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쉽게 범람한 마음의 흔적
"소화제 안 떨어지게 잘 챙기구."
라며 다정한 이가 말을 맺었다. 어떻게 알았냐 하니 이맘 때면 너 밥 못 먹을 때 아니겠냐고. 그날 뜻모를 배앓이를 한다 생각했던 나는 그만 아득해져서, 몸을 구겨 그의 팔꿈치나 손금 같은 데에 숨고 싶어졌더랬다. 그러고 보니 그이도 늘 조그만 pill case에 소화제를 넣어 다니곤 했었다. 얼마쯤 다들 그렇겠지만, 그리고 좀 예민하다 싶은 이들은 여지없이 그렇겠지만, 조금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소화불량에 시달린다. 잊을 만하면 우아한 표정으로 "오늘은 일을 하지 않겠노라" 선언하는 내 소화기관에 나는 얼마간 체념을 한지가 오래이다.
그것이 가장 극심했던 때는 스무 살이었지 싶다. 그때 대학 신입생이었던 나와 무리들은 저마다 학교 수첩을 하나씩 사서는 몇 달치의 달력에 빼곡히 밥 약속을 기록해 두곤 했었다. 그것이 마치 보물섬 지도라도 되는 마냥 별을 그려 넣고 하트 모양에 색을 칠해가면서. 하지만 당시에 참 유난스럽게도 낯을 가리던 나는, 누구에게도 쉽게 밥을 먹자 청하지 못하는 여자애였고, 그나마라도 점심 약속이 있었던 날엔 오후 내내 손을 따고 소화제를 마시며 하얗게 질려서 보내고는 했다. 서툰 것이 밥 약속뿐이었을 리 없다. 난데없이 나를 너무 편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낯설었고, 한밤중에 오는 문자메시지에 경기(驚氣)가 들린 듯이 앓아댔고, 누구라도 조금 친근하게 대할라치면 저만치 줄행랑을 치기 바빴고, 빠져나갈 구실을 만드느라 진땀을 빼면서도, 좀처럼 마음의 수문을 조절할 줄을 몰라 때때로 뭔가를 가득 쏟아내 놓고선, 홍수에 떠밀리듯, 헬기레펠을 하듯, 사람들이 내게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기도 했더랬다.
누군가 내 이름을 물어주는 것, 도대체 이름 같은 게 중요하냐며 코웃음을 치는 고약한 성미를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서 애써 저와 비슷한 구석을 발견해내는 것, 때마다 인디아라도 발견한 마냥 만세를 불러 주는 것, 슬금슬금 낮은 포복으로 다가와선 내 일상을 엿보고 싶어 하는 것, 때로는 저의 일상과 포개어놓고 싶어도 하는 무작정의 것. 몇 년인지 퀴퀴하게 먼지가 내려앉은 속내를, 저도 온갖 얼룩을 묻힌 소매로 몇 번이고 닦아 들여다봐주려 하는 것. 이제는 젊어 누리는 복이겠거니 한다. 궁금해 견디질 못하겠는 것이 젊음이겠거니. 한 낯선 이가 내가 하는 일을 너무 속속들이 알려고 하기에 혹시 이쪽으로 이직할 생각이라도 있는 거냐고 물으며 웃었던 날이 있었다. 그날 그는 대화를 마치며 "내일도 물어볼 게요."라고 했었던가. 복내당(福內當). 두 번째 복내당을 보면서 젊음이란 복이 머무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혹은, 이 복이 머무는 한 젊음일 거라고, 뭐라고 답해도 좋을 시시한 질문에 이상한 대답을 하며 언제까지고 주책스럽게 살 수 있어야겠다고. 끝내는 내가 30살이 되어버려도, 40대에도, 언젠가 시니어 패스로 지하철을 타는 나이가 되어도.
백현진 - 여기까지
작은 일식 주점에서 예쁜 여자애와 소맥을 말아 마시면서 참치 뱃살을 먹네.
예민한 가족사 얘기를 대수롭지 않게 털어 놓는 여자애는 몸이 끝내줬네.
시간은 새벽으로 빠르게 흘러가고 내 집으로 가자고 말하려다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말하고 택시를 잡아줬네.
아쉬웠으나 오늘은 여기까지.
내 집으로 가자고 말하려다 오늘은 이제 그만.
이뻤었으나 사실 너무 불안해 보였네.
이뻤었으나 너무 불안해 보였네.
일식 주점 scene에서는 백현진의 '여기까지'라는 노래를 생각했다. 북촌방향에선가, 그의 영화에 백현진씨가 나와선지, 불친절하고 무심해 보이는 사내들이 가진 매력이 엉성하게나마 닿아있어선지, 홍의 영화를 보고 나면 백현진을 꼭 찾아 듣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