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매드랜드', 길에서 쓴 연대의 시
Intro
노매드랜드는 경제 대침체의 여파로 RV카를 숙소 삼아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이들의 삶을 르포 형식으로 엮어낸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이다. 이 작품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클로이 자오에게 감독상을, 프랜시스 맥도먼드에겐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오직 2명만을 전문 배우로 분장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실제 노매드로 등장시키는 연출 방식은 영화를 현실과 픽션의 경계로 끌고 간다. 연출이 주는 몰입감과 광활한 자연을 담은 장면은 마치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끝없는 광야에 서있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디지털노매드 VS 노매드랜드
노매드는 본래 유목민이라는 의미였지만 최근 들어서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인간 유형을 의미한다. 예로 디지털 노마드는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등을 이용해 장소에 상관하지 않고 여기저기 이동하며 업무를 보는 이를 일컫는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그런데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다루는 노매드는 위 노매드와 조금 다르다.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대게 자율적으로 선택했다기 보단 경제적으로 내몰리는 바람에 주거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RV카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 정규직이 아닌 한시적인 계약직을 통해 생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에서 화려한 유랑민은 아니다.
영화 속 노매드들을 묶는 공통점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마존에서 3개월 정도 근무를 한 다음엔 3개월 정도를 자신의 차를 동료 삼아 길을 떠돌고 다시 공원 단지에서 3개월 정도를 근무한다. 정해진 직장도 거주지도 만날 가족도 없다. 즉 노매드에는 소속감이라는 감정이 존재할 수 없다. 디지털노매드라 할지라도 특정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업무를 한다면 그를 통해 소속감을 느낄 수 있으므로 노매드와는 결이 다르다.
이들이 노매드가 된 것은, 즉 어디에도 소속되길 거부하게 된 이유는 다양하다. 주인공처럼 남편이 암으로 사망하고 자신의 직장과 거주지가 파괴된 사람도 있고,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혹은 자식이 죽어서 여행을 시작하게 된 사람도 있다. 그들과 거주 사회를 연결하던 고리가 끊어지자, 수면에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증발하는 수증기처럼 그들은 거주 사회로부터 떨어져나온 것이다.
기억되는 한 살아있는 거다
남편을 떠나보낸 주인공 펀은 자신까지 남편을 잊으면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소속감이란 어쩌면 '누군가 나를 기억해준다는 안정감'일지 모른다. 가까운 사람만이 나를 평생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기억해줄 수 있고 그들과의 관계가 나의 존재(살아있음)를 구성하게 된다. 그런데 노매드는 어떠한 계기로 소속감을 벗어버리고 빈 공간의 공기 분자처럼 떠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노매드는 사회가 아닌 자신이 모는 RV의 좁은 공간에서 가장 깊은 안정감을 느낀다. 자신이 몰고다니는 RV를 집으로 삼아 떠도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자신이 지고다니는 등껍질 안에서만 안전할 수 있는 거북이가 떠오른다.
언젠간 다시 만나자
See you down the road
그러나 노매드가 관계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노매드들은 광야에 모여 찰나의 유대를 가지며 서로의 지식과 도구를 공유하기도 한다. 오히려 그들은 직장에서 매일 만나는 사람들보다 더 깊은 연대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함께할 계획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다음 여행이 계획되면 RV는 노매드 캠핑장을 떠나고 주인공 펀은 그들과 배웅하며 작별한다. 그것은 마치 공중을 떠도는 공기 분자가 우연히 마주친 찰나를 즐기는 것과 같다.
10년을 가족처럼 지낸 친구가 이번에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젠가는 친구가 미국에 가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별은 늘 생각한 것보다 빨리 와서 마음이 허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매일 같은 곳에서 자고 매일 같은 직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내일도 그 다음날도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도 본질적으로는 누군가와 스쳐지나가듯 만나고 이별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서 그런 것일까. 새삼 깨닫게 된 고독함은 씹어 삼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모든 견고한 것이 녹아 사라진다
길 위에서 사는 노매드는 과연 집에서 사는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일까? 우리는 사회에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도 결국은 자신을 기억해줄 소수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갸날프게 의지한 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길 위에서 교차하는 RV처럼 속도는 느리지만 우리도 누군가를 만나는 순간 이미 그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저서 '액체근대'를 통해 과거 사람들은 '무겁고'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고체의 사회를 살았으나 현재 사람들은 '가볍고' '불안정성이 지배하는' 액체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가 지적한 것처럼 사람들의 관계도 고체의 견고함에서 액체의 불확실함으로 나아가 기체의 거리감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매우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생 거주할 곳, 평생 일할 곳, 평생 만날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실상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슬프게도 필자를 포함) 임차인으로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타의적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하고 평생 직장은 옛말이 되었으며 이러한 일명 일신상의 변화는 우리가 관계를 맺는 방법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즉 현대의 모든 사람들은 가벼운 관계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고독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영화 노매드랜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도 노매드의 고독이 본질적으로 자신이 느낄 수 밖에 없는 고독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모두 각자의 스마트폰을 향하고 있었다. '동물의 숲'이라는 게임이 유행한지 오래다. 자신만의 무인도를 만들어 세계를 가꾸어 나가는 게임이다. 스마트폰을 하든 위 게임을 하든 그 순간만큼은 안락한 RV에 누운 것만 같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지켜보는 각자의 얼굴은 몸은 지하철에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무인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스마트폰을 RV로 삼아 살아가는 노매드일지 모른다. 출근하는 길에 지하철 전시벽에서 인상깊게 읽었던 시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숲
정희성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