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_ 할망들과의 소소한 대화 그리고 해변의 백구
게스트하우스 조식을 챙겨 먹고 세화오일장에 잠깐 구경을 다녀온 뒤 짐을 챙겼다. 즉흥 오름투어도 데려가 준 고마운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에게 장문의 방명록을 남기고 가뿐한 마음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에는 할머니 한 분과 나처럼 혼자 여행 중인 듯한 여학생 한 명이 앉아 있다. 할머니께 먼저 "안녕하세요" 인사를 드리니 인자하게 웃으시며 인사를 받아주신다.
"학생인가?"
"아니요, 직장인이에요. 일주일 휴가 받아서 제주도 여행 왔어요."
"여자 혼자 안 무서운가, 친구나 누구 둘이 같이 오지... 나는 병원 가려고 버스 기다리는 중이야... 990번이 먼저 오려나 701번이 먼저 오려나..."
시내에 나가시는 길이라 그런지 곱게 화장도 하시고 옷차림도 정갈하시다. 놓칠세라 손에 꼭 쥐고 계신 차비와 가방 안의 약봉지가 눈에 들어온다.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990번과 701번 버스가 동시에 와서 나는 990번 버스, 할머니는 701번 버스를 타며 인사를 나눴다. 서로의 안녕을 바라며.
다음 정류장에서 세화장에 다녀오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타셨고 버스가 금세 왁자지껄해진다. 계단은 높고 손에 든 짐은 많아 힘들게 버스에 오르시는 할머니의 계란을 받아 들어드렸더니 "아이고, 고맙수다" 하시며 내 옆자리에 앉으신다. 여행자의 마음가짐은 일상의 그것과는 무언가 다르다. 그 덕에 처음 보는 할머니들께 먼저 인사도 하고 짐도 들어드리고 그렇게 선뜻 마음이 움직여진다. 여행자는 그렇게 용감해진다.
"어디가우까?"
"송당리요"
"송당리? 송당리에 뭐 보러 가난?"
"아, 게스트하우스, 저 오늘 잘 숙소가 송당리여서요 짐 미리 갖다 놓고 여행하려구요"
다른 할머니들과 대화를 하시다가도 나에게 중간중간 몇 마디 건네신다. 제주도 말로 하시는 말씀을 열심히 알아듣고 또 열심히 대답했다. 버스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고 활짝 열어 놓은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모든 잡념을 날려버린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취향에 딱 맞을 법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신명나는 트로트가 큰 소리로 흘러나온다. 그저 버스를 탔을 뿐인데 약간은 시간마저 초월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송당리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려 인사를 드렸더니 여행 잘 하고 잘 올라가라며 할머니께서 손을 흔들어주신다. 게스트하우스에 배낭을 맡겨놓고 바로 길을 나섰다. 광치기 해변으로 가는 버스가 내달리는 길 양 옆으로 오름들이 펼쳐진다. 바다 못지 않은 제주 풍경의 정수는 중산간, 오름에 있다.
용눈이 오름 근처를 지날 때 버스기사 아저씨 왈,
"지금 저기 왼쪽에 있는 오름이 용눈이 오름입니다. 여자분들은 꼭 한 번 올라가보고 가세요. 여자들이 올라가면 용의 기운을 받습니다."
용의 기운을 받으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나 어제 엊그제 이틀 연속 올라갔다 왔는데... 그것도 뭔가 용의 기운이 더 셀 것 같은 밤에 올라갔다 왔는데... 망설이다 참았는데 후회된다. 물어볼 걸...
광치기 해변에 도착했는데 아침부터 바람이 많이 불더니 날이 흐리다. 바람도 엄청 불고. 약간은 실망한 채 바닷가를 거니는데 백구 한 마리가 쫄래쫄래 나를 따라온다. 활기차게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녀석이 바다 가까이 가더니 바닷물을 할짝인다. '어... 너 그거 먹으면 목만 더 마를 텐데...'싶어서 가방 안에 있던 반쯤 남은 물을 꺼내 들고 소심하게 백구를 불렀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 동물과 친숙하지 않은 나는 병에 들어있는 이 물을 얘한테 어떻게 줘야 하나, 내 손과 이 아이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지는 거에 겁을 좀 먹었지만 생수병을 기울여 조금씩 물을 쏟아내 주니 허겁지겁 금세 물 반통을 다 비워낸다. 아직 갈증이 가시지 않는지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지만 이미 물병은 텅텅 비어버렸다. 그 눈빛에 난감해진 나는 주변에 상점이 없는지 둘러봤지만 카페트럭과 귤을 파는 노점밖에 없었다.
평소같으면 그냥 말았겠지만, 쭈뼛쭈뼛 머뭇머뭇 용기를 내어 카페트럭에 가서 물어봤다.
"저기, 혹시 물은 안 파시나요?"
"물이요? 네... 팔지는 않는데 필요하시면 이거 드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마음씨 좋은 카페트럭 사장님이 물이 반쯤 들어있는 2리터 생수병을 건넨다. 내가 갖고 있던 작은 생수병에 물을 옮겨 담고 다시 바닷가로 향했다. 생수병을 꺼내 들었더니 백구가 나에게 달려온다. 물 한 통을 금세 또 다 비워낸 녀석이 이제 좀 살만한지 다시 바닷가를 뛰어다닌다. 주인은 따로 있는 걸까...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이제 나를 쫓아다니지 않는 걸 보니 갈증은 해결됐구나 싶어 발걸음을 옮겼다.
물병을 버릴 쓰레기통이 없어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해변 입구에서 천막을 쳐놓고 귤을 파시던 할머니가 여기에 버리라며 물병을 받아주신다.
"바람도 많이 부는 데 힘들게 여기서 장사하세요?"
"양로원 가서 고스톱 치는 것도 허리 아파강 못 쳐, 여기 걸어서 왔다갔다 하면서 사람 구경하는 거지"
"아하하, 그러시구나, 저 귤 오천 원어치만 주세요 할머니"
"응, 이거 하우스 밀감이야 맛있어"
귤 한 봉지를 받아 들고 아까 물을 주셨던 카페트럭에 들렀다. 자몽에이드를 시키고 기다리는 동안 트럭에 붙어있는 글을 읽어보니 나와 비슷한 (직장인의)삶을 살다가 본인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제주로 내려와 카페트럭을 하게 되었다는 청년 사장님의 이야기가 쓰여있다. 자유로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쫓겨다니는 노점상 생활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가슴 뛰는 일을 원한다면 주저하지 말라고. 당신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꽤 긴 글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하아..... 흐음.....'
생자몽을 눈 앞에서 바로 꾹 짜내서 만들어주는 자몽에이드는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