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주 지음,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거울을 봅니다. 거울에 비친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분명 나인데. 뭔가 어색합니다. 이전에 보았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탁하게 변해버린 눈, 탄력을 잃은 피부, 두껍게 낀 군살이 눈에 띌 겁니다. 이게 나인가. 변해버린 내 모습에 낯섬을 느낀 가슴은 쓰라립니다. 대개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사람이 사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외국에서 타문화에 적응해 살아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세상에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나 삶의 방식은 '한국식'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장 내가 속해있는 환경의 영향이 가장 크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한국식 패턴과 관습에 익숙해지고 이를 보통 '철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철들었다는 말을 들을 때쯤 바라본 자화상은 분명 나인데 내가 아닌 모습일 겁니다. 낯선 그는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그는 행복할까요?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위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이정표가 되어줄 작품입니다. 한국이 고도성장을 이루던 시기에 태어나 학창시절에 외환위기로 가정의 풍파를 겪고, 사회에 진출할 때쯤에는 장기불황의 늪에서 구직을 위해 허덕이며, 결혼하면 육아와 사람도리에 메말라가는 한국의 청년세대의 자화상이죠.
주인공의 이름이 가장 흔하디 흔한 김지영입니다. 물론 여성입니다.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 평범한 사람이 여성이기에 갑절로 어려운 삶을 살아냈고, 살아가야 하는 오늘의 현실을 살펴봄으로써 지금의 내 자화상을 바라보는 겁니다. 낯섬을 느끼는 분에게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불합리한 모순을 곱씹을 기회가 될 겁니다. 공감을 느낀 분에게는 개인의 역할에 대한고민과 우리의 변화가능성을 모색할 기회가 될 것이구요.
서설이 길었군요. 어쨌든 여러분이 일상에서 마주치는 한국적 상황의 모순과 불합리의 순간이 있을 겁니다. 김지영 씨의 삶에서도 그것들이 비슷하게 발견됩니다. 한 번 살펴볼까요.
함께 살던 할머니 고분순 여사는 김지영 씨가 남동생 분유를 먹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분유를 얻어먹다 할머니께 들키기라도 하면 김지영 씨는 입과 코로 가루가 다 튀어나오도록 등짝을 맞았다.김지영 씨보다 두 살 많은 언니 김은영 씨는 한 번 할머니에게 혼난 이후로 절대 분유를 먹지 않았다.
"언니는 분유 맛없어?"
"맛있어."
"근데 왜 안 먹어?"
"치사해서."
"응?"
"치사해서 안 먹어. 절대 안 먹어."
- 조남주 지음,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29p.
조상께 제사밥 올리고 묘소에 술 한 잔 부어주는 건 그래도 아들이라는 생각. 딸은 시집가면 남이라는 관념. 현재를 살아가는 분들 중에 많은 분이 가진 생각일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규범이나 관습이라는 것이 자연히 아들, 즉 남성위주가 될 수밖에 없지요. 가정 내에서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정에 있는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 사회생활을 하며 사회의 분위기를 만들어 가니까요. 어떤 식일까요?
밤12시가 조금 넘자 부장은 김지영 씨의 잔에 맥주를 가득 채우고는 비트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이 다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대리기사와 통화하고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내 딸이 요 앞 대학에 다니거든. 지금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제 집에 간다고 무서우니까 데리러 오라네.미안한데 나는 먼저 갈 테니까, 김지영 씨, 이거 다 마셔야 한다!"
김지영 씨는 겨우 붙잡고 있던 어떤 줄 하나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의 그 소중한 딸도 몇 년 후에 나처럼 될 지 몰라, 당신이 계속 나를 이렇게 대하는 한.
-조남주 지음,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p193.
