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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의 책놀이터 May 29. 2016

[에세이] 인생의 달콤한 군것질, 그 이름 '여행'

- 전명진 지음, 『꿈의 스펙트럼』, 컬쳐그라퍼, 2012

저는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는 아닙니다. 그 시절을 살았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배고픔은 한국인이 당면한 가장 큰 고통이며 위협이었습니다. 반찬이 변변찮은 것은 물론이고 주식인 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감자,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기 일수였다고 하지요. 그것조차 없으면 산에 가서 마를 캐다가 쪄먹어야 했던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간장 한 종지랑 먹는 한이 있더라도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요구조차 사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통일벼가 개발되면서부터 주식인 쌀의 자급율은 서서히 100%로 올라서게 됩니다. 50원짜리 동전을 보시면 벼가 새겨져 있지요? 바로 통일벼의 개발과 보급으로 쌀 자급율이 비약적으로 올라간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요. 이후 밥맛이 형편없던 통일벼의 개량형인 '유신'종(....)이 등장하면서 이제 한국인은 주식 부족으로 인한 배고픔으로부터 해방됐습니다.


어느 독재자의 약속처럼(정작 본인은 못 지킨) '이밥에 고깃국'으로 세끼를 챙겨먹을 수 있게 되자 이제 사람들은 다른 먹거리를 찾아나섰습니다.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80년대 후반 한국에 소개된 바나나가 특별한 간식 대우를 받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한국에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 먹거리들이 인기를 얻게 된 것이지요. 이제는 람푸탄, 체리 같은 과일조차 흔해져 그 의미가 퇴색됐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새로운 군것질 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역시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닌가 봅니다.

우리의 일상은 밥과 같습니다. 밥을 맛이 있어서 먹는 사람은 흔치 않지요. 점심시간에 김치찌개 백반을 먹는 것이 딱히 맛있어서 챙겨 먹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생존과 활동을 위한 에너지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지요. 일하고, 쉬는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소득을 얻기 위해 일하고, 다시 일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 것은 취향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저 반복되는 식사와 일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에서 밥이 아닌 간식 혹은 군것질과 같은 시간은 언제일까요? 저는 단언컨대 여행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복적인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사회를 경험하는 것은 기존의 식사가 아니라, 특별한 음식을 맛보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군것질이 '여행'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일상이 팍팍하고 고단하면 할 수록 우리가 여행을 꿈꾸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않을까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보고 갈 대목이 있습니다. 관광과 여행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기 돈 들여서 편안한 장소, 예컨대 리조트나 호텔휴양지 같은 곳에 가서 고급음식을 먹으며, 경치와 풍경이 좋은 곳을 눈으로 보는 경험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라카이, 세부 같은 곳을 다녀오는 건 거의 관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후자는 다릅니다. 자기 돈을 들이는 것은 비슷하지만 굳이 편안한 숙소나 맛있는 음식을 찾아나선 것이 아닙니다. 풍광이나 경치가 좋은 곳만을 돌아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길이 이어져 있고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지 가서 온몸으로 그들의 사회를 경험하고 현지인들과 교류하는 것입니다. 훨씬 다층적이고 깊이있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애써 모은 수백 만원을 들여 일주일쯤의 해외관광에 쓰고도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다시 지쳐버리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경험의 차이 때문입니다. 순간의 시각적 만족이나 미각적 만족에서 끝나버린 경험의 유효기간은 오감을 활용해 몸에 새긴 여행의 경험과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앞서 인생의 군것질이 여행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관광은 군것질 중에서도 학교앞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식품을 사먹은 것에 비유하고 싶군요.


그렇다면 몸에 좋은 군것질은 어떤 것이냐구요? 바로 여행을 통해 인식의 폭을 확장하고 다양한 삶이 가능하다는 시야를 갖추는 한 편,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학을 고민하게 하는 경험일 것입니다. 그런 여행을 하고 돌아온 청년이 있어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사진작가 전명진 씨입니다. 그는 20대에 세계 50개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꿈의 스펙트럼』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군것질을 좀 심하게 했습니다. 1년, 365일간 전세계를 돌아다니고 왔으니까요.


