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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한아름 Sep 07. 2021

우리 할머니 이야기

나의 외할머니.

우리 엄마의 엄마.

나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더 생생할 때, 그분의 이야기를 기록해놓아야겠다.


우리 할머니 아주 젊었을 적,  너무 예쁜 외모에 반한 나의 외할아버지는 약속했단다.

섬진강 물이 말라 없어질 때까지 그댈 향한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마음은 금방 변했다.

할머니에게 자기 부모 맡겨놓고 군대 갔다 오고, 다른 지방으로 전근까지 가서 새 살림을 차렸다.

우리 할머니 슬하에 3남매, 그쪽 새 살림 차린 집에 3남매.

우리 엄마는 할머니의 유일한 딸. 할머니는 아들, 딸, 아들 순으로 세 남매를 낳으셨다.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얼마나 지독했는지.

우리 할머니는 남편의 사랑도 못 받으면서 지독한 시집살이는 혼자 감당하면서 돈은 돈대로 벌어야 했고 아들 딸 먹여 살리고 거 둬 먹이느라 죽도록 고생하셨다.


삶이 너무 고되고 힘들어서 할머니는 하나뿐인 딸인 우리 엄마에게 참 호되게 많이 혼내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또 잠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안쓰러우셨는지 눈 감고 있는 딸의 얼굴을 그렇게도 쓰다듬으며 안아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밤이 되면 잠이 안 와도 꼭 눈을 감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눈을 뜨면 우리 엄마는 계모가 되고, 내가 눈을 감으면 우리 엄마 진짜 우리 엄마가 된다고.


 우리 할머니는 손주들을 조금씩 다 키워주셨다.

 나도 아기 때 우리 할머니가 키워주셨다. 할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그때 이야기를 하셨다.

 내가 하도 분유도 우유도 아무것도 안 먹어서 너무 걱정이 되셨단다. 우리 엄마는 "괜찮다 엄마, 껄떡 넘어가도록 배 고프면 먹겠지 놔둬!" 했다는데 우리 할머니는 내가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으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웃집 아이가 새로 나온 아가용 우유?? 베지밀인가.. 분유인가 몰라도... 뭔가 특별한 우유를 먹고 있길래 나한테도 먹여봤는데 너무 잘 먹더란다. 할머니는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내 손을 잡고 엄마 아빠 집으로 데리고 가는데, 말도 잘 못하는 아이가 쫄래쫄래 길을 찾아 가더란다. 할머니 눈치를 살살 보면서 앞서 걸어가더란다. 희한하게 엄마 아빠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문 앞에 서서 할머니에게 "가!" "함머니 가!" 이랬단다.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을까', '얼마나 엄마 손이 그리울까' 안쓰러워서 할머니가 그 길로 엄마한테 '네가 키워라' 하고 혼자 돌아오셨단다.

 그런데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할머니에게 매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억도 안 나는 일이긴 하지만, 할머니에게 너무 매정했던 거 아닌가 하는 마음에.


 내가 7살 때, 우리 엄마의 오빠. 우리 할머니에겐 장남. 나에겐 큰외삼촌. 그분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정말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분의 죽음은 모두에게 너무나 커다란 충격이고 고통이었다. 삼촌에겐 아직 말도 못 하는 아기가 둘이나 있었고 결혼 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할머니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남편 없이 사는 삶에, 너무나 자랑스럽고 든든한 큰 아들. 그 아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 상실감에 오래도록 허우적거리며, 믿을 수 없어하시며, 고통 가운데 오랜 시간 머물렀다고 한다.

 그래도 할머니는  손주들을 거두셨다. 숙모는 지금까지 재혼하지 않으시고,  집안의 며느리로 살고 계시고,  손주는 지금 우리 집 든든한 장손이다.


