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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ms Jul 29. 2020

스무 살 초입의 내가 나에게

2008년 1월, 미래의 나에게 썼던 편지

나는 이제 십 대의 문턱을 넘어 이십 대가 되는 앞에 서있습니다.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써봅니다. 내가 여기서 하려는 이야기를 아마 당신은 기억할지도 몰라요. 아, 당신이란 호칭을 어색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린 같은 존재이지만, 그러면서도 당신이나 나나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 조금은 달라졌기를 기대하고 있을 거예요.


12월 말이었을까. 뉴스에서는 오늘 밤, 별의 비가 내린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는지. 2년 전쯤인가 친구들과 계곡에 놀러 갔다가, 물에 발을 담그고 누워서 별이 흔들리도록 목청껏 노래를 불렀더니 정말 별이 떨어졌지요. 그날이 페르세우스 유성우의 극대일 이었다던가요. 우린 그런 건 전혀 모르고 그곳에 갔고, 더군다나 그 날 낮에는 소나기가 내려 구름도 먼지도 쓸어갔으니 우린 정말 운이 좋은 셈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그 일 이후로 나와 친구 녀석들은 유성우와 특별한 인연이 생겼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품고 자정이 넘어서 모인 녀석들은 정과 한이었어요. 우린 우선 정이 사는 동네로 갔습니다. 그곳엔 이제 완공 단계인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쪽은 길도 새로 난 것이었어요.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고 가로등도 그냥 잠들어 있었지요. 두꺼운 파카를 입고도 몸이 덜덜 떨리는 날씨인데 우린 그냥 아스팔트 위에 벌렁 누워버렸습니다. 하늘로 맺히는 우리 입김에 별은 촉촉하게 젖은 것처럼 점점 뚜렷이 다가왔습니다. 첫 유성을 누가 발견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그땐 너 나할 것 없이 와아, 저기! 하며 소리쳤을 것입니다.


시간은 듬성듬성 떠있던 구름마저 밀고 가버리고. 아파트 철골 사이로 구조물 사이로 가끔씩 별똥별이 꼬리를 끌었습니다. 정말 비처럼 우수수 내리는 게 아니라 어디 처마나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처럼 시간을 두고 또옥, 또옥 떨어졌어요. 우리는 냉골 바닥에 몸을 떨면서 한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밤하늘, 그 시간의 여백을 지난 기억으로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나눴던 수많은 대화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떠오르는 대로 적어볼게요. 우린 먼저 첫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단히 슬프고 우울한 얘기는 아니었어요. 어차피 사람의 맘이며 그로 인한 관계라는 게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 예측할 수 있나요. 정이 말했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어느 쪽에서든 다른 존재가 끼어들게 마련이잖아. 나중에 무엇이 제일로 소중했는지 알면 된 거야.


우리는 이제 겨우 이십 년도 안 살았지만 그래도 수많은 사람이 스쳐갔습니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다가 그냥 사라져 버린 맘도 있고 가슴 깊숙한 곳을 스쳐 지나간 인연도 있었어요. 나는 내가 어수룩한 십 대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버린 마음 중에 잡으려고 손이라도 뻗었던 것들이 어른의 눈에서 보면 아무 가치 없는 것으로 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린 그걸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제 십 대의 끝자락에서 가장 중요했고 끝까지 간직하고 싶은 존재가 누구였는지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러고 보니 곧 우리가 가게 될 대학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네요. 원서를 쓰겠다고 하루 종일 교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대학 이름과 점수 사이만 왔다 갔다 하고 나서 갈 곳을 결정하고, 이름도 적고 도장도 찍고 했었지요. 나는 원서를 다 작성하고 나서도 정체모를 계약서에 서명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으로 한동안 뚫어지게 붉은 도장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냥 점수에 맞춰서 대학을 정하고 학과를 정했습니다. 꿈이라는 게 갑자기 멀어진 느낌이었어요. 글을 쓰고 싶었던 나는 경영학을 공부해야 했고 정은 생물학 원서를 읽게 되었어요.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아직 모르겠다던 한은 나와 마찬가지로 가장 무난한 경영학과를 택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한은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사실 그냥 무덤덤했습니다. 글을 쓰는 일 따위는 꼭 어릴 적에 대통령이니 세계 정복이니 거창한 꿈을 이야기했다가 머리가 자라면서 금방 잊는 것처럼, 철없던 시절에 잠깐 만져본 뜬구름으로 느껴졌습니다.


나였는지, 아니면 친구 두 녀석 중 어느 한 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먼저 헤어지기 싫다고 말했어요. 별의 비는 서서히 멎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실 그저 평범했습니다. 학교에 가고, 같이 공부하다가 때론 땡땡이도 치고, 점심도 거르고 운동을 하고, 주말엔 다 같이 몰려다녔고요. 평소와 다른 것들이라고 해봤자 가끔 몰래 모여 술을 마시거나 교장선생님께 졸라서 보충수업을 빼먹고 농구대회 연습을 했거나. 기껏해야 일상이라는 그림 위에 붓으로 몇 번 덧칠한 수준일 뿐이었는데. 다음 날이면 무채색의 날이 밝았고 우리는 언제나와 같은 하루를 보내며 별다른 설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무 일 없는 그런 보통날들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삶은 흔히 말하는 캠퍼스의 낭만일 수도 있겠지만, 밤하늘에 별이 저렇게 떨어져도 주변의 모든 것들은 미동조차 없던데요. 이제 시작하는 우리는 적어도 서로의 자리는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두런두런 그 밤도 흘러가고 별에 젖은 우리들도 흘러가고, 어느새 12월이 지나 또 다른 해가 시작되면서 이십대라는 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왔습니다. 봄은 오래전에 왔는데 화분에 꽃이 피고 나서야 아 정말 봄이구나 생각하는 것처럼, 자고 일어나면 간밤에 꾼 꿈을 생각하듯이 추억이라고 이름 붙인 기억 속의 장면과 장면, 그 사진들을 떠올릴 때에만 나는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그날 밤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이제 막 진정한 인생이 시작될 것 같았던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아파트가 숙연하게 내려다보는 아래서 우린 소원조차 빌지 않고 막연한 스무살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어느 불 탄 자리에 홀로 서게 될 우리를 안쓰러워했어요. 별에 흠뻑 젖은 몸을 이끌며 헤어질 땐 괜스레 어디 멀리라도 가는 것처럼 손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그 날 우리가 본 별들은 전부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가 그날까지 꼭 쥐고 있던 별들은 작별의 손을 흔들면서 어디론가 흩어졌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눈 밑이나 손톱 밑이나 이마에 남은 하나쯤 찾아낼 것입니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이 편지는 당신이 받는 거예요. 당신은 우리의 별을 찾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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