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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이 큐레이션 May 03. 2016

낯선 여행지가 애틋해지는 순간.

그녀는 내밀었고 저는 받았습니다.


타이완의 어느 옛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빨간 벽돌을 올려 지은 건물들이 제법 독특한 분위기를 뿜어냅니다. 저보다 세 발자국 앞서 가는 모녀 둘은 두 팔을 휘저으며 춤추듯 수다를 떨고 있네요.


저는 몇 시간 째 걷고 있습니다. 고작 손바닥만 한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닐 뿐인데도 뒷목이 뻐근합니다. 분명 가볍고 편한 신발을 신었는데 신발이 갑갑하게 느껴집니다. 꼭 발이 부은 것 같아요.    


여행자 신분의 저에게 지금 걷는 옛 거리는 평화롭고 일상적인 동시에 너무나 이국적인, 말하자면 완벽한 여행지입니다. 게다가 셔터를 누르기만 해도 작품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자꾸 뻐근한 뒷목과 부은 발에 사로잡히는지 모르겠습니다.


타이완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이지만 저에게는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모습들 입니다.


어느새 기계적으로 풍경을 담고 스탬프 모으듯 명소 찾기에만 열중한 제가 있습니다. 그토록 오고 싶던 곳이었는데. 눈앞에 펼쳐진 옛 거리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습니다. 아쉬웠어요. 이대로라면 이곳의 기억은 몇 장의 사진으로 밖에 남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당장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의욕이 떨어집니다. 옛 거리 위로 수많은 인생들이 움직이고 있지만 흥미롭지 않습니다. 호기심 없는 눈으로 길 구석에 우두커니 섰습니다. 덥고 습한 기운에 화장은 녹아내렸고 외모에 자신감이 떨어진 여행자는 그저 우울할 뿐입니다.    


모두 어디서 왔을까요. 어떤 삶을 사는 사람들일까요. 어쩌다 우린 이 시간, 이 거리에서 마주치게 된 걸까요. 계산 불가능한 인연 앞에 그저 조용히 낯선 인생들의 찰나를 감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제게 떡 하나를 쓱 내밉니다. 것도 뒤에서 말이에요. 진이 빠져 있었기에 망정이지 오래간만에 한국어 욕이 튀어나올 뻔했습니다. 떡을 내민 손은 건너편 떡 가게 상인이었습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거리는 얼굴로 자꾸만 제게 떡을 권합니다.    


배가 고팠었나 봅니다. ‘강매하면 어쩌지’하는 의심과 동시에 제 손은 그녀의 떡으로 향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의심보다 행동이 앞섰던 것 같습니다. 사실 머릿속에 ‘강매...’까지 스친 순간 저는 이미 떡을 씹고 있었어요.


그녀는 제 눈을 바라보며 “하오츠? 하오츠?(맛있어? 맛있어?)”라고 반복해 물었습니다. 저는 기대에 찬 그 눈빛에 보답하고 싶어 “하오더! 하오더!(좋아! 좋아!)”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씩 웃더니 건너편 자신의 가게에서 떡 몇 개를 더 가져옵니다. 이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중국어를 할 줄 몰라 그저 받아먹기만 합니다. 왠지 사야 할 것 같은데 그녀는 도통 사라는 말은 하지 않고 주기만 합니다.    


결국 제 발로 그녀의 가게로 이동했습니다. 속으로 ‘엄청난 상술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자신의 가게로 다가오는 저를 본 그녀는 이미 양 손에 또 다른 떡을 쥐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얼굴 한 가득 ‘이것도 먹어봐’하는 표정으로요.


그렇게 저는 약밥 비슷한 떡과 콩고물 소가 인상적이었던 떡을 하나씩 더 맛보고 한국어로 “이제 그만요”를 외쳤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하오츠?”라고 물었고 저는 또다시 “하오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후에도 중국어로 자꾸만 말을 걸었는데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을 지으니 그냥 ‘깔깔깔’하고 웃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떡을 사야 할 것 같아서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호탕하게 웃더니 제 배를 툭툭 칩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너 떡 많이 먹어서 배불러. 안 사도 돼’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영어가 안 통하는 중국 오지여도 ‘하우머치’는 다들 기똥차게 알아듣던데 그녀라고 모를 리 없습니다. 민망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하우머치를 외치는 제게 손사래를 치며 그냥 가라는 행동을 취합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밝은 얼굴로요. 그녀뿐만 아니라 그 가게의 점원까지도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습니다.    


아니 이렇게 갑작스러운 호의라니요. 저는 여태 그녀가 저를 상대로 유쾌한 상술을 펼치는 줄 알았단 말입니다. 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게 앞에 서 있다가 난데없이 카메라를 들어 올렸습니다. 이번에도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섰습니다.     


이 사람을, 이 순간을 그리고 이 감정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서 였습니다. 카메라를 향해지어 보인 그녀의 표정은 방금 전 저에게 떡을 내밀던 그 표정 그대로였습니다.    


처음 본 그 모습 그대로 웃어보였습니다. 여전히 한 손엔 떡을 꼭 쥔채로요.


그녀는 왜 제게 떡을 내밀었을까요. 땀에 젖어 불행한 표정의 제가 하필이면 자신의 가게 바로 앞에 서있었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팔아 보려고 내민 떡을 넙죽넙죽 받아먹고 있는 힘껏 “하오더!!”를 외치는 한국인 여행자가 재미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어찌 됐든 그녀는 제게 떡과 미소와 여행의 추억을 선물해줬습니다. 저는 고작 맛있냐는 물음에 맛있다고 대답한 것이 전부인데 말예요. 그녀와의 만남 이후 저에게 타이완의 그 ‘옛 거리’는 고소한 콩고물이고 쫄깃한 떡이 됐습니다.  


언젠가 그 날 먹었던 떡과 비슷한 맛의 떡을 먹게 된다면, 저는 시공간을 넘어 그 순간 바로 타이완의 그 옛 거리를 여행하게 되겠지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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