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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Jan 26. 2023

왜 밤 9시에 회의를 잡으시나요, 고객님

해외 법인하고 오늘 밤 9시에 컨콜(컨퍼런스콜) 하기로 했어요.


늦은 시각인데 괜찮느냐는 말 한마디도 없이 회의 시각을 통보했다. 고객님께서. 잡아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마음대로 회의를 잡더니 참석하란다. 본인들은 칼퇴하시고 우리는 사무실에 남아서 화상회의를 기다렸다.


일이 많아서 나머지 일을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일정에는 화가 좀 난다. 뉴비니까 오늘은 잠자코 있었는데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다. 요즘 속으로만 생각한다고 하는데 자꾸 입밖으로 말을 꺼내는 일이 잦아져서.


갑과 을이 회의를 할 때는 자연스럽게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그 미묘한 권력의 차이는 을만이 감지할 수 있다. 아마 갑은 너무 사소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이런 거. 갑은 회의 중에 다른 업무 전화가 오면 그 자리에서 받아서 통화를 한다. 그리고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반존대말을 한다. 회의 중에 마스크를 내리고 이야기한다.(마스크 무용론이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을은 먼저 마스크를 내리고 말하진 않는다) 회의 시간에 5-10분 정도 늦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한다. 을은 회의를 녹음하지만 갑은 안 한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말해놓고 아니면 말고다. 그렇지만 을은 고객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니 한 마디라도 놓칠새라 회의록을 쓰고, 녹음도 한다.


업무적으로 지적하고 비판하는거야 응당 그래야 하는 것이니 괜찮다. 그러나 이처럼 태도와 관련된 것들은 숨쉬듯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권력의 차이이고, 대놓고 지적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화가 난다거나 갑질을 당해 억울하다기 보다는, 이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좀 흥미롭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나도 갑의 입장에 있을 때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아마 나도 지금 우리 고객들처럼 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돈 주고 업체 쓰는 거니 일 시키는 건 좋은데 인간적인 예의는 좀 지켜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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