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이야기
은행 창구 직원이 약속을 하나 잡아줬다. 손님의 프로필은 20대 초반 여자, 은행계좌에 현금으로 한국돈으로 6천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이 있었다. 4천만 원 정도는 적금 (GIC)에 묶여 있었고, 2천만 원 정도는 현금계좌에 들어있었다. 여기까지가 미팅 전 내가 가진 전부의 정보였다. 직업도, 결혼 유무도, 연봉도, 투자 성향이나 경험 유무도 알지 못했다. 마치 블라인드 데이트처럼.
만남의 목적은 은행 현금 계좌에 착착 쌓여가는 돈을 어떻게 관리하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였다. 드디어 그녀와 만났다. 간단한 통성명 후, 나는 가장 궁금했던 첫 질문을 던졌다.
“무슨 일을 하나요?” 나는 이게 가장 궁금했다. 남들은 대학 다닐 나이에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걸까?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집 근처 젖소 농장에서 일해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다. 난 다시 물었다. “거기서 일한 진 얼마나 됐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으니 이제 한 5년 차 된 것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고, 최근에 시간당 페이가 올라갔는데 연봉으로 계산해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내가 대략 계산해 보니 거의 캐나다 돈 8만 불 가까이 되었고 한국 환율로 바꾸면 8천만 원이 넘는 액수였다.
이 손님은 본인의 언니가 먼저 그곳에서 일하다가 다른 직원이 그만둬서 자기가 소개받아 일하기 시작한 것이 벌써 몇 년 차 되었다고 했다. 적성에도 잘 맞고, 이젠 소 브리딩 (번식) 도 할 수 있다며 조금은 자랑스러운 말투로 나에게 설명했다. 직원이 많지는 않고 열댓 명 정도 된다고 했다.
20대 초반에 대학을 다니면, 학자금 대출이 착착 쌓여 갈 텐데 난 속으로 이 손님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모은 돈을 어떻게 관리하면 좋을지 알려면 다양한 정보가 더 필요하다.
1-2년 안에 목돈이 나갈 계획이 있는지 여부. 예를 들어 큰돈이 들어가는 결혼식을 한다거나, 버젯이 큰 여행을 계획 중이거나, 첫 집을 장만할 예정이거나 하는 이유가 있을 수 있다.
3-5년 후에 집을 사고 싶을 수도 있다.
이 손님은 집을 장만하고 싶은 욕구나 계획도, 큰돈이 들어가는 여행 또는 결혼 계획도 없었다. 만나는 사람도 없고 (언제 어떻게 생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 지금 살고 있는 부모님 집에서 독립할 계획도 없다고 했다.
지난번 글과 마찬가지로 성인이 된 자녀가, 돈도 잘 버는데 부모 집에서 독립할 계획이 없는 거다. 지난번 손님은 첫 집을 장만할 때까지 부모와 함께 살았는데, 이번 손님도 비슷한 상황인 듯했다. 외국 사람들은 자녀가 18살이 되면 바로 독립시킨다는 이야기는 이제 옛날이야기가 돼버렸다. 집값이 비싸고 전반적인 생활비가 비싸니 최대한 부모와 함께 있는 게 이득인 것이다.
현재 월급 액수, 생활비, 응급 시 3-6개월 정도의 생활비 액수 등을 고려한 후, 비과세 저축계좌 (TFSA, Tax Free Savings Account)를 열어 매달 100만 원씩 투자해 나가기로 했다. 사실 이 액수보다 더 할 수 있지만, 우선 이 정도로 시작해 보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투자해 나가면 10년, 20년, 30년 후에 얼마나 많은 돈이 쌓여 있을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몇 달 후에 다시 만나 은퇴적금을 통한 절세 방법에 대해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두 명의 초등학생을 둔 학부모로서,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대학은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보통의 엄마다. 스트레스받아가며 대학 갈 준비하고, 대학 가서도 비싼 등록금을 빚내서 다니면서 또 스트레스받으며 힘들게 졸업하고, 빚과 함께 졸업 후, 또 스트레스받으면서 어디라도 취업 하려 애쓰는 보통의 학생들과 다른 길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가고 있는 손님이 대단했다.
다음번 미팅 때는 또 어떤 계획들을 함께 세워 나갈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