 할머니는 집에 오는 사람들을 언제나 푸근하게 대접하셨다. 마음이 넓은 분이셨다. 할머니의 시골집에 오는 손님들은 언제나 마음이 푸근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이곳저곳에 '자식들'이 많았다. 할머니에게 은혜를 갚으러 오는 사람들,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할머니의 시골집은 나에게도 언제나 푸근한 곳이다. 똥파리도 많고, 푸세식 화장실 때문에 어렸을 때는 무섭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 할머니가 있는 곳. 시골집.

 아주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놀고 있는데 할머니가 칼국수를 끓여서 가져오셨다. 엄청 무거우셨을 텐데. 나는 근데 그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도 모르겠을 만큼 아득한데, 그 칼국수가 너무너무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 행복했던 기억.

 할머니 집에 가면 별을 많이 볼 수 있었고, 할머니는 언제나 부엌에 기대어 우리를 위해 뭔가를 만들어주셨다. 할머니의 전매특허 고추 찌짐은 정말 최고다. 평상에 가스버너를 켜놓고 한 장 한 장 구워주시는 고추 찌짐. 그 맛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 아쉽다. 매운맛을 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할머니는 언제나 딸 걱정이 많으셨다. 젊었을 적 우리 아빠가 엄마를 고생시키는 걸 무척이나 미워하셨다. 아예 처음부터 결혼을 극구 반대했었다. 집에 오면 라면 하나 안 끓여주실 정도로. 지독하게 미워하셨지만. 엄마 아빠는 사랑의 도피를...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우리 사위 같이 한결같은 사람 없다며 나중에는 많이 아껴주셨다. (우리 아빠는 외할아버지랑 다르게 아주 지고지순한 일편단심)

 내가 비싼 대학 간다고... 우리  고생할까  걱정하셨다. 내가  벌기 시작하자 엄마  주라고 하셨다. 처음 우리 엄마를 낳았을 때는  낳았다고 그렇게 구박을 받았단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할머니는 '내가 재순이  낳았으면 어쩔 뻔했노' 하셨다. 내가 이거  낳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하나 있는 게 이렇게 귀하다고. 엄마는 할머니 사는 곳이랑 집이 3~4시간이나 걸려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크고 나서는 틈나는 대로 할머니에게 갔다. 할머니는 자식들 집에 사는  심심하다고 친구들 있고,   있는  집이 편하다며 혼자 사는  고수하셨다. 그런 할머니가 점점 거동이 불편해지시니 엄마는 할머니 집에 가면   일이 많았다. 할머니 목욕도 시켜드리고, 밀린 집안일도 하고, 청소 담당 우리 아빠는  할머니  대청소를 하셨다. 엄마는 할머니 목욕시켜드리고 나면 그렇게 개운하고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며 웃으셨다.


 할머니 집에서 '고스톱'을 배웠다. 그냥 놀이 삼아하라고 가르쳐주셨는데, 아빠가 자꾸 진지하게 고스톱 하다가 할머니한테 몇 번 혼났다. 애들 상대로 장사할라 한다고.

 할머니는 코를 드르렁드르렁 크게 고신다. 그래서 할머니 옆에서   잔다. 그런데  우리가 놀러 가면 할머니는 거실에서 주무신다. 잠자려면 아랫방으로 피해야 한다. 우리 엄마도 그런 코골이 소리를  닮았다.


 할머니의 두텁고 개구리 같은 손은 우리 엄마가 꼭 닮았고, 그리고 내가 꼭 닮았다. 나는 그 손으로 피아노를 치게 되었다. 할머니는 내가 가면 꼭 손을 문질문질.. 문질문질... 우리 강아지 왔냐고 안아주셨다. 가끔 우리 아가 얼마나 컸는지 보자며 가슴을 만져보시고 엉덩이도 만져보시고 하면 내가 기겁을 하고 도망쳤었지. 할머니의 거친 손으로 내 손을 문지르시며 '아이고 보드랍다'하셨던 거 같다. 난 그 거친 할머니 손길이 그립다.


