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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면 편해

by 일곱시의 베이글

지난주 금요일 밤 12시에 퇴근을 하고 주말 이틀간 출근을 했다. 토요일은 밤 11시에, 일요일엔 5시 반에 퇴근을 했다. 대중교통으로 가면 편도 2시간이라 주말에는 운전을 해서 갔다. 자차로 가니 1시간이면 도착했다. 회사 근처 당일 주차권이 저렴한 곳을 찾아 이틀간 이용했다.


중간보고 준비가 난항을 겪고 있다. 홈페이지 리뉴얼을 하기 위해 현황 진단과 향후 방향성에 대한 내용을 보고서로 만들고 있는데, 지난주 스토리라인을 공유했더니 현황에 숫자가 빠져있다는 피드백이 돌아왔다. 현재 당사의 수준을 벤치마크를 포함해 숫자 위주로 채워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트래픽 분석 담당인 내가 많은 숫자들을 채웠다. 벤치마크도 해달라고 해서 웹 트래픽을 비교해 주는 사이트도 199달러 주고 결제해 해외 선진사들과 비교하는 숫자도 넣었다.


고객사는 벤치마크 숫자를 통해 '국내에서는 압도적인 1등이고, 글로벌로 보면 해외 선도사들보다는 조금 못 미치지만 이번 리뉴얼을 통해 근접한 수준으로 나아가겠다'는 메시지를 뽑고 싶어 했다. 그런데 벤치마크 사이트를 돌려보니 국내에서도 경쟁사의 트래픽이 훨씬 높게 나타났다. 이 숫자를 들고 가면 논란이 많이 되겠구나 싶었다. 더욱이 내부에서 보는 Google Analytics 숫자와 벤치마크 데이터 사이에 차이가 있으니, 분명 벤치마크 사이트 데이터가 맞는 거냐는 물음이 돌아올 것 같았다. 우리 팀에도 이런 우려를 여러 번 표시했는데, 해당 수치는 팩트이니 우선 넣고 그다음에 생각해 보자고 결론이 났다.


일요일 밤에 중간보고 작업본을 고객에게 공유하고 월요일 낮 리뷰 세션이 있었다. 역시나 벤치마크 숫자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해외사들과 근접한 수준으로 가자는 메시지를 뽑으려고 현황을 보자 했는데, 벤치마크를 돌려 보니 국내사에도 밀리는 걸로 나오자 현황 분석 부분은 빼버리자고 했다. 숫자를 다 빼고 나면 현황 분석에 남는 게 없었다. 텅 빈 보고서가 되니 뭔가 내용을 더 채워 넣어야 했고, 수요일 오전까지 다시 자료를 보완해야 했다.


화요일은 대선일이라 임시공휴일인데 쉴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했다. 희망을 품었다 좌절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이제 아예 포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중간보고 디데이까지는 매일 밤 12시에 집에 간다고 스스로 되뇌며 오늘 아침 출근을 했다. 이제 웃음도 거의 안 나왔다. 어젯밤 7시간 30분이나 잤음에도 여전히 몸은 피곤했다. 눈이 계속 감기고 무기력하며 약간은 탈진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피엠이 나는 내일 나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맡은 트래픽 분석 장표가 다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 오늘 집에 일찍 가고 내일도 웬만하면 쉬라고 했다. 혹시나 지원이 필요하면 오늘 밤에 카톡 할 테니 내일 나오라고. 그다음 얘기는 들리지 않았고 내일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뛸 듯 기뻤다. 다만 다른 팀원들은 나와야 하니 기분 좋은 내색은 않고 있었다. 팀원들에겐 너무 미안했지만 나라도 살고 보자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런 혹독한 생활을 이어가다 보면 생기는 문제가 있다. 내 몸이 피곤한 건 둘째 치고, 세상 모든 일에 무관심해지고, 시니컬해진다. 단톡방 친구들의 대화에 기계적으로 리액션을 하지만 그다지 집중하지 않게 되었고, 국가 중대사인 대선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수많은 단톡방에서 대선 후보와 토론회 관련 링크들이 쏟아졌지만 단한개도 눌러보지 않았다. 일 이외의 모든 관심사와 욕구는 제거된 채 껍데기만 사무실로 오가고 있다. 내 딸이 깨있는 모습을 하루에 10분도 못 보고 있는데 그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까?


충동적인 소비는 늘어난다. 돈 쓸 시간이 없으니 갑자기 뭔가에 꽂히면 출퇴근에 홀린듯 결제를 한다.(32인치 모니터 45만원) 원래는 퇴근할 때만 택시를 탔는데 지난 주엔 출근할 때도 탔다. 퇴근 택시비 6만원, 출근 택시비 4만원. 하루 10만원을 허공에 던지며 산다. 그러면서 스스로 이렇게 되뇌인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단 하나, 가족과 함께할 시간뿐인데 그것을 돈으로 살수 있다면 기꺼이 지불하겠다고. 하루 4시간의 통근시간을 2시간 이내로 줄일 수 있다면 나는 그러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 근본적인 질문도 던져본다. 이게 내가 원했던 삶인가? 지금만 버티면 상황이 나아질까?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저 내일 쉬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처지가 되었다. 타인의 불행을 지렛대 삼아 내 상황을 위로해 보려는 시도도 한다. 나보다 더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에 비하면 나는 나은 거라고 애써 위안을 삼는다. 나쁜 일이란 거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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