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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 Jun 18. 2017

런던 버스킹 준비

무대에 선다는 것은

1년 반의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에 왔을 때 꼭 한번 해보고 싶다고 되뇌던 것 중에 하나는 '버스킹'이었다.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춤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림을 그리거나 마술을 할 줄 아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버스킹을 뭘 할 거냐, 할 줄 아는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라고 이 쯤 되면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그래서 뭘로 버스킹을 할 건데? 그러면 답은 물론, 노래와 춤으로 버스킹을 하고 싶은 거다.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 동안 선뜻 퍼포머로서의 길이나 도전에 대해 계속적으로 미심쩍었던 내 고민에 대한 마침표와 같은 것이길 바랐다. 사람 앞에서 노래나 춤으로 눈길을 잡을 수 있는가, 내 노래를 듣는, 내 춤을 보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수 있는가. 적어도 나는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 맞는 건가. 나에겐 검증이 필요한 단계가 된 것 같았다.


노력도, 추진력도 다 소용없었다. 자신감이 무너지면 할 수가 없고, 게을러지면 준비를 할 수 없었다. 준비되지 않은 공연엔 아무도 눈길을 줄 이유가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다.



무대엔 많이 서봤다. 어린 시절에 직업 군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군부대에서 노래를 했던 3살 무렵부터, 발레를 배우던 7살에서 약 3-4년의 시간동안 교회에서 행사 때마다 작품을 올리던 것, 발레를 그만 둔 이후 대중음악과 춤에 관심을 갖고 친구들과 올랐던 학교 축제 무대, 그리고 중학교 간부수련회에서 하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춤을 췄던 그 때에도 무대에 오르는 건 사실 별로 어렵지도, 그렇게까지 부담되지도 않았었다.




대학교를 가면서 전공을 언론정보학과 더불어 공연영상학을 선택하면서 무대에 오르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춤 동아리에서 스트릿댄스를 좀 더 심도있게 배워가면서 춤에 대한 관심도는 더 깊어졌고,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서 짧은 퍼포먼스가 아닌 긴 완성된 이야기를 무대에서 해나가는 작업을 시작했다. 대학원을 가게 된 건, 내가 공연을 좋아해서 더 공부해야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간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에서의 공부만으로는 '전문성'을 갖기 어려워보였기 때문에 선택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덕에 대학에서 세부적으로 배우지는 못했던 배우 훈련방법이나 연출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을 어깨 너머로 배울 수 있었다면 그게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원래 뮤지컬에 관심이 있어 시작한 공부는 오글거리는 뮤지컬 특유의 조에 못 이겨 연극이나 신체극, 몸을 움직임과 동시에 메시지를 담고 있는 공연에 대한 선호도로 조금씩 옮겨갔다. 말에서 대화로, 그 대화에서 노래로 변하는 과정을 어떻게 당혹스럽게 하지 않느냐가 뮤지컬의 숙제지 않나,라는 생각을 늘 하지만 공연을 볼 때는 또 결국은 뮤지컬을 압도적으로 많이 보는 이율배반적 취향을 가진 듯도 하고.




아무래도 공연은 공연이고, 여전히 관심이 많이 있던 건 영상에서는 뮤직비디오, 그리고 음악(특히 노래)과 춤이었다. 아이돌이 쏟아져나오던 시기에는 그 예쁜 나이에 충분히 예쁠 수 있는 상황과 기회가 제공되고 노래와 춤을 계속 할 수 있는,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면서도 경제적 보상까지 따르는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그게 쉬웠겠냐고, 엄청나게 어려웠겠지. 경쟁률과 엄청난 연습을 거듭해 그 자리에 설텐데, 적어도 그들은 그 분야에서는 프로 아닌가.



혹시 아이돌 하고 싶니?



어느 날,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일하던 선배가 나한테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 그랬었는지는 모르지만, 불쑥 그 선배가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해서 '그건 아니예요'라고 말했다. 그 때 좀 더 솔직해질 걸 그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양가감정이 분명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고 싶지만 그러기 싫은 마음.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눈에 띄고는 싶지만 나서서 하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감정은 내 자라온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내 마음 안에서 싸워왔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말하는 것에 대해 늘 눈치를 봤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이 내 자신감을 눌렀고,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하려는 마음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 대해 신경쓰는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는 뭐?


지금 이 때에 와서 내 안의 목소리가 좀 더 뻗어나가게 해보려고,가 아니고. 그런 단계는 이미 지난 지 오래된 데다가 심지어 내가 내 안의 소리를 못 들어서 그동안 나에게 무지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했을까? 천만에. 난 평생을 살면서 나를 관찰하고 남을 관찰했고, 그 누구보다도 내가 뭘 잘하는지, 뭘 못 하는지, 뭐에 자신이 없는지, 어떤 부분을 발전시켜야 하는지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내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잘하는지, 그래서 지금 뭘 해야하는지를 고민했으니까. 그렇다고 진짜 잘 아냐고 묻는다면,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 했다는 게 내 답이니 그리 성공적이진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무대에 선다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더욱 더 어렵고 버거운 것이 되었다. 내가 사람들에게 자주 말하는 '누구나 무대에 설 수 있어'라는 말을 나에게 적용하면 '아니, 그만큼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아'라는 말로 바뀌기 때문에. 남에게 관대한 기준이 나에게 엄격해지는 것은 꽤 오래된 내 습관이지만, 지금은 조금 그 기준을 내려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지금 뭐라도 하겠다고 맘을 먹고 자라나는 새싹같은 파릇파릇한 상태라면. 누군가 던지는, 던질 돌에도 상처 하나 나지 않을 이미 그런 단계라면.




심지어 예술계통의 취미든 관심이든 무언가 하려고 한다는 말을 하면 누군들 막론하고 주변 사람들이 돌을 던지듯 막말하며 놀리듯 보이는 반응도, 나에게는 이젠 지긋지긋하다 못해 더 이상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는 지경까지 온 것 같다.



누군들 웃기지 않을까. 검증되지 않은 누군가의 관심사에 맞닿은 능력치, 그리고 그에 대한 막연한 놀림거리화. 어릴 때 어른들 앞에서 하는 재롱은 성인이 된 주변의 어른들 앞에서는 조롱이 되고, 더 이상은 어린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유치하거나 병신취급을 받게 된다. 이 때까지 내 주변의 사람들도 나에게 그런 무언의 혹은 유언의 폭력을 가해왔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 일에 대해 왠지 모르게 진지하다.


안다. 비웃는 거 아는데, 그게 내 고집이기도 한 건, 그렇게 비웃는 사람들에게도 한 방 먹이고 싶은 마음도 한 켠에 있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되진 않는 거다. 그건 내 생각도 좀먹고, 자책도 하게 되면서, 결론적으로 다다르지 못한 목표 아래서 축 쳐지게 되는 상황까지 오는 거다.




1) 주변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서 오는 게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니.

- 아니, 그렇진 않은데.

2) 그럼, 너는 지금 니가 가진 그 관심사가 지속할만큼 오래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 그것도 모르겠지?

3) 지금은 대체 무슨 생각인데.

- 알면 고민은 왜 하겠니.




여기서 생각이 멈추고, 거기서 계속 맴돈다.




그래서, 나는 버스킹을 할 수 있을까?

나도 날 못 믿으니까. 확신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기엔 아쉽고, 그렇다고 자신은 없고 그런 거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나도 너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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