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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이 큐레이션 May 02. 2016

불안을 먹고 성장한 나 홀로 여행

발걸음을 붙잡은 불안은 이제 제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당장 내일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일주일간의 연휴를 얻었기 때문일 겁니다. 맞아요, 저는 무려 일주일간의 휴일을 얻었습니다.   


긴 연휴가 생기자 왠지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어요. 일주일 내내 집에만 있어도 좋을 만큼 ‘만렙 집순이’인 저로써는 꽤 큰 결단을 내린 셈입니다. 저라는 사람, 일주일을 꼬박 집에서 보내도 충분히 만족스러울 테니까요.     


여행을 결심하자마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옵니다. 평소에도 늘 혼자이면서 혼자 하는 여행은 특히나 불안해합니다. 물론 겉으로는 아닌 척. 엄청나게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사람인척 연기를 합니다. 아무도 몰라요. 제가 혼자 여행 전에 얼마나 고민을 하는지.    


역시나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한 순간부터 ‘완벽한 여행 계획’을 짜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해요. 누가 검사하는 것도 아닌데 목적지를 정하는 것부터 교통편과 봐야 할 명소까지 빈틈없이 준비합니다. 하지만 내일 하게 될 여행이 지금의 계획대로 되리란 보장은 없어요. 저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스트레스를 받으며 여행을 준비하는 걸까요?    


어쨌든 저는 목적지를 정했습니다. 서울에서 고작 2시간 30분이면 도착한다는 군산으로 떠납니다. 가벼운 국내여행 치고 꽤 오래 조사를 하고 준비를 했어요. 아마도 불안감 때문이겠지요. 떠나기 전날 밤에도 고생할 내일의 나를 위해 온갖 변명거리들을 만들어 놓습니다.    


‘혹시 내일 아침 늦잠을 자는 바람에 버스를 놓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자. 그냥 여행을 포기하면 돼.’, ‘뭘 빠트리고 갔다면 그 자리에서 욕을 뱉는 대신 가까운 편의점으로 가자. 돈만 있으면 뭐든 살 수 있어!’    


변명을 실컷 만들었더니 쿵쾅거리는 심장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걱정들이 저를 떨게 만듭니다. 혼자서 밥을 먹고, 멋진 풍경을 보는 것. 누군가와 함께 했을 때 더욱 행복해지는 모든 경험들이 두렵습니다.     


저도 알고 있어요. 떠나기 전부터 온갖 것들에 불안을 느끼는 제가 굉장히 피곤한 사람이라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제법 많은 혼자 여행의 경험을 가졌습니다. 국내외 할 것 없이요.


아마도 그래서 혼자 여행이 더 무서워졌는지 몰라요. 그동안의 경험을 미뤄보아 저는 둘 혹은 여럿이 해야 재미난 것들을 억지로 혼자서 해내려 했을 때, 그러니까 내 그릇에 다 담지 못할 여행을 강행했을 때 힘들어했습니다. 지난날 저는, 2인분 이상 나오는 음식점에 당당히 들어서지 못했고 사람 많은 명소에서는 혼자 어색하게 어슬렁거릴 뿐이었어요.    


“불안한 여행자의 배낭은 무겁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혼자일 때 더 행복할 수 있는 여행을 해보기로 합니다. 여행지가 아닌 여행을 다니는 나 자신에게 한껏 도취돼 보기로요. 맛집과 명소 리스트 대신 책과 음악과 풍경과 그리고 그것을 느끼고 있는 제 자신에게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여행 전날 밤 제가 한 일은 마음의 준비만이 아니었습니다. 혼자만의 완벽한 여행을 위해 모든 전자기기를 최대로 충전했습니다. 여행의 모든 순간을 기록할 디지털카메라는 물론, 낯선 곳에서의 등불이 될 소중한 스마트폰까지요. 이것뿐이겠어요? 여행 중 읽을 책을 골랐고 걸으면서 들을 음악도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참, 여행 중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할 수첩도 가방에 쑤셔 넣었어요. 여행에 필요한 짐과 배터리는 넘칠 만큼 챙겼는데 정작 여행을 주도해야 할 체력은 이미 방전되기 직전입니다.     


“시작은 불안하게, 실전은 여유롭게”    


떠나는 날 아침입니다. 어제 밤에 그 난리를 쳐서일까요. 새벽 내내 잠을 뒤척였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지하철을 타러 갈 때까지도 걸음을 멈춰 서고 가방을 뒤졌습니다. ‘화장품을 빠트린 건 아닐까? 맨 얼굴로 여행을 다니긴 싫은데’, ‘설마 머리끈을 안 챙긴 건 아니겠지! 아 갑자기 머리 묶고 싶다.’    


군산에 도착하자마자 먹은 첫 끼니입니다. 숨어있는 기사 식당입니다.