여성이 아닌 저도 자주 하던 생각입니다. 제 자식이면 저리할까 싶은 행동과 말에 거침이 없습니다. 여성인 김지영 씨에게는 더했겠지요. 직장생활을 하는 많은 여성분들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중간간부급 아저씨들의 썰렁한 유머와 성희롱적 발언들을 회식자리는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감내해야 하는 사실 말입니다. 그들은 이미 가정에서부터 그래왔고, 집 밖으로 나서서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의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 말로 "원래 그래왔어"라고 답할 것이니까요. 이 편리한 '전통' 앞에 문제를 제기하면 그 사람 하나를 표적으로 삼아 '모난 돌' 취급하니 문제제기도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편리한 전통의 수혜를 본 그 남자도 딸이 있을테고, 고스란히 딸에게는 전통의 폐해가 전달될테지요.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단순히 성별의 문제 때문에 말이죠.
결혼과 출산, 육아의 문제도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고통스런 직장업무를 끝내고 난 몸으로 출산을 해내고 육아를 감당하는 것은 극한의 체력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여차하면 시부모님이나 친정부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젊은 사람도 힘겨워하는 육아를 어르신들이 쉬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문제로 갈등을 생겨 서먹해지는 부모자식 관계도 그리 생소한 모습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회적으로는 '인구가 줄어드니 인구부양책을 강화해야 한다'고 발언하는 인사들이 많습니다. 경솔한 발언 전에 실태의 파악과 해결의 방향을 먼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다음 대목을 읽어보셨으면 좋겠군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날 변화가 어떤 것이고 어느 정도일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육아와 직장 생활을 병행할 자신이 없었다. 부부가 모두 퇴근이 늦고 주말 출근이 많아 어린이집이나 베이비시터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양가 부모님도 아이를 돌봐 주실 형편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길 방법부터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미안하기만 할 아이를, 키우지도 못할 아이를, 왜 낳으려고 하고 있을까.
-조남주 지음,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p224.
한 개인의 판단은 보통 합리성을 갖습니다. 자신의 문제이기에 그 누구보다도 전문가이며, 여러가지 상수와 변수를 조합하여 가장 최적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 개개인들이 비슷한 판단을 한다는 것은 사회적인 상황이 거진 비슷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맞벌이를 해야 생활이 가능하고, 그런 직장에서는 야근과 주말근무를 당연시하는데 언제 아이를 낳고, 또 어떻게 아이를 돌볼 수 있을까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구립어린이집에 등록신청을 하여 예비번호를 받아두고, 당첨되면 로또 맞았다고 기뻐하는 현실이 정상은 아니지요. 아이를 아침에 떼어놓고 헐레벌떡 출근하는 부모의 마음에는 죄책감이 듭니다. 주말이라고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아이가 출근하는 아빠에게 "아빠 또 놀러오세요"라고 말하는 텔레비전 광고는 과장이 아닙니다. 이런 불행하고 괴로운 결과를 야기하는 출산과 양육을 그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적으로 하라니요. 불과 30년 전만 해도 인구억제를 하겠다며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같은 캠페인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강연에선가 철학자 강신주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행을 많이 해라. 여행을 많이 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히 발견하는게 있다. 그건 이 대한민국이 X나게 살기 힘든 나라라는 것을."
강신주의 말이 엄살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 씨의 과거와 현실을 살펴보니 말입니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김지영 씨의 삶과 현실이 픽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녀의 삶은 우리 개개인의 일상을 조합해 정리한 총합과 같습니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더해져 그 삶의 무게가 더욱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여성독자에게는 강한 동질감을, 남성독자에게는 한국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의 팍팍함과 동시에 그리 자유롭지 않은 남성들의 모습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지요.
모두가 지쳐있는데 왜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를 또다시 꺼내느냐, 여기에 이 작품의 마지막 메시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결론으로 내리는 게 아닙니다. 다만 사실적으로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개개인의 결론을 허락하고 있지요. 저는 이 염증나는 현실을 그대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숙명처럼 포기한 채 살아야만 하는가. 그렇게 포기하고 노예처럼 누군지도 모르는 자가 정해놓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런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지껏 다 그래왔다'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인내심을 한계가 있고, 불합리를 견뎌낼만큼 어리석지도 않기 때문이죠. 무언가 변화가 필요한 때가 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소위 사회문제라고 하지요. 세상이 좋은 쪽으로 바뀔 것이라는 낙관도 좋지만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교실이데아」에서 외쳤던 그 한 마디가 아닐까 싶습니다.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매일까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