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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짠나의일기 May 05. 2020

아메리카노

자유로운 어른이 되었다

대체 이렇게 쓴 음료를 왜 먹는 걸까. 씁쓸한 아메리카노가 맛있게 느껴진 건 아무래도 직장인이 되면서부터 였다. 회사에 도착하면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그렇게 먹고 싶다. 급하게 출근하느라 물 한잔도 먹지 못했지만… 얼음 가득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어야 비로소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다. 이건 분명 중독이다.


인생의 쓴 맛을 알면서부터 아메리카노가 맛있어졌다고 해야 할까. 20살 때, 나에게 아메리카노는 돈 없어서 먹는 기본 음료였는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여유롭지만 아메리카노만 먹게 된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아메리카노도 과거와는 다르게 나름 다양해지고 있다. 고소하고 씁쓸한 맛부터 꽃향과 산미가 어우러지는 커피까지. 심지어는 원두를 선택해서 먹을 수도 있다. 산미가 강한 아메리카노가 조금 더 일찍 나왔다면, 난 더 빨리 어른 흉내를 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누군가는 인생의 스트레스를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해소한다면, 나는 머리가 띵 할 만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입안 가득 넣고, 아플 정도의 목 넘김으로 기분을 달래는 편이다. 약간의 고통과, 씁쓸한 맛이 현재의 고통을 상쇄시키는 것만 같다.


나에게 아메리카노란, 나름 어른이 되었을 때 느낄 수 있었던 맛이라 어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훈장이면서 동시에 그냥 마시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특별함이 있다.

섹스 엔 더 시티의 캐리가 한 손에 서류를 들고, 나머지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그 모습. 노트북으로 원고를 쓰며 쉴 새 없이 피는 말보로 골드. 반짝거리던 마놀로 블라닉

성격상 담배는 하기 싫고, 마놀로 블라닉 구두를 신기에는 돈이 없지만, 아메리카노 한 잔 이면 잘 나가는 뉴욕의 커리어우먼이 된 느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아메리카노는 가장 현실적이면서 도시적인 맛이다.


물론 아메리카노 한 잔이 결코 싸진 않다. 어떤 커피는 백반 값이다. 그래서 아메리카노는 어른에게 더 어울린다. 한 달 용돈을 받아가며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어린 시절에 먹기엔, 약간의 허세와 사치가 필요하다. 아메리카노 한 잔 가격으로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는 게 훨씬 효율적인 소비라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시절 나는 그랬다. 배가 부르지도 않고, 딱히 맛도 없는 커피 한 잔을 먹을 바에 편의점에서 배불리 먹고 후식으로 편의점 음료를 먹는 게 더 행복했다.


직장인이 되어, 이제는 아메리카노 한잔쯤은 먹을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가끔 주말에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과 디저트를 먹으며 멍하니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유튜브를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가끔 글도 쓴다. 꾸덕꾸덕한 치즈 케이크 한 입과,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같이 먹는 순간, 현실에서 벗어나 급 동화 속으로 빠져든다. 녹아 없어질 듯한 티라미스 한 입과 아메리카노도 찰떡궁합이다. 먹는 순간만큼은 칼로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게 된다. 먹는 순간 달콤함과 씁쓸함이 어우러진, 환상의 동화 같은 맛


미국인들이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홍차 대신 먹었던 커피는 지금 많은 이들에게 또 다른 자유가 되고 있다. 혼자 커피를 마시며 보내는 시간만큼 자유로운 시간이 또 있을까. 어른이 되면서 아메리카노의 맛을 알았다면, 지금은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답답한 일상에 작은 자유를 보상받고 있다. 일상이 지루하고, 지긋지긋해도 얼음 가득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이면,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활력이 생긴다. 뭐지 마약인가. 무튼, 오늘도 기분 좋게 시원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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