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큰 배에서 작은 파도를 만나길 바라며
막연하게 '에디터'라는 직업을 꿈꾸게 된 건 희미하지만 대학교 3학년 때 즈음이었다.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하고 당시 연극 평론에 매료돼 평론하려면 연극을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호기롭게 영세 극단에 들어갔다. 학교에서 들은 교양 수업 '연극의 이해' 교수님과 연이 닿아 '연극의 이해와 실제'라는 과목을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었다. 22살의 나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열정 페이도 아닌 노 페이(No Pay)로 영세 극단의 조연출을 맡았다. 조연출은 영세 극단의 모든 잡무를 도맡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배우 스케줄 관리, 연습 스케줄 공지, 연출의 공지 전달하는 등의 업무가 내가 맡은 조연출의 일이었다. 그 극단에서 처음으로 했던 작품은 유진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였다. 실제 유진 오닐의 가정사가 담겨 있는 작품이었는데 매번 연습을 나갈 때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연출가의 연출력에 그저 감탄했다.
지하 1층의 연습실은 무지하게 추웠다. 배가 고파도 눈치 보며 초코파이 한 개로 요기를 하며, 난로 옆에서 불을 쬐며 하루하루 연습실에 출석했다. 기억나는 웃긴 해프닝도 있다. 난로 옆에서 불을 쬐다 야상이 타버린 것이다. 22살, 영세 극단에서 일하며 문학 작품을 해설하는 눈과 무엇보다도 어떤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는 끈기와 강인함 같은 것들을 배웠다. 22살에 얻기 힘든 교훈을 몸에 새긴 셈이었다. 그뿐 아니라 연극 평론은 22살인 내가 꿈꾸기에는 너무 오래 걸리는 꿈이라는 걸 깨달았다. 복학을 하고 '연극 평론'에서 '영화 평론'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공은 국문학, 복수 전공은 영상학. 3학년 때 내가 설정한 방향이었다. 그 당시 국문학과 동기들은 취업을 위해 경영학과 무역학, 회계학, 등을 전공할 때였다. 영상학을 복수 전공하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하고 터무니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기독교인 내게 신이 준 달란트(Talent)는 찾아보자면, 글을 쓰는 재능이라 생각했다. 당시에 글을 쓰는 걸 흠모했다. 신이 준 달란트가 글 쓰는 재능임을 믿으며,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었다. 당시 직업을 선택할 때 기준으로 꼽히던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중에 굳이 나누자면 나는 후자인 '좋아하는 일'을 택했다. 이후로는 좋아하는 일을 잘하고 싶었다.
당시 내가 좋아하는 글 쓰는 일을 잘하기 위해 선택한 건 무식하게 '많이 보고 많이 쓰기'였다. '무엇'을 쓰고 싶은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연극, 영화, 문학 같은, 글이 점철된 예술 작품을 분석하는 일이 좋았다. 도서관에서 내가 하고싶은 꿈을 먼저 이룬 사람들의 책을 펼쳤다. 씨네21의 김혜리 기자, 이동진 평론가, 공지영 작가, 몇 권의 잡지 등을 펼쳐놓고 하루는 감탄하며 읽고, 또 하루는 애석하게 읽었다.
답답했다. '대체 글을 쓰는 직업은 어떻게 갖는 거지?' 이렇게 멋진 사람들은 언제부터 멋있었을까. 이런 생각으로 하루하루 부딪히며 작은 커리어를 만들었던 나의 20대. 잦은 흔들림과 풍파에 휩쓸렸던 작은 배를 탔던 활자의 항해에 초대한다. 부디 에디터를 꿈꾸는 후배들은 나보다 더 큰 배에서 작은 파도를 만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