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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유나 Jul 02. 2017

계획하지 않음으로 완벽한 하루

#Day 4_ 여행 중 하루쯤은 필요한 그런 하루

여행 와서 현지인처럼 지내보겠다는 다짐은 역시나 지키기 쉽지 않았다. 3일간 전형적인 여행자의 자세로 이 곳 저 곳을 누비고 나서야 잊었던 여유를 찾고 보니 마침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온다. 방바닥을 이리저리 뒹굴거리며 비 오는 창밖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면 초록은 더 선명해지고 빗소리와 풀벌레 소리만이 들려온다. '그래_ 이런거 하자고 온거였지' 싶다. 게하 조식을 간단히 챙겨 먹고 열한 시까지 방에서 뒹굴거려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다. 여행지에서 비 오는 아침이 이 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오늘의 유일한 계획은 버스를 타지 않는 것_ 우산을 써도 바지와 신발이 다 젖을 정도로 비가 세차게 오지만 동네 산책을 나섰다. 송당리 유명 맛집 중 하나인 파스타집에 갔더니 문을 닫았다. 근처에 있는 1300K도 불은 켜져 있는데 식사를 하러 가신 건지 문이 잠겨 있고, 일단 어디로든 들어가자 싶어서 2층에 있는 에코브릿지 카페로 올라갔다. 손님은 아무도 없고 카페 주인과 그녀의 지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블렌딩 야생초차를 하나 받아들고 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소담소담 나누는 이야기 소리와 그 중 한 명이 가만가만 연주하는 기타소리와 비 오는 창밖의 풍경과 아무 계획 없이 제주 중산간 카페에 앉아있는 나_ 완벽하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음으로써 더 완벽해지는 시간이다. 여행 중 계획 없는 시간이 이렇게 완벽하기도 쉽지 않다.

비오는 날은 왠지 coffee 보다는 tea


잠깐 동안의 완벽한 시간을 누리고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무도 없는 마을길을 걸어 동네 식당으로 향했다. 또다시 신발과 바지가 흠뻑 젖고 나서야 도착한 식당에는 좀 전의 카페 사장님과 지인들이 와있었고 식당 사장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흑돼지 제육정식을 시켰다.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기까지는 안 했지만 여행자와 현지인 그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추가를 안 할래야 안 할수 없는 맛 (feat. 우도 땅콩막걸리)

창밖으로 비는 오고 동네 백반집 식당에는 BGM으로 Greatest love of all, Say you Say me, Nothings gonna change my love for you_가 흐른다. 분위기 참 절묘하다. 그 와중에 흑돼지 제육은 왜 이렇게 맛있는거냐며... 밥 추가 제육 추가에 우도 땅콩막걸리까지 나를 고고싱하게 만들었다. 제주 여행 중 가장 완벽한 한 끼였다. 역시 낮술에는 막걸리만한게 없다.(엄지 엄지 척)


얌전히 앉아서 땅콩 막걸리 한 병을 다 비우고 계산을 하니 주인 언니(레인부츠에 레이스 치마... 범상치 않은 패션 감각의 그녀)가 술이 될텐데 괜찮냐며 걱정해준다. 사실 반 병만 먹으려고 했는데... 추가한 밥과 제육에 홀짝홀짝 먹다보니 한 병을 다 비웠다.(우도 땅콩막걸리 완전 대박) 식당을 나와 숙소로 다시 돌아가는 데 올 때는 좀 무서웠던 한적한 길이 하나도 무섭지 않다. 기분이 좋고 웃음이 난다. 술기운이 이렇게 위험하고 무서운거다...


혼자서 막걸리 한 병은 많긴 많았나보다. 숙소로 돌아와 씻고 옷 갈아입자마자 낮잠에 돌입_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더니 벌써 저녁때가 다 되어있다. 어둑어둑한 시간에 또 비 맞으며 나가기는 싫어서 전 날 구비해 둔 비상식량 컵라면과 과자를 들고 게하 카페로 향했다. 노트북을 펴놓고 컵라면을 먹고 있는데 지인들과 술자리 중이던 게하 주인 부부가 같이 한 잔 하겠냐며 나를 부른다. 'Sure, why n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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