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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짱 Sep 05. 2016

난중일기[낳-은중일기] 2016.9.5

병원생활했던 아기를 키운다는 것

난중일기[낳-은중일기]는 이제 막 8개월이 된 딸 단풍이를 키우고 있는 저의 육아일기입니다.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를 업신여기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으며, 매일 작은 일들까지도 일기로 적어가며 치열하게 살았던 장군님처럼 전쟁 같지만 행복하고 소중한 지금의 시간들을 매일 적어보자는 생각에서 지은 제목입니다. 육아일기에 관심이 없으시다면 조용히 지나가셔도 좋습니다. :-)




9월이라는 걸 생각하니 머릿속 어딘가에 던져두었던 중요한 기억이 떠올랐다. 단풍이의 진료가 이번달에 있다는 것. 두 번이나 가야 하는데, 문제는 하나는 날짜를 기억하는데 다른 하나는 도대체 언제인지 죽어도 기억이 안 난다는 것.


그래서 오랜만에 단풍이 의료기록을 모아놓은 상자를 꺼내 다음 진료 안내지를 애타게 찾았다. 다행히 나는 안내지를 다른 폐품과 함께 버리지 않았다. 휴! 안내지를 집어들면서, 긴박했던 날부터 퇴원하는 날까지의 기록을 담은 진료기록지 뭉치를 보니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병원에서의 기억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았다.


사실, 요즘 남편과 나는 단풍이와의 병원생활을 다시 떠올리고 되새기는 중이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참 배울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요즘, 아니 거의 늘 그래왔던 것 같지만 나는 잠시도 나와 떨어지는 걸 못 견뎌하는 단풍이 때문에 가끔씩 울컥할 때가 있다. 특히 낮잠은 무조건 아기띠에서 자려고 하는 단풍이가 왜 그렇게 원망스러운지. 아기가 잘 때 같이 낮잠을 자며 쉬라는 말은 내게 사치다. 물론 너무 피곤하니까 아기띠를 맨 채로 어딘가에 기대 앉아 쪽잠을 청해보지만, 무럭무럭 자라 벌써 9키로를 찍은 단풍이를 매달고 쉬는 건 도무지 쉬는 것 같지가 않다.


한동안 이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다른 아기들은 누워서 잘만 자는데 얘는 왜 이럴까?'

그 유명한 수면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은 탓이라 여기며 낮잠 시간에 누워재우기를 시도해봤다. 보통 자다가 깼을 때 안아주면 금방 울음을 멈추던 단풍이는 누워재운 날 낮잠에서 깨자 내가 바로 달려가 안아줬음에도 불구하고 1분 넘게 대성통곡을 했다. 다음 번 도전도 마찬가지. 근데 이 울음이 심상치 않았다. 평소 울음과는 정말 확연히 다른 소리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 머리에 지나간 장면은 바로 긴박했던 그날이었다.


태어난지 100일째 되던 날, 단풍이는 나와 세 번 연속으로 떨어져야 했다. 첫번째는 응급실에서 수액 라인을 잡아야 했을 때. 두번째는 수액 라인을 잡다가 심정지가 와서 심폐소생술을 하러 옮겨졌을 때. 세번째는 중환자실로 옮겼을 때. 특히 중환자실에서는 정해진 면회 시간을 제외하곤 나를 볼 수 없었고, 그 기간은 4일이나 되었다.

28년을 살아온 나도 그런 상황을 겪었으면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을 텐데, 태어난지 이제 백일이 갓 된 단풍이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과 공포였을까. 무엇보다 아직 엄마와 자기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시기에 엄마와 분리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그런 상황을 겪게 된 것이 원망스러웠던지 단풍이는 중환자실 면회 때마다 간호사 선생님과 주치의 선생님에게만 웃어주고 나와는 눈도 맞추지 않았다.


아마도 단풍이는 자다가 눈을 떴을 때 내가 보이지 않으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서럽게 울 리가 없다. 그때처럼 자기 옆에 엄마가 없을까봐, 또 엄마 없이 혼자 무서운 상황을 맞이할까봐 겁이 나는 것 같았다. 한달 정도면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 달을 넘긴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기억이 강렬한 모양이다.