 할머니는 손녀가 5명, 손자가 1명. 손녀들이 남자 친구를 데리고 할머니한테 한 번씩 온다. 나도 몇 번, 몇 명... 데리고 갔었다. 우리 아빠는 내 남자 친구들을 다 몰라도 우리 할머니는 아셨다. 내 사촌 여동생들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 눈에 차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앞에 대놓고 싫다 하시지는 않는다. 우리 엄마한테 물어보면 다 답이 나온다. 딸한테는 비밀이 없으셔.

 할머니 기준에 좋은 남편감은 우리 삼촌(우리 엄마의 남동생). 남자답고, 끈기 있고, 가정적이고, 똑똑하고. 할머니 기준에서는 아들이 최고의 남편감으로 보이시나 보다.


 내가 대학생 때쯤 할머니가 그러셨다. "내가 우리 지혜 결혼하는 거는 보겠나.." 얼마나 오래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두려움이었던 걸까. 그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할머니! 걱정하지 마! 나 결혼하고 애 낳는 거 까지 다 보실 거니까!" 했다.

 진짜 우리 할머니는 내 결혼식에도 오셨고, 우리 아들 둘 낳아서 기르는 것도 다 보셨다.

 내가 지금의 남편을 데리고 할머니 집에 가면 할머니는 우리에게 이것저것 많이 얘기해주셨는데, 남편은 그걸 기억하고 실천하기도 했다. 싸우고 미운 마음이 들 때, 그냥 꼬옥 안아주라고 하셨다. 마음 변하지 말고 꼬옥 안아주라고. 신혼 때 오빠는 '할머니가 안아주라고 했어' 하면서 그냥 안아주며 화해를 시도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가끔 결혼 후에 우리를 만나거나 영상통화를 할 때면 우리가 붙어있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셨다. 흐뭇해하셨다. 그리고 오빠에게 꼭 물어보셨다. "우리 지혜 이쁘제?" 아직도 우리 지혜 예뻐하고 사랑하느냐고 늘 물으셨다. 변하면 안 된다고.

 아들 둘 낳고 나서는 할머니한테 전화할 때마다 "니는 애나 잘 키워~" "아들 키우느라 고생이 많다" 늘 그 소리. 아이들 핑계로, 먼 길 가기 어렵다고 더 못 갔다. 사촌동생들은 가까이에 있기도 했지만 할머니를 참 살뜰하게 잘 챙겼다. 나는 할머니를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자주 가지도 못할뿐더러 그렇게까지 살뜰하지는 못했다. 전화도 가끔. 만나면 너무 반갑고.

 이번 휴가 때는 꼭 시골집에 가서 할머니 곁에 몇일 머무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휴가를 한 달 앞두고 할머니가 갑자기 아프셨고, 입원을 하셨고, 암을 진단받으셨다.


 최근에 그런 기분이 들었었다.

 '할머니한테 전화해야지.'

 '할머니한테 더 자주 전화해야지.'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것에 비해 실제로 전화한 건 몇 번 못된다. 좀 더 자주 전화할걸 후회할 날이 곧 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었는데. 진짜 그렇게 되어버렸다. 할머니랑 마지막으로 며칠이라도 휴가 기간을 보내고 증손주들도 실컷 보여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결국 후회가 남는다.


  할머니는 그러셨다. 만약에 그때 내가 너무 힘들다고 도망갔으면 지금 너희한테 엄마 대접받고 살 수 있었겠냐고. 내가 결혼할 때, 아주 구시대적인 말씀을 하셨는데.. 여자는 한 번 시집 가면 살아서는 나오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그렇게 사셨으니까. 그 삶이 그 증거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심지어 남편이 새살림 차려 얻은 아이들도 할머니의 호적 아래에 넣어 품어주셨다. 할머니의 그 인생을 나는 감히 짐작도 할 수가 없다.


 할머니.

 오늘 예수님 손 꼭 잡으셔야 해.

 우리 천국에서 만나자.

 너무 사랑하고. 고마워요. 할머니 같이 따뜻한 사람이 내 할머니여서 정말..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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