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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한아름 Dec 04. 2022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소설 <아몬드>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너무 자주 봤던 표지.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 2022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도서관에 예약해서 빌려왔다. (베스트셀러와 수상작은 내용이 궁금해서 보고 싶은 마음)

 자기 전에 누워서 1시간 반 동안 다 읽었다. 그다음이 궁금해서 덮을 수 없게 만드는 작가님의 ‘복선’ 전략. ‘오? 그다음에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 하면서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된다.

 

 이 책을 읽을 예정이라면 ‘스포 주의


49p : 책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순식간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고백을 들려주었고 관찰할 수 없는 자의 인생을 보게 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들, 겪어보지 못한 사건들이 비밀스럽게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그건 텔레비전이나 영화와는 애초에 달랐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은 감정을 학습한다. 상황에 따른 대처법을 배우고 외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모든 걸 다 보여주지만 책에서는 상상의 여지가 있다. ‘어떤 기분일까?’를 아무리 상상해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또 어떤 느낌일까.


 90p : 생각해보면 할멈이 엄마에게 바란 것도 평범함이었을지 모르겠다. 엄마도 그러지 못했으니까. 박사의 말대로 평범하다는 건 까다로운 단어다. 모두들 ‘평범’이라는 말을 하찮게 여기고 쉽게 입에 올리지만 거기에 담긴 평탄함을 충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게는 더욱 어려운 일일 거다. 나는 평범함을 타고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비범하지도 않으니까. 그 중간 어디쯤에서 방황하는 이상한 아이일 뿐이니까.


 이 책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이 남자아이가 6살일 때도 있고, 17살일 때도 있는데... 정말 그 어린아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은 ‘인생의 명언’들이 곳곳에 있다.


176p : 그러니까 내가 이해하는 한 사랑이라는 건, 어떤 극한의 개념이었다.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를 간신히 단어 안에 가둬 놓은 것. 그런데 그 단어가 너무 자주 쓰이고 있었다. 그저 기분이 좀 좋다거나 고맙다는 뜻으로 아무렇지 않게들 사랑을 입 밖에 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이 생각하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들도 있다.


171p : 사람들은 곤이가 대체 어떤 앤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단지 아무도 곤이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감정과 편견에 따라 쉽게 판단하는 편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노력해야 한다. 더 생각하고 더 듣고. 겉으로 보기에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머릿속에서는 다른 이들보다 두배 세배로 뇌의 회로가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171p : 어딘가를 걸을 때 엄마가 내 손을 꽉 잡았던 걸 기억한다. 엄마는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파서 내가 슬며시 힘을 뺄 때면 엄마는 눈을 흘기며 얼른 꽉 잡으라고 했다. 우린 가족이니까 손을 잡고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반대쪽 손은 할멈에게 쥐여 있었다.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내 손을 맞잡은 두 손. 그의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는 이 담담한 문장이 가슴에 와닿는다.

 강력 범죄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사람의 내 편‘이 없었다고 한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인정받거나 사랑받아본 적 없는 이들. 그러나,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막막함 속에서도 단 한 사람.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 때문에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종종 전해 듣지 않는가.

 

40p : 엄마는 모든 게 다 나를 위해서라고 했고 다른 말로는 그걸 ‘사랑’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엄마의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하려는 몸부림에 더 가까웠다. 엄마의 말대로라면 사랑이라는 건, 단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럴 땐 이렇게 해야 한다, 저럴 땐 저렇게 해야 한다, 사사건건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에 불과했다. 그런 게 사랑이라면 사랑 따위는 주지도 받지도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물론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엄마의 행동 강령 중 ‘너무 솔직하게 말하면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라는 덕목을 입이 닳도록 외운 덕이다.


 엄마의 사랑을 그는 이렇게 정의 내린다. 그는 누구보다도 엄마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공감하지 못할 뿐.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성숙했는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엄마는 누구보다 그를 사랑했다. 그가 다치지 않기를, 그가 아프지 않기를, 누군가에게 해코지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부분이다.

189p : 도라는 뭐가 우스운지 까르르 웃었다. 수백 개의 작은 얼음 조각이 바닥에 흩어지는 것 같은 웃음이다.

194p : 그 애의 머리칼이 내 얼굴을 때렸다. 아. 내가 짧게 신음했다. 따가웠다. 갑자기 가슴속에 무거운 돌덩이가 하나 내려앉았다. 무겁고 기분 나쁜 돌덩이가.

199p : 귀찮은 증상도 계속됐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심해지는 것 같았다. 도라를 볼 때면 관자놀이가 지끈거렸고, 멀리서도, 여러 사람의 틈에서도 그 애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면 귀가 곤두섰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을 앞질러 버린 몸이 여름에 입은 봄 외투처럼 불필요하고 성가시게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벗어 버리고 싶을 만큼.

209p : 무릎에 힘이 풀려 천천히 주저앉았다. 생각이 사라진 머리에 맥이 뛰었다. 몸 전체가 북이 된 것처럼 울렸다. 그만해. 그만. 그렇게까지 안 해도 살아 있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타이르고 싶었다. 고개를 몇 차례 흔들었다. 살아가면 갈수록 모를 일이 너무 많았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의 사춘기. 아마도 다른 누군가였다면 ‘이건 사랑이야’라고 단번에 알았겠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의 뇌는 성장하면서 점점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춘기의 소년이 사랑에 빠진 현상(?)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작가님의 상상력이 놀랍다.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245p :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삶에 대해 진지한 탐구와 고뇌가 그의 머릿속에선 계속 계속 일어났다. 그의 안에서 ‘감정’은 단순했지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현실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니. 우리는 뉴스에서 ‘사이코패스'를 본 적은 있지만 이런 사례는 만나기 어렵다.

 하지만 감정이 없다고 해서 영혼마저 타락하는 건 아니라는 걸 볼 수 있다. 남들보다 뭔가 부족하다고 해서, 좀 불편하다고 해서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이 생각하고, 인생과 사람과 사회에 대해서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다.

 나는 무수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지만, 얼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내 가까운 사람의 마음도 공감하지 못하고, 조금만 불편하면 피해버리는데.

 ‘내가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소설은 이래서 좋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을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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