중환자실을 나와 일반 병실로 옮겼을 때, 나는 단풍이를 무조건 아기띠에서 재웠다. 7인실에서 좀처럼 잠을 이루기 힘든 단풍이를 위해 낮밤을 가리지 않고 병원 복도행을 불사했다. 늘 복도에서 단풍이를 재우다보니 간호사 선생님들이나 주치의 선생님들이 오며가며 단풍이의 숙면 안부를 물어봤다. 나중에 재입원했을 때 만난 한 아기 엄마는 내가 아기를 재우던 모습을 기억한다면서, 흔들흔들하며 아기를 재우는 게 꼭 춤추는 것 같아서 다른 아기 엄마와 '춤추는 엄마'라는 별명을 붙여 내 얘기를 종종 했었다고 말했다. 그땐 그렇게 계속 안아주어야 단풍이 마음에 난 상처도 아물고, 몸도 더 빨리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퇴원하던 날에도 단풍이의 마음에 난 상처가 다 회복될 때까지 더 많이 안아줄 거라고 굳게 마음 먹었더랬다.


그러나 사람 마음은 얼마나 간사한가. 어느새 9키로의 무게를 견디며 멀쩡할 날이 없는 내 어깨와 허리, 다리, 발이 먼저가 되고 단풍이는 다른 아기들보다 까다롭고 키우기 힘든 아이로 내게 인식되었다.


잊을 수 없는 그날, 세상을 경험한지 고작 3달밖에 안 된 단풍이가 느꼈을 충격과 공포를 다시 한번 헤아리며, 나는 결국 좀처럼 멈추지 않는 울음과 함께 내 옷자락을 꼬집듯이 꽉 움켜쥐는 단풍이의 손을 잡고 내가 편한대로 낮잠을 재우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그 무서웠던 기억이 평생 가는 상처로 남지 않고 깨끗이 잊혀질 수만 있다면, 끊임없이 안아주는 걸로 상처의 자리가 행복한 기억들로 가득찰 수만 있다면. 그래, 다시 한번 힘내보자. 그렇게 마음먹었다.



중환자실에 단풍이를 들여보내고 나서 남편과 나는 마주앉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단풍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만 있다면 집 안 커도 되고, 비싼 육아용품 필요 없어. 우리 단풍이가 건강해지면 그런 거에 욕심내지 말고 다른 사람들 도우면서 살자."

하지만 퇴원하고 1년, 아니 고작 3달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우리 둘다 그 마음을 잊어버렸다.


환풍구가 막혀있어 매일 생기는 곰팡이를 제거해야 하는 화장실, 늘 그늘지고 어두운 거실, 곧 떨어질 것처럼 덜렁덜렁 아슬아슬한 문고리들, 낡아서 뚝 떨어져버린 싱크대 수납장 문을 볼 때마다 우리 형편상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새 집으로 이사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아직 전세 만기도 되지 않았는데(그리고 사실 외관상으로는 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 집 검색에 매달렸다. 덕분에 오빠는 안 그래도 가장이라는 무게가 만만치 않은데 더 큰 무게의 돌을 선사받았다. 머리로는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육아우울증으로 감정 컨트롤 버튼을 실종해버린 나는 그 몹쓸 짓을 멈출 수 없었고, 결국 오빠뿐 아니라 나 스스로를 더욱 절망에 빠지게 했다.


집은 쉽게 살 수가 없으니 검색에만 그쳤지만, 육아용품 쇼핑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괜찮은 장난감이나 소위 육아템이 눈에 들어오면 바로 구입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단풍이는 한번도 '엄마 난 이걸 갖고 싶어요'라고 표현한 적이 없었지만 나 혼자 '이걸 좋아하겠지, 이 장난감이 촉각 발달에 도움이 될 거야' 또는 '이건 단풍이를 위한 거야' 하며 구입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요즘 단풍이는 리모콘, 스마트폰, 과자 봉지, 물티슈, 페트병 등등 엄마가 만지고 있는 각종 생활용품을 더 좋아해서 그 수많은 장난감들이 찬밥 신세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자는 게 안쓰러워 구입한 메쉬 소재 베개는 단풍이가 잘 때 모든 베개를 거부하는 바람에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새 집에 대한 욕심과 육아용품 지름의 끝은 결국 부부싸움이었다. 그리고 엄청난 싸움 끝에 나는 겨우 병원에서의 마음가짐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번, 가난한 마음으로, 새 집과 육아용품이 단풍이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고 나니 심정지까지 오고 한달 병원 신세를 졌던 단풍이가 아직 8개월이지만 무려 돌 아기와 맞먹는 9키로로 무럭무럭 성장한 것도, 너무너무 잘 웃는 밝은 아이로 큰 것이 참 감사했다.


