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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ums Jan 24. 2022

지문의 희미한 사람이라

내 손끝에 대한 유난스러운 의미 부여

열차는 아침보다 먼저 조치원에 도착했다. 2021년 1월 2일이었다. 나는 열차의 안내 방송을 듣고 눈안개 같은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 밖 승강장은 타고 내리는 사람 없이 텅 비어있었고 군데군데 쌓인 눈만 바로 어제, 그러니까 아마 새해라고 제법 부산스러웠을 하루의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나는 몸을 의자 깊숙이 더 밀어 넣고 계획보다 하루 늦어진 고향행에 대해 생각했다. 잘 한 일인 것 같다. 하루 늦어서 잘했다는 게 아니라 어쨌든 가겠다고 마음먹은 것만으로 잘 한 일인 것 같다.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즈음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작년으로부터 가져온 마음의 짐을 풀어보았다. 그 안에는 일 년 새에 회사를 두 번이나 그만둔 일이나, 도망치기만 한다는 낙인, 하나도 괜찮아지지 않은 마음 그리고 그 핑계로 입 밖으로 뱉은 모진 말, 불편해진 관계들, 지키지 못한 약속과 같이 쓸데없이 손만 무겁게 하는 잡동사니들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예전 기억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생각을 멈추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많았다. 조치원까지 온 시간 딱 그만큼 더 달려야 목적지에 도착한다.


아무래도 나는 사람들 속에 내 존재를 새기는 일에는 태생적으로 서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테면 나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는 지문부터가 희미하다. 어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손가락 지문의 골이 깊지 않다. 손바닥 피부도 보통 남자들처럼 두껍고 질긴 느낌이 아니라 갓 목욕을 하고 나온 것처럼 울긋불긋 핏기가 어른거리고 잔손금이 많이 보인다. 당연히 지문이 닳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거나 고생을 해서는 아니고 아마도 손바닥에 땀이 흥건한 다한증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어쨌든 그래서 곤란한 경험이 많았는데 그 처음은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였다. 그때는 손가락에 잉크를 묻혀서 지문을 채취했다. 하지만 매우 희미한 내 지문 때문에 몇 번 다시 찍는 과정에서 손바닥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휴지로 닦고, 찍고, 닦고, 찍고, 바람에 말려도 보고, 왼손 한 번 오른손 한 번에 손가락을 바꿔도 보는 등 발가락을 꺼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모든 걸 한 뒤에 결국 읍사무소는 나를 포기하고 경찰서로 보냈다. 경찰서에서는 어떻게 지문을 채취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 지문은 친구들처럼 깔끔하게 찍히지는 않았다는 것과, 경찰관 아저씨가 “너는 나쁜 짓 하지마라.”고 웃으며 말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회사를 다닐 때에는 지문인식 도어락이 말썽이었다. 어찌어찌 등록한 지문의 인식률은 육십 퍼센트 남짓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 지문으로 출입문이 열릴 확률은 그보다 훨씬 낮았다. 평소에는 나보다 먼저 온 누군가가 도어락을 해제해두어 그냥 들어갈 수 있었지만 일이 있어 회사에 일찍 출근했던 날이 문제였다. 나는 서른 번 가까이 각도를 바꿔가며 엄지 손가락을 가져다 댔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를 사고, 음악을 들으며 담배 한 대 피우고 그러고도 30분 넘게 계단에 앉아 기다린 후에야 나를 도와줄 사람이 출근을 했다. 그는 조금 놀란 것 같았다. “아니, OO 씨, 왜 안 들어가고 있어요?”, “지문인식이 안 되네요.” 회사에 오래 다닌 동료는 서랍을 한참 뒤적여서 비상용 출입 토큰을 찾아주었다. 그날부터 토큰이 내 지문을 대신해 나라는 사람이 몇 시에 출근을 했고 몇 시에 퇴근을 했는지 기록해주었다.