『꿈의 스펙트럼』의 작가는 정형화된 삶을 강요하는 대한민국 사회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 싶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던 작가는 무작정 세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세계 각국을 돌며 순간순간 느꼈던 감상과 기억, 깨달음을 사진 속에 담았습니다. 짧은 에세이가 함께 하지만 필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진이 전하는 분위기와 글에서 묻어나오는 진정성 만큼은 독자로 하여금 그의 생각과 여행지의 공기를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여행'을 독자님들께 소개하는 것은 그가 사진가 김중만의 제자이거나, 방송국의 유명 예능프로그램의 사진작가여서가 아닙니다. 외려 책이 끝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유명사진작가의 제자가 될 것이냐와 유명 대기업의 유망한 부서에 입사하느냐를 두고 고민하고 흔들리는, 그런 평범한 사람입니다. 우리와 다르지 않지요. 하지만 여행 내내, 그리고 여행을 다녀와서도 조금은 어리숙하지만 열정과 도전으로 어려움을 조금씩 극복하며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새 그를 응원하게 됩니다. 이 청년작가의 '인생여행'에는 관광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색깔이 있습니다. 그 색깔에 취했을지도 모르지요.


에필로그에서 작가는 장기여행에 필요한 세 가지로 시간과 용기, 그리고 경비經費를 꼽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님께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요? 시간이 없으신가요? 아니면 모아둔 돈이 없으신가요? 저를 생각해보니 역시 용기가 제일 부족한 것 같군요. 물론 시간과 경비가 넉넉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손에 쥐고 있는, 그 얼마 되지도 않는 것들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여행을 위한 시간을 내기 어렵고, 경비가 좀 모자라서 좋은 숙소에 머물지 못하고 좋은 것 못 먹을까봐 걱정하는 모습들을 보며 역시 제일 부족한 것이 용기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래서야 짧은 여행이라 한들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사진: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

익숙한 것들과 편안해진 환경을 두고 새로운 것을 찾기에 우리는 너무 겁이 많습니다. 그리고 결국 안정적인 선택에 안주하고 말지요. 그것이 조금 빠르고 늦음에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자리를 잡고'나면 멈출 수 없는 쳇바퀴 위에 올라가고 맙니다. 철들었다는 말로 포장된 그 일상의 반복은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 분)가 15년간 먹어댄 군만두를 연상케 합니다. 이제 군만두에 취해서 그러려니 살게 되면서부터 인생은 즐겁고 설레는 것이 아니라 지겹고 힘겨운 것이 됩니다. 시간이 지나서 쌓이는 그 두께만큼 감금된 방의 벽이 두꺼워져서 감히 그 벽을 부수고 나올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지요. 그 벽만 부수고 나오면 지겨운 만두 말고도 엄청나게 많은 간식거리들이 넘쳐나는데 말입니다.


작가처럼 모든 것을 내던지고 떠날 수 없는 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대다수가 처한 현실이며 일상입니다. 무모한 용기를 내서 쉽사리 떠날 수 없습니다. 다만 밥 먹는 사이에 조금씩 군것질을 하듯이 우리의 일상에서도 자신을 위한 짧은 휴식과 딴짓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꼭 여행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자신의 취향과 여건을 고려해서 그 모양과 형태는 다양할 수 있겠지요.


우리에게도 그러한 비상구가 있다면 좋겠다. 꼭 먼 곳으로 떠나지 않더라도 좋은 벗, 좋은 책, 좋은 음악이 그런 비상구 구실을 할 수 있다. 다양한 곳에 여러 탈출구를 만들어 함께 영위하면 좋겠다. 삶에 지친 벗들에게 새로운 장소를 소개하고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좋은 책을 나누는 것은 지식과 사상을 공유할 수 있어 좋다. 사진과 음악을 나누는 것은 감정을 나눌 수 있어 좋다. 나의 글과 나의 사진이 잠시나마 그대의 비상 탈출구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정말 좋겠다.
- 전명진 지음,『꿈의 스펙트럼』, 컬쳐그라퍼, 2012, 331p.


독자님께서는 그런 비상구가 있으신지요? 힘들 때마다, 지칠 때마다 잠시 나가서 군것질 좀 하고 돌아올 수 있는 나만의 비상구. 그것조차도 사치라고 생각하실만큼 힘들고 지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고 살림이 빡빡해져도 잔인하리만큼 인생은 계속됩니다. 그 삶이 지겹고 힘겨운 것으로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면 잠시 비상구로 나오셔서 군것질거리를 찾아보시기를 권해 봅니다. 그렇다면 분명 아직 삶이 살아갈만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테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냐구요?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일상의 벽을 뚫고 나올 작은 '용기',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두르시기 바랍니다. 왜냐구요? 전명진 작가의 친구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뭐가 됐든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거라. 어차피 인생 2박 3일이더라."


- 전명진 지음,『꿈의 스펙트럼』, 컬쳐그라퍼, 2012, 3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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