 나 둘다 옷을 벗을 생각도, 씻을 생각도 전혀 하지 않은 채
코트를 입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썼고,
순간 이 모든 상황의 어이없음과, 그나마 풀어진 긴장감 때문인지
허리가 끊어질듯한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밤새 하얀 입김을 뿜어대며 우리는 깔깔거렸고,
코끝이 시리다 못해 더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
새벽동이 어슴프레 뜨는 걸 보며
사요나라와 사요나라하게 되었다.
여행은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를 데려다 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중략).... 그리고 지금의 나는 또다시 어딘가로 떠나라고,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다.
- 김영하 <여행의 의미> 중에서 -
굳이 해외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서울 근교 호텔을 잡아 1박 2일 주말여행을 떠나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호텔이다.
바삭바삭한 촉감이 느껴지는 깨끗한 침구.
(바로 전까지 누군가 있었다 하더라도)
끝이 뾰족하게 접혀진 두루마리 휴지에서,
깔끔하게 말린 수건에서,
금새 풀어헤쳐질 테지만 꼭꼭 침대 안에 들어가 있는 이불까지.
폭신한 침대에 누워 부스러기를 마구 흘리며 치킨과 과자를 먹어대도
가지고 온 짐을 마구마구 풀어 헤쳐놓아도
에어컨을 빵빵하게 마구 틀어대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청소를 해야 할 의무도, 전기세를 내야 할 의무도 없이
우린 그저 그 곳의 안락함을 즐기면 된다.
눈만 뜨면 보이는 온갖 집안일들에서 해방된다는 의미이다.
그것 뿐인가.
어찌되었건 여행이라는 걸 떠나왔기에
집에 있으면 한껏 게으름을 부리며
낮잠을 자려고만 드는 신랑도
어딘가 나가야 할 거 같은 압박을 느낀다.
우리는 지금 '여행중'이므로...
맥주와 배달음식도
죄의식 없이 누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호텔에서 즐기는 일종의 낭만이양...
결국 죄의식이나 의무감에서 벗어나
안락함과 즐거움만을 즐겨야 할 거 같은
기분좋은 마음가짐이,
미래에 대한 불안도, 과거에 대한 후회도
지금 이순간만큼은 끌고 오면 안될거 같은
암묵적인 마음가짐이.
자꾸 여행을 떠나라며, 내 등을 떠밀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