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나는 소인배 여친이다.
얼마 남지 않은 내 이십 대를 회상하자면 연애를 빼놓을 수 없다.
첫 남자 친구를 사귄 뒤로 늘 연애의 달콤함을 찾아 헤맸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랑을 덜 받았다'거나 그래서 생긴 '애정결핍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같은 이유 때문에 연애에 목을 맨 건 아니다.
그런 무거운 이유 보다도 나는 단순히 '연애'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좋았던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 또한 날 사랑해준다는 사실이 지금보다 어린 시절에는 너무나 당연한 동시에 중독성 있는 기쁨 같은 것이었다.
대학생 시절에는 차고 넘치는 것이 시간이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여자 친구를 만들고 싶은 남자애들로 가득했다.
나는 어리고 잘 웃는, 그래서 다가가기 쉬운 여자애였을 것이다.
그런 나에게 연애는 쉽고 재밌는 놀이였다.
대학 시절 짧게 또는 길게 만났던 남자 친구들은 늘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을 원했다.
그때의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렸고 그래서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 나이였다.
20대 초반의 연애는 마치 또래 여자애들과 시합하는 것 같았다.
상대방과 나의 어떤 깊은 교감 보다도 또래 여자애들을 따라 만든 '연애 버킷리스트'를 누가 먼저 완성시킬지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100일에는 유행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가을에는 커플 야상을 맞춰 입을 거야. 여름 방학에는 커플 신발을 신고 함께 여행을 떠나야지.'
돌이켜보면 그때의 연애는 이것들을 실현할 모든 것들이 충분했었다.
어린 커플에게는 뭐든지 실천할 수 있는 만큼의 시간과 건강한 육체가 있었다.
돈이야 우리가 엄청난 사치를 부리지 않는 이상 용돈과 아르바이트로 충당하면 되는 일이었다.
지난날의 나는 그런 연애를 해왔다.
늘 함께 하며 즐겁고 재미난 것들만 찾아서 시도해보는 연애. 지루함 따위 견디지 못했고 진지한 것 따위 관심이 없었다. 간혹 내가 심각해질 때만 같이 심각해져 주면 되는, 그뿐인 연애였다.
하지만 그는 늘 나와 함께 있어줘야 했고 내가 원할 때 언제든지 내 곁으로 달려와줄 수 있어야 했다.
20대 초반의 나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살다가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20대 후반이 되었고 내가 늘 '아저씨'라고 생각하던 나이의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그는 뒤늦게 취업에 성공해 아직은 불안정한 상황의 사람이었다.
30대의 남자 친구는 늘 바빴다. 회사는 내 남자 친구를 공장의 한 부속품 마냥 생각하는 것 같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대했다. 주말에도 근무를 했고 쉬는 날에도 언제고 휴대폰을 쳐다보며 업무를 처리했다.
평일 퇴근 후 데이트는 환상 같은 이야기가 돼 버렸다.
주말 하루라도 온전히 그와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한 상황인 것이다.
나는 이따금 화가 많이 났다.
날씨가 좋은 주말이나 긴 연휴에 독수공방하고 있다 보면 왜인지 모르게 울컥, 화가 나고 우울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내가 조금 더 똑똑하고 현명한 여자였다면 아마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만들어 냈겠다 싶다가도
내가 왜 굳이 그런 노력을 해야 할까 싶은 마음에 다시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정작 내가 가장 힘든 것은 이런 단순한 섭섭함이 아니라 나의 이런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이었다.
그는 내게 이해해달라고 조르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괜히 나 혼자 성숙한 여자의 면모를 뽐내고 싶어 내 그릇에 맞지도 않는 이해심을 욱여넣고 있었다. 어떤 날은 간장 종지만 한 내 인내심이 터져서 섭섭함을 와르르 쏟아내기도 했다. 그가 불안해할 만한 말을 하기도 했고 나의 힘듦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그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또 사과하고 미안해해야 했다.
그는 나보다 더 이 상황을 괴로워하고 안타까워했다. 바쁜 게 죄도 아닌데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사과를 해댔다.
그와의 만남이 결코 일상적인 일이 아니기에 2년 가까이 만나도 데이트는 늘 기대되는 일이었다.
'기대되는 데이트'라는 것이 항상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진 않는다.
그 '기대' 때문에 오히려 데이트를 망쳐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오랜만에 만나니까, 드디어 만나는 거니까, 이제야 만나는 거니까 나는 만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특별한 것들을 기대하고 상상했다. 매번 유쾌하고 가슴 뛰었던 어린 날의 그 연애처럼.
하지만 일에 찌든 사람과의 데이트는 결코 유쾌롭지 못하다. 그가 하품을 한 번 할 때마다 맥이 툭툭 풀리는 기분인 데다 내 눈치를 보는 그 모습이 마음 아파 죽을 것만 같았다. 내가 못된 마녀가 된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데이트는 내가 뭔가 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일단 나를 만나는 것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미션이었기 때문에 나를 만나기 전까지 엄청난 업무를 처리해야 했고 그것들을 완료하고 나면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나와의 데이트를 준비할 기력 따위 남아있지 않은 거다.
그렇다고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매번 최선을 다해 나를 바라봐주고 사랑한다 말해준다. 예쁘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 것도 모자라 내게 '이쁜이'라는 애칭까지 붙여주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사랑받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바쁜 남자와의 연애는 답답하고 가슴 아프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있거나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늘 바쁜 남자와의 연애'에 대해 토로하며 남자 친구 욕을 실컷 해놓고서는 마무리는 그래도 행복하다고 끝내려는 나 자신을.
내가 달라지고 있는 걸까? 아님 그가 나를 변화시키고 있는 걸까.
긴 연휴를 혼자서 보내고 다시 일상으로의 복귀를 앞둔 날 밤, 문득 이 남자와의 연애를 질겅질겅 씹고 싶었다.
오늘은 좀 긴 독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