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프로젝트가 홈페이지 전략 구축이라는 얘길 들었을 때 큰 감흥이 없었다. 전략이 뭐 별거냐, 결국 일이라는 건 다 똑같지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 그렇지 않았다. 세계관 자체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이 간극을 이해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번 프로젝트가 왜 유독 이렇게 힘든지 혼자 오랜 시간 고민을 했었는데, 전략 업무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 회사 생활을 하며 늘 시키는 일은 잘했다. 내가 가진 강점은 과제가 주어지면 리서치를 하고, 보기 좋게 잘 정리해서 보고하는 일이었다. 그게 지금껏 현업 해서 일해온 방식이고, 지난 3년간 해온 오퍼레이션 컨설팅의 방식이었다.
오퍼레이션 컨설팅이 고객사가 낸 문제를 잘 푸는 과정이라면, 전략 컨설팅은 문제를 내는 출제자가 되는 것이었다.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득하고, 의사결정의 판단 구조를 설계해야 했다. 홈페이지 운영 관련 업무라고 한다면, 그간 해왔던 일은 트래픽을 분석해서 고객들이 어떤 제품/콘텐츠에 관심이 있는지 도출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회사 홈페이지를 '왜' 운영해야 하는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사업부가 독립 사이트를 운영한다면 어떤 요건들을 갖춰야 하는지 기준을 만드는 일이었다. 홈페이지 트래픽을 어떻게 재무적 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가? 방문객 1명은 얼마의 가치가 있을까? 리드 1건은 얼마의 가치가 있을까?
이러한 관점의 전환이 쉽지 않았다. 이제 내게 필요한 건 위에서부터 아래로 생각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동안은 리서치를 통해 자료를 긁어모아서 그 안에서 답을 뽑는 것이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판을 짜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런 일들은 대개 관념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아 힘들었다.
그동안 일해온 방식을 깨부수어야 했다. 데이터를 더 파보는 대신 전체를 보기 위한 생각을 해야 했다. 메시지 중심으로 장표를 만들기 위해 주제 덩어리를 슬라이드에 배치시키는 연습을 했다. 생각하기 싫어질 때면 우선 장표를 쓰면서 보완해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잘 아는 것부터 상세하게 쓰고 하기 싫은 일은 뒤로 미뤄두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되었다. 계속 생각하고, 논리를 만들고, 그 논리의 허점을 스스로 찾아내서 보완해 가며 메시지를 만들어야 했다.
장표를 쓰는 방식도 바뀌었다. 그동안은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으려 했었다. 숙제 검사 하는 선생님에게 "나 이렇게 많이 했어요"라고 보여주듯 리서치한 내용을 꾹꾹 눌러 담으려 했었다. 하지만 그런 욕심을 부릴수록 메시지는 희미해지고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장표는 메시지를 잘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했다. 원 페이지, 원 메시지. 한 장에는 하나의 메시지만 담는다. 그 밖의 세부 정보들은 주석이나 별첨 장표로 모두 빠졌다. 그동안의 자료는 실무자를 위해 만들었기에 디테일이 중요했다면, 전략 컨설팅의 장표는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돕기 위한 것이므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달라야 했다.
단적으로는 폰트 크기부터 달랐다. 그동안은 12포인트를 쓰면서 가끔 10포인트도 쓰고, 작은 보조 문구나 표 안에 들어가는 글자는 8-9포인트까지 쓰기도 했는데 이제는 절대 금지! PM은 12포인트 밑으로 절대 내리지 말라고 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크게 크게 메시지를 쓰고 불필요한 내용은 과감하게 덜어내는 연습을 하고 나니 조금씩 가능해졌다. 텍스트를 덜어내니 메시지가 선명해졌다. 채우기가 아닌 덜어내기의 연습이 필요했다.
이렇게 3개월 정도 욕먹고 구르다 보니 이제 조금은 적응이 된 것 같다. 이제 업무 지시를 받으면 무작정 장표를 쓰기 시작하는 게 아니라 노트를 꺼내서 샤프로 먼저 장표 구조를 짜본다. 생각의 덩어리들을 배치하고 어떤 내용을 담을지 판을 짠 다음 내용은 나중에 넣는다. 디테일에 집착하지 않고 큰 그림을 먼저 본다. 물론 세부적인 내용을 리서치해야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한정된 리소스를 분배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나무보다는 숲에 더 많은 시간을 쏟는 것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