불안함이 무색하게 모든 것들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제 시간에 버스를 탔고 목적지에 도착해 처음 들어간 기사식당은 혼자 먹기 부담스럽지 않은 분위기였어요. 게다가 혼자 꽃게 된장찌개 정식을 먹는 제가 외로워 보였는지 식당 아주머니가 내내 말도 걸어주셨어요.    


군산에서의 여행은 매우 평화로웠습니다. 많은 여행자들의 호불호가 갈렸던 철길마을은 준비해온 음악을 듣고, 사색하며 걷기에 더 없이 좋았습니다. 일본식 다다미방이 인상적이었던 미즈카페에서는 구석 자리에 쪼그려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주요 촬영지였던 초원사진관에서는 지난밤, 오늘의 여행을 위해 보았던 영화의 감동을 되새겼지요. 정말이지 빈틈없이 완벽한 여행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겐 '그저 철길'이었지만 저에게는 '무려 철길'이었습니다.
일본식 다다미방이 인상적인 미즈카페 입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었어요. 아, 스마트폰 충전도 하고 말이죠!

“숙소에 들어서자 몸에 힘이 쭉 빠졌어요”    


정말 몰랐습니다. 여행 내내 긴장을 했나 봅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아파졌어요.   


군산 시내에서 버스로 1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한 비응항에 숙소를 잡은 저는 언제 올지 모르는 비응항 행 시내버스를 한참이나 기다렸었고 버스를 타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비응항은 짙은 안개와 흐린 하늘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비응항의 어두운 날씨는 불길한 다음 씬(scene)을 예고한 거였네요.


흐린 비응항. 제 마음도 흐려졌습니다.
비응항에 정박된 어선들.

비응항의 그림 같은 일몰을 못 봐 아쉬웠지만 모처럼 괜찮은 숙소를 잡은 김에 마음껏 휴식을 취해보기로 합니다. 욕조에 거품을 풀어 황홀한 목욕을 즐기고 난 후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와 컵라면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별안간 졸음이 쏟아져서 그대로 침대에 누웠어요. 아무렇게나 틀어놓은 TV에서는 만화영화가 방영되고 있었습니다. 높낮이가 빠르게 변하는 주인공들의 목소리는 곧 아득해졌지요. ‘이렇게 잠들 순 없어!’라며 눈을 떴을 땐 이미 삼십 분이 공중분해된 후였습니다.     


잠깐 졸았을 뿐인데 얼굴은 뜨거워져 있었고 잔뜩 건조해진 방 때문에 한쪽 콧구멍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너무 답답해져서 방금 전 몸을 닦았던 대형 수건에 찬 물을 적셔 방 이곳저곳에 널고 창문을 열었습니다.


어둠이 자욱이 깔린, 그러나 인근 숙박시설에서 삐져나온 빛들로 결코 어둡지 않은 밤의 비응항이 펼쳐졌어요.


방금 전까지 이상해진 컨디션에 불안을 느끼던 저였는데 고요한 이 풍경을 보는 순간 밑도 끝도 없이 ‘나는 참 행복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혼자 여행은 눈치 보지 않아도 돼”    


밤새 다리를 휘감는 이불의 낯선 감촉에 잠을 뒤척인 다음 날 아침. 비응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배를 타고 1시간이나 걸리는 선유도를 가기로 했는데 말입니다.


기분이 상했습니다. 카카오톡으로 가족과 지인에게 투덜댑니다. “일몰도, 일출도 못 봤는데 섬 여행도 포기해야 하나”하고요. 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한 쾌재를 불렀습니다. ‘컨디션도 안 좋고 여객선터미널까지 가려면 아침 일찍부터 나가야 해서 스트레스 받았는데 잘 됐다!’    


혼자 하는 여행이 좋은 이유는 모든 상황에 얼마든지 관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저처럼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기로 했는데 예상치 못한 소나기를 만나거나, 분명 이 정도 기다렸으면 와야 할 버스가 도무지 오지 않는다면 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다음 대안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 불행을 행복하게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갑자기 비가 오네. 잘됐다! 여독을 풀 겸 오늘 하루는 숙소에서 책을 읽겠어.’, ‘버스가 안 올 것 같으니 택시를 타자. 내가 죽을 것 같으니 그냥 편하게 이동하는 거야!’    


네. 저는 지금 계획대로 해내지 못한 여행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근데 아무렴 어때요. 이번 여행의 목적은 ‘군산 박사 되기’가 아니라 ‘여행 중인 스스로에 도취되기’였잖아요. 이 어마 무시한 변명은 앞으로 제 모든 혼자 여행에 이용될 예정입니다.    


ps. 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나르시시즘 투어’를 기획해 볼까 봐요.


아쉽지만(?) 군산에서 다시 서울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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