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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애 Sep 07. 2022

나의 작은 어항 속 커다란 세상

0. 프롤로그


 나의 작은 어항 속 커다란 세상

사진 출처 : 픽사 베이


나에게는 소소한 트라우마가 하나 있었다. 그 트라우마의 시작은 작고 아름다운 열대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 동그란 어항 속에 길렀던 분홍색 물고기는 어느 순간부터 바닥에 가라앉았고, 다시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미국의 속담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Only dead fish go with the flow.


죽은 물고기만이 흐름을 따라간다.

사진출처 : 픽사 베이


 즉, 죽은 물고기는 물살을 가르지 못하고, 오로지 물살에 휩쓸릴 뿐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작은 어항에는 물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기에, 내가 기르던 물고기는 그저 바닥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그 물고기의 죽음이 내게는 충격적인 하나의 장면처럼 남았다. 형태조차 온전치 않은 채로 몸의 곳곳이 문드러져 있던 그 물고기는 영롱한 눈빛마저 잃은 상태였다. 그 열대어의 종류도 또렷이 기억한다. 바로 '컬러 테트라'였다.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닌데도, 아쿠아리움 같은 곳에 가면 어째서인지 그 물고기의 죽음이 떠올랐다.



'그래, 나도 키웠었지만 결국 죽었지.'



 마치 잔인한 영화의 한 장면을 스크린 캡처해서 유사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빔 프로젝트로 공중에 쏘는 기분이었다. 그 작은 생명조차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죽어있는 물고기의 형태가 너무 괴기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식물도 키워보고, 새도 키워보았지만 유독 열대어만큼은 다시 도전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느 대형마트의 꼭대기 층에서 단체로 유영하는 물고기를 발견했다. 어린 시절 내게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던 컬러 테트라도 있었다. 색깔이 영롱한 컬러 테트라는 마트의 인기 아이돌 중 하나였다.



 "어떻게... 키우면 될까요?"



 뜰채로 물고기를 뜨고 있던 마트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내가 열대어를 죽게 만들었던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던 게 아닐까. 나는 그 열대어를 '어떻게 키우면 되는지' 몰랐던 것이다. 어린 생각으로 그저 '물고기니까 물속에만 들어가 있으면 되겠지, 밥만 주면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곳에는 생태계가 있고, 그렇다면 '어떻게(HOW)'에 대해서 고민했어야 했던 것이다. 나의 질문에 마트 직원은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답했다.



 "아가씨는 정말 잘 키울 것 같네요."



 이것이 바로, 내가 작은 어항 속 큰 세상을 만나게 된 시작이다. 사실 이 세상 사람들의 대다수가 열대어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고민만으로 바쁘다. 당장 현실을, 내일을 어떻게 살아내면 좋을지 몰라서 쩔쩔매는 중인데 한가롭게 열대어 타령이나 한다니. 내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열대어 이야기 좀 들어보실래요?'라고 해 봤자, 나를 열대어를 신봉하는 신종 사이비 정도로만 여기고 무시할 게 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유유자적한 어항 속 작은 세상이 생각보다 우리 인간세상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위에서 말한 미국 속담은 사실 우리네 인간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나 또한 죽은 물고기처럼 흐름을 따라 휩쓸려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삶을 좀 살아보니 '죽음'이라는 것은 비단 생명이 끊어진 상황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육신이 죽으면 결국 정신은 따라 죽지만, 정신이 죽어도 육신은 움직일 수 있다는 걸 구분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가 지정한 시간에 맞춰 출근을 하고, 누군가가 지정한 일들을 숨 돌릴 틈도 없이 처리하고,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온전한 내 시간, 내 생각 같은 건 없이 눈을 감고 다음 날을 맞았다. 그렇게 똑같은 챗바퀴를 매일 반복했다. 나의 영혼은 죽어있고, 오로지 일하는 몸뚱이만 살아있었다. 회사의 프로세스를 이해할 수준의 정신만 간신히 돌아가고 있었다. 회사는 매일 거대한 물살을 일으키지만, 나는 매번 그 물살에 휩쓸리기만 할 뿐, 내 인생의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나는 바닥에 가라앉은 물고기처럼 될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살아있는 물고기가 되기로 결심했고, 회사를 박차고 나와 다시 글을 쓰는 자리로 돌아왔다. 물론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 모두를 죽은 물고기로 치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는 나 자신의 영혼이 살아 숨 쉬는 방향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죽은 물고기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글이 '죽은 물고기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결정적인 심폐소생은 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물살에 휩쓸려 가지는 않도록, 하나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위에서 미국 속담이 나왔으니 이번에는 한국 속담으로 이 프롤로그를 마무리해보도록 하겠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이 속담은 '물의 깊이는 측량하기 쉬우나 사람의 마음은 그 속을 측량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조들도 사람의 마음만큼은 알기 쉽지 않았나 보다. 그토록 한 길 사람 속을 알기 어렵다면, 내가 만난 열 길 물속을 먼저 소개해보고 싶다. 인간세상과 흡사한 물속 세상. 어쩌면 열 길 물속을 먼저 아는 것이, 한 길 사람 속을 이해하는 데 가까워지는 방법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작은 어항 속 커다란 세상.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이 책을 읽는 인간 세상 사람들도 조금은 치유를 받기를 소망한다.

사진 출처 :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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