생각해보면 병원에서 육아하는 게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행복했었다. 넓은 집은 커녕 싱글침대만한 사이즈에 캐비넷 두 개만이 나와 단풍이의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지냈다. 장난감도 딱 몇 개만 가지고 잘만 놀았다.


그때는 무려 밤중수유를 두 번이나 하고 새벽에 단풍이가 깨면 무조건 아기띠를 하고 복도행이었지만, 밤중수유도 안 하고 깼을 때 공갈젖꼭지를 물려 토닥이면 잠드는 지금보다 불만이 없었다. 이 정도면 그때에 비해 아주 잘 자주는 건데도, 나는 요즘 단풍이가 자다가 몇 번씩 깨서 칭얼거리는 것에 엄청난 불평을 해댔다.


그러고보면 육아는 정말 환경의 문제라기보다는 주 양육자인 엄마, 즉 나의 마음에 달린 문제인 것 같다. 왠지 넓은 집이 아니면 단풍이의 세계관이 좁아질 것 같고, 깨끗하고 좋은 집이 아니면 단풍이가 건강하지 않게 자랄 것 같고, 장난감이 조금밖에 없으면 오감 발달이 잘 안 될 것 같고, 누워서 낮잠을 못 자거나 밤에 통잠을 안 자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순전히 다 내 마음 탓이다.


앞으로 단풍이가 커갈수록 더 다양한 환경 속에 놓일텐데, 벌써부터 이렇게 마음이 요동쳐서 큰일이다. 수많은 환경 속에서도 내가 마음을 지키고 서서 단풍이에게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진짜 중요한 것들을 잘 가르쳐주어야 할텐데 말이다. 그런 건 넓고 좋은 집이, 많은 장난감이, 똑 부러지는 수면교육이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닌데 왜 그런 착각을 하면서 지냈을까.



어쩌다보니 이 글을 3주만에 마무리하고 있다. 8월에 쓰기 시작했는데 9월이 되었고, 단풍이는 8개월 아기가 되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단풍이는 많이 나아졌다. 여전히 낮잠은 안겨서 자지만, 그래도 내가 어느 정도 집안일을 해도 혼자 잘 놀고 있게 되었다. 약간의 시간 동안 떨어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발전이다.


물론 나도 많이 나아졌다. 나도 모르게 욕심이 불쑥 올라올 때마다, 지금에 감사하자며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단풍이의 아기띠 낮잠이 여전히 ing이듯, 나 역시 아직 완벽하진 않다. 우리 집에 놀러온 사람들이 하염없이 내려가는 변기물과 잠기지 않는 화장실 문에 당황할 때, 종종 이 근방의 집들 사진을 둘러보긴 했으니 말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단풍이는 둘째 치고, 내가 철이 들려면 한참 멀었다. 하지만 앞으로 매일, 더 좋아질 거다. 단풍이 그리고 남편과 투닥투닥거리면서 3주라는 시간을 보내본 결과, 정말 그렇다.


비단 나만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 단풍이를 키우는 것도, 살림을 꾸리는 것도, 미래와 물질의 부족함에 대한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 세상이다. 아니, 요즘 같아서는 세상이 내 발목을 꽉 붙잡고 편하게 살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것만 같다. 남편과 앉아 집값과 살림, 육아와 교육 얘기를 하다보면 늘 농담 반 진담 반,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이민뿐인가'로 끝날 정도다.


하지만 이런 시대와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진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하루를 온전히 견디고 버티는 힘이다. 단풍이는 내일 더 좋아질 거고, 나 또한 내일 더 나아지고 철이 들 거라는 그런 작은 희망 하나 갖고 사는 게 허무맹랑한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서 내 상황이 바뀌지 않았는데 내일 더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값진 행복과 희망도 또 없을 거다. 내가 병원에서 단풍이와 참 많이 웃고 행복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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