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_ '엄마'가 설치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운영체제 위에 그냥 가볍게 설치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엄마’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새로운 운영체제였다. 내가 근 30년을 살면서 잘 구축해온 운영체제를 싹 밀어버리고 떡 하니 설치된 ’엄마‘는 나의 로그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운영체제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 운영체제를 돌릴 때 미쳐버릴 것 같았다(과격한 표현이지만 이것만큼 적당한 표현이 없다). 어찌나 무겁고 버거운지, 툭하면 버벅이기 일쑤였고 오류 메시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떠올랐다. 덕분에 내 머리는 계속 과부하가 걸려 있었고, 남편이 말만 걸어도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밥 달라, 재워달라, 기저귀를 갈아달라, 씻겨달라, 놀아달라 등등 끊임없는 처리 명령을 내렸다.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일의 주범(?)인 아이가 웃으면 그 미소가 쿨링팬처럼 과부하된 열(=화와 짜증)을 단 1초만에 식혀준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랬으니까 버텼지, 안 그랬으면 나는 진작에 과부하로 폭발해버려서 이 세상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운영체제는 휴식이 거의 없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명령들은 어마어마한 열을 뿜어가며 처리해도 밤새 이어졌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 눈 뜨면 새로운 명령이 도착해 있었다. 열심히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나는 피폐하고 넋이 나갔으며 쇠약해졌다. 정말이지, 이 운영체제로 살다가는 금방 생을 마감하겠다 싶었다. 그나마 주말에 남편이 아이를 함께 돌봐주거나 잠깐 데리고 있어주는 동안에 모든 시스템을 잠시 종료시키는 것으로 숨통이 틔였다.
다행히 죽으란 법은 없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시스템 안정화가 되어갔다. 수많은 반복학습을 거치면서 아이가 처리 명령을 퍼부어도 과부하가 걸리지 않고 처리해내는 날들이 늘어갔다.
중간에는 ‘둘째’라는, 확장판 같은 것이 출시되었는데, 신께서 재미(?)를 주시려고 했는지 첫째와는 굉장히 다른 버전이 전개되었다. 다행히 운영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아기 돌보기가 좀 수월했고, 두 아이의 처리 명령을 한번에 처리할 정도로 나의 기능이 업그레이드되었다. 더 다행인 점은 쿨링팬도 두 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두 아이가 동시에 웃거나, 동시에 달려와 안기고 뽀뽀를 퍼붓거나, 동시에 ‘엄마 사랑해’라고 고백하면 쿨링 효과가 어마어마했다.
이후 더욱 안정화가 된 나는 대학원에 진학해 엄마와 아내라는 모드 외에 학생 모드를 추가하는 업그레이드를 진행했다. 그리고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은 워킹맘 모드까지 추가되었다.
내 인생을 망가뜨릴
바이러스나 악성코드처럼 보여서
설치를 망설였던 초기와 비교하면,
‘엄마’는 오히려 내가
더 다양하고 많은 것들을
감당할 수 있게
업그레이드를 시켜준
훌륭하고 고마운 운영체제였다.
이제 막 30대 끝자락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주변에 아이를 낳으라고 직접적으로 권하고 다닌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과정만큼 인생에 좋은 것은 없다는 주의다. 나는 남편에게 요즘은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자칫 젊은 꼰대가 될 수 있다, 라며 늘 주의를 주었다.
사실 나는 얼떨결에 임신을 했고 얼떨결에 육아를 시작했다. 남편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렇게 안정적인 상태에 도달하기 전까지 몇 년간은 이따금씩 후회하는 날들이 있었다. 남편도 가장의 무게를 견디느라 힘들었겠지만, 그렇다고 경력이 단절되거나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ㅇㅇ엄마’라고만 불린다거나, 아이에게 24시간 매여있는 건 아니니까 어쩐지 나보다는 나아보였다. 아이를 좀 늦게 가졌거나 딩크로 살기를 결심했으면 인생이 덜 빡셌을 것이고, 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해본 사람으로서 나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또래들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잠시 남편처럼 젊은 꼰대(?)가 되어
말하고 싶다.
나 역시 ‘엄마’ 설치를 권장한다고.
행복하고 좋은 삶이라는 과장광고는 하지 않겠다. ‘엄마’로 산다는 것은 쉬운 길이 결코 없고, 분명히 힘들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오늘 역시 고되고 벅찼다. 그간 많이 익숙해졌어도 ‘엄마’는 여전히 비효율적인 운영체제다. 윈도우 시대에 리눅스를 쓰는 것처럼, ‘편한 길을 두고 굳이 이걸로 살아야 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삶이다.
그러나 리눅스를 개발자들이 사용하고, 생각보다 꼭 필요하며,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엄마‘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리눅스를 사용해 세상에 도움을 주는 개발자들처럼, 나는 ‘엄마’를 통해 더 나은 나 자신과 삶을 개발하고 좋은 가정을 만들어냄으로써 사회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세상 어떤 학교도, 어떤 직장도 이렇게 나를 업그레이드시킬 순 없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글로벌 인재를 꿈꾸다가 아이를 키우며 집에 처박힌 것 같았지만(1화 참고), 실은 깊은 맛이 나는 인생이 되려고 장독대 안에 갇혀 숙성되는 중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들은 이 ‘엄마’라는 비효율적인 운영체제를 돌려서 나름 얼마나 효율적인 인생으로 업그레이드되었는지에 대한 증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