하지만 그 회사를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나는 동료들과 다 같이 점심을 먹은 뒤 남은 시간에는 꼭 회사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가슴이 뛰고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들 속에 있는 게 유독 더 힘든 날에는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점심을 먹지 않았고, 거의 매일 회사 뒤 골목길을 빙글빙글 걸어 다녔다. 늘 보는 같은 풍경 전부를 좋아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이 살지 않는 갈색 벽돌의 주택을 바라볼 때가 많았다. 큰길 반대편으로 나와 처음 만나는 오르막길에서 다섯 걸음쯤 걸어 오른쪽을 보면 담벼락이 있고 그 안으로 폐허가 된 주택이 보였다. 유리가 전부 깨진 2층짜리 주택의 옥상에는 장롱이나 서랍장, 냉장고와 같이 다 부서진 가구가 탑처럼 쌓여있었다. 그리고 폐가구의 산 꼭대기에 서울타워가 우뚝 솟아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해서 가끔 속이 울렁거리고 자리를 지키기 어려워질 때마다 그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쉬곤 했다.


마지막으로 출근하던 날 나는 진작에 인수인계를 마치고 딱히 바쁜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책상에는 컴퓨터와 후임자에게 넘길 서류가 담긴 봉투가 전부였다. 회사에 정 붙일 틈조차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럴 자신이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책상에는 내 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냥 동전 크기의 토큰 하나 반납하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깔끔하게 정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얼결에 토큰을 반납하지 못했고 결국 나중에 우편으로 보내야만 했다. 손바닥 크기의 박스에 토큰과 함께 동료들이 좋아했던 과자를 같이 넣어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야겠다는 마음은 분명히 먹었던 것 같다. 아마 당시의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나 인사치레 또는 우습게도 그들에게 좋은 기억이길 바라는 마음 따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토큰은 아마 곧장 회사의 서랍 깊은 곳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나는 나를 증명할 장소도 방법도 없어진 채로 밤이 되면 눈이 감기듯 그 해의 끝자락까지 가라앉았다.


이후 프리랜서인지 아르바이트인지 모르게 짧은 시간 일하기도 하고 운 좋게 나름 유망하다는 회사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끝은 항상 좋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병원과 상담센터를 다니고,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다시 병원과 상담센터를 다니는 일련의 과정으로 3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버렸다. 거의 반년만에 만난 의사는 "약 꾸준히 드셔야 하는데 왜 안 오셨어요?"라고 물었고 나는 "회사에 다니느라 바빠서요. 이젠 안 다녀요."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병원에 갈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회사에 잘 다니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스스로 답을 내린 것도 사실이었다. 출근하자마자 한 번, 오후에 한 번, 자기 전에 한 번 약을 먹어가면서 회사에 다니는 것 자체가 나약하고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어쨌든 내가 그만둔 회사들은 내가 떠난 뒤로도 작은 공백조차 없이 잘 돌아갔던 것 같다. 나는 정말로 지문이 희미한 사람이었다.


그즈음부터 나는 마음이 불편하다는 얘기를 종종 하고 다녔다. "왜 또래들처럼 인생의 계단을 오르지 못하니?"라고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나는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내게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먼저 우울하고 불안해서 뭐든 잘 해내기 힘들다는 말을 비상용 출입 토큰처럼 사용했다. 언젠가는 회수당할 것을 알면서.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어 얼른 눈을 떴다. 열차는 이미 고향의 익숙한 풍경을 지나고 있었다. 창문에 입김을 후 불고, 지문이 희미한 손끝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짧은 선을 그려보았다. 손가락 두께의 투명한 선 안으로 눈 덮인 세상의 풍경이 지나갔다. 마치 시간이 선 안에서 흐르는 것처럼 - 곧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객실의 몇몇 사람들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고 선 안의 세상이 조금씩 천천히 흐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들 딱 자기가 그린 선만큼의 세상만 보고 살 텐데, 나는 그동안 어떤 선을 그리고 보면서 살아왔을까.


열차가 멈추고 나는 오랜 짐을 챙겨 선 안의 세상으로 걸어 나갔다. 민둥맨둥한 손끝에는 아직 찬 기운이 남은, 남보다 하루 늦게 맞이한 2021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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