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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의 책놀이터 Jun 03. 2016

[에세이] 우리는 비겁하고 치사한 나라에 산다

- 강신주 지음, 『비상경보기』, 동녘, 2016

어린 시절을 추억해보면 왜 그리 혼이 많이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꾸중 뒤에는 "콩 한 쪽도 나눠먹어라", "자기 일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어라" 등등의 훈계말씀이 이어졌지요. 이번에 구의역에서 목숨을 잃은 청년의 어머니도 그러셨는가 봅니다. 아들에게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지요. 하지만 이제 남은 자식에게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이 비겁하고 치사한 나라가 책임감 있게 자란 청년을 어떻게 부려먹고 대우하는지 너무나 명확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위 노동유연화라는 시류에 따라 우리는 고용불안과 열악한 처우에 상시적으로 노출돼 살고 있습니다. 이 불안과 고통은 현재진행 중이고, 상황은 더 나빠지고만 있습니다. 현 정부가 국회를 상대로 "노동개혁법 통과"라는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요. 노동자의 입장에서 더 나빠지는 제도 도입을 두고 노동개혁이라니요? 개악改惡이겠지요. 순전히 말장난 프로파간다에 불과한, 정말 염치없는 작태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협력업체, 하도급, 용역, 파견 등등 이제는 그 의미도 정확히 알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에서 고용의 질은 떨어져 있습니다. 나쁜 일자리만 넘쳐나고 사람들은 빈곤해져만 갑니다. 빈곤한 사람은 가진 것이 없기에 뻔히 나쁜 일자리임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지요. 정말이지 무자비한 경제적폭력입니다. 구의역에서 사고로 죽은 청년, 남양주 지하철 건설현장에서 죽은 노동자들 모두 그런 폭력의 직접적인 희생자들입니다.


흔히 말하는 금수저가 아니고서야 이 폭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불안정한 고용상태와 열악한 처우에도 불구하고 묵묵하고 책임감 있게 일하는 다수의 노동자들 역시 간접적이지만 이 비겁하고 치사한 나라의 경제적 폭력에 희생당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의역 스크린도어에 붙은 그 수많은 포스트잇들은 고인을 향한 추모와 더불어 명확한 자기인식을 통해 분출된 분노입니다. 한 청년을 희생시켰고 일상적으로 우리를 수탈하는 이 잘못된 구조에 대한 분노 말입니다.


철학자 강신주가 이 현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는 최근 펴낸  『비상경보기』에서 이미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백 명의 고용이 보장된 사회구조가 열 명의 고용이 보장된 구조로, 혹은 한 명의 고용이 보장된 구조로 바뀌었다. 그런데 자본가와 정부는 어쨌든 열심히 하면 열 명 중에 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침을 튀기며 이야기한다. 한 명을 뽑아도 노력하면 그 한 명이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니 취업이 안 되거나 정리해고 되거나 명예퇴직되어도, 그것은 모두 우리가 노력을 하지 않은 탓이다. OECD국가들 가운데 자살률 1위를 달성한 비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 탓만 한다. 그러니 자신만 죽으면 된다. 경쟁에서 진 낙오자니까. 한마디로 자신에게 분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분노를 내면이 아니라, 외면으로 돌리자. 분노를 바깥으로 돌리는 순간, 우리의 분노는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그러니 타살을 자살로 왜곡하는 논리에 걸쭉한 침을 뱉자.
- 강신주 지음,  『비상경보기』, 동녘, 2016


인간을 도구로 보고, 무조건 싸게 사서 부려먹으려는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유감스럽게도 구의역에서 희생당한 청년 혹은 지하철 공사현장에서 희생당한 노동자 같은 사람들은 다시 나올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내가 될지, 내 주변의 그 누군가가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정도면 그저 하늘에 대고 그 사람이 내가, 내주변의 누군가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빌어보는 수밖에 없는 걸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위기와 고난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도 그 때문이지요. 구의역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따뜻한 추모와 차가운 분노에서 그런 힘을 느낍니다.


지금 당장 우리 개개인이 무엇을 바꾸거나 컨트롤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너무 자책하지 않을 일입니다. 다만 무엇이 문제의 원인이고, 개혁의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분노의 대상 역시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면 됩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냐구요? 화난 사람 옆에있으면 최소한 눈치라도 보게 되니까요. 그 분노를 가슴에 품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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