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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Sep 28. 2023

하루키는 그대로다. 변한 것은 나야.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10대의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또래의 여자 아이와 첫사랑을 한다. 여자 아이는 늘 신비롭고 베일에 싸여있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그리워하며 오랜 시간을 묵묵하게 보낸다. 하루키는 많은 장편소설을 썼는데, 그중 대다수가 이런 스토리다. 10대의 남자. 알쏭달쏭한 그녀, 그녀의 상실, 그 후의 성인이 되어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벌어지는 이야기들.


무라카미 하루키가 발표한 장편소설 15개를 모두 읽었다. 지금도 집에 장편소설 대부분이 있다. 한두 작품 정도만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던 것 같다. 20대 초중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 푹 빠졌었다. 그때 나름 유행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쿨함' 같은 게 마음에 들었다. 독신의 정돈된 삶, 저녁에 나 혼자 즐기는 위스키, 재즈 음악 같은 것들. 그의 소설에는 구질구질하고 지긋지긋한 현실 얘기는 없다.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 만에 신작이 나온다고 해서 조금은 설렜다. 사실 크게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기사단장 죽이기에 별다른 감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날 정도.) 어느 순간부터 그의 소설들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인공 이름만 바뀔 뿐 전체적인 세계관은 비슷하다. 물론 이번 작품도 그랬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도 한치의 틀림없이 딱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같다. 기존 이야기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건 없다.



9월 6일에 신작이 출시되자마자 리디에서 전자책을 다운로드하여 읽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독서에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다면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중 처음으로 전자책으로 봤다는 거. 리디페이퍼 4를 중고로 샀는데 아주 잘 쓰고 있다. 눈이 피로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가지고 다니며 읽기 참 좋다. 앞으로 종이책은 사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집에 있는 책들도 하나씩 처분하려 생각 중이다.


출시 첫날 호기롭게 다운로드한 것 치고는 끝까지 읽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20일 정도 걸린 것 같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읽은 게 전부라 그럴 수도 있지만, 정말 재미있었다면 주말에 몰아서라도 다 봤을 텐데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초반에는 늘 그러하듯 너무 비슷한 얘기라 식상함이 들어 진도가 잘 안 나갔다. 10대 후반의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 그리고 그녀가 떠났다는 이야기. 내가 이제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인지 더 이상 그런 얘기에 흥미가 들지도 않고 와닿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소설 중반부 이후에 등장하는 삼십 대 중반 여자와의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게 잘 읽혔다. 미칠듯한 감정의 동요는 없지만 서로의 선을 지키면서 약간의 설렘을 가지고 있는 관계. 그러고 보면 변한 것은 작가가 아니라 나다. 작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소설을 썼지만, 내가 성장하면서 흥미를 느끼는 지점이 달라진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이런 느낌을 받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은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었다. 이 작품은 이례적으로 중년 남자가 아주 현실적인 삶을 사는 얘기가 나온다. 물론 다른 작품에서도 중년 남자가 등장하지만 소설가, 도서관 관장, 학원 강사와 같이 독립적인 직업을 가지고 독신의 삶을 살아가는 얘기가 주를 이룬다. 반면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는 현실적인 상황들이 등장한다. 건설회사 사장인 장인이 나오고, 결혼 생활에서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하루키 소설 치고는 드물게 현실 세계의 얘기가 많이 나와서 재밌게 읽었다.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무라카미 하루키는 책 말미에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말을 빌려 이런 글을 썼다.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


그렇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소설을 쓸 것이고 나는 아마도 그 책을 읽을 것이다. 매번 비슷하게 느껴지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읽는 동안 즐거움이 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현실에서 조금 동떨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의 소설이 관통하는 주제는 하나다. 이 세계와 저 세계, 현실과 환상, 본체와 그림자,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된 개념이 실은 하나라는 메시지다. 비현실적인 듯 보이는 그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어쩌면 내 삶도 '이 세계'가 아닌 '저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보게 되고, 내 삶을 제3자의 눈으로 관조하며 조금은 편안해지는 느낌도 있다. 내가 속한 이 현실에 100% 몰입하지 않게 만든다고 해야 하나. 최근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때 출퇴근 길에 짬짬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그 짧은 5분, 10분간 잠시나마 현실로부터 도피한 느낌이라 좋았다.


앞으로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비슷한 소설을 쓸 것이고, 나는 기시감에 불평하면서도 계속해서 읽을 것이다. 그의 소설이 가진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70세가 넘은 지금도 현역으로 소설을 써주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동안 읽은 하루키의 장편소설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9)

1973년의 핀볼 (1980)

양을 쫓는 모험 (1982)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985)

노르웨이의 숲(1987)  

댄스 댄스 댄스 (1988)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1992)

태엽 감는 새 (1994)

스푸트니크의 연인 (1999)

해변의 카프카 (2002)

어둠의 저편 (원제: After Dark) (2004)

1Q84 (2009)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2013)  

기사단장 죽이기 (2017)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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