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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Jul 30. 2019

집으로 가는 길

지팡이 과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시절을 그리워할 줄 몰랐다. 머릿속 짧은 영상으로 남아있는 그곳에선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가끔 너무도 선명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초등학교 1, 2학년으로 기억되는 그 시절 난 아무 생각 없이 한가롭게 길을 오갔다. 대체로 생각나는 것은 등굣길보단 하굣길이다. 그때부터 생각하기를 본능적으로 거부했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편한 게 뭔지를 알았다. 돌멩이 하나가 발에 걸리면 몇 리 길을 이 돌만 차면서 집에 오는 것이다. 절대 돌을 갈아타는 법이 없이 한 개의 돌만을 발로 차며 집으로 가지고 온다. 때론 삐쭉 벗어날 때가 있지만 다시 바른 자리로 돌려놓고 조심스레 차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성공의 경험이 습관을 만든다고나 할까? 생각해보면 꽤나 많은 돌들을 집 앞으로 가져다 놓은 것 같다. 가끔씩  전날 가져돈 돌을 다음날 아침 차고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책가방과 실내화 주머니를 항상 세트로 가지고 다녔다. 요즘에도 보면, 달리 들어갈 것도 없을 텐데 자기 몸집만 한 책가방을 매고 씩씩하게 걷는 꼬맹이를 보면 이건 도저히 귀여움을 금할 길이 없다. 당시의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였으리라. 비록 병아리 유치원처럼 노란색으로 깔맞춤 하진 않았지만(당시는 대체로 청색계열의 로봇 그림이 그려진 실내화 가방이 많았다.) 실내화 가방 손잡이를 꽉 쥐어진 채 때론 크게 휘돌리며 쫄래쫄래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란 지금의 내가 봐도 아빠미소를 흐르게 한다.


돌멩이를 차고 가는 일이 아니라면 작다란 실내화 가방을 무릎으로 툭툭 치면서 집으로 향한다. 학교에서 뭘 배웠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실내화 가방을 무릎으로 치며 걷던 그 풍경은 대체로 선명하게 기억한다. 무릎으로 실내화 가방을 칠 때면 가방 안에 들어있는 실내화 한 짝이 오두방정을 떨며 진동하는 그 촉감이 좋았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내리쬐는 햇볕이 선명하다. 비 오는 날도 있었겠지만 비교적 맑은 날이 기억에 남는다. 하교시간은 12시가 넘어 1시를 바라보는 시간. 다들 점심식사로 인해 집 안에 있는 건지 길가에 사람들을 별로 없다. 한적한 좁은 골목을 지나 조금 널따란 길로 나오면 동네 한켠에서는 강철 스프링에 흔들리는 다섯 마리 목마 놀이기구가 보이고, 이중 두세 마리에 타 있는 나보다도 더 쪼그만 꼬맹이들이 눈에 띈다. 어머니로 보이는 몇몇이 그 옆에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스프링 목마에서 퍼져 나오는 동요가 귀에 쏙쏙 들어와 박히고 난 또 이를 흥얼거리며 걷는다. 꼬맹이들이 목마 위에서 몸을 앞뒤로 흔들며 신나 하는 모습이 어린 내 눈 속에 여전히 들어있다. 


목마 놀이기구를 지나 옆동네 친구 집이 보이는 곳에 다다르면 용달차에 노란 지팡이 모양 쌀과자를 파는 아저씨가 보인다. "펑"하고 어린 나를 놀라게 하는 뻥튀기 장수가 아니라 다행이다. 이곳은 정말 지나치기 힘든 곳이다. 냄새가 너무 향긋하다. 따뜻한 봄날 어린 가슴에 불을 품고 이곳에 멈춰서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지팡이를 구경하고 있노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뜨거운 햇볕은 아랑곳 않고 한참을 구경하다 보면 아저씨는 노란 과자가 나오는 구멍에서 길쭉이 만들어지는 과자를 반 정도 끊어서 나에게 준다. 어쩔 때는 완성품 지팡이를 통째로 줄 때도 있다. 그 지팡이 과자를 빠스락 깨물어 먹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림자가 짧아진 햇볕 가득한 거리, 사람들을 별로 보이지 않고 홀로 걸어가며 바라보았던 황홀한 풍경이 새삼 떠올랐다. 풋풋한 마음에 좋은 것인지, 현재 올드해진 반대급부로 당시가 좋아 보이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오갔던 그 거리의 풍경이 이제 당시를 회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바뀌어 있을 꺼라 생각하니 더욱 애틋하게 생각되는 것 같다. 초등학고 1학년 정도의 내가 바라보았던 나른하고 한적한 풍경을 다시 그려내니 살짝 우습기도 하다. 허나 더할 나위 없이 그립다.


그 시절 묵직한 천막을 들쳐 올려, 들어가도 될지 안 될지를 망설이다 호기심에 일단 들어가고 보았던 서커스 차력단 공연도, 절대 뽑히지 않을 것 같던 달콤한 금색 잉어를 전시해 놓은 뽑기 아저씨도, 아이들이 뛰노는 퐁퐁(지역에 따라서 방방이라고 한다.) 옆에서 설탕을 녹여 달고나 뽑기를 만들고 있던 아저씨 아줌마도, '애들은 가라'를 외친 약장사 아저씨도 모두 어린 내 눈에 아련히 들어와 있다.


요즘 아이들은 어떤 풍경을 보고 기억할까? 높다란 아파트 빌딩 숲. 오락실, 게임방, 아니면 방안 구석. 나름의 아련한 추억들을 눈에 담고 있을 것이지만 예전만 못하지 않을까?


아버지가 휴가차 친척분들과 함께 거제도와 부산을 방문하셨단다. 이번에도 역시 6.25 피난시절의 추억여행이다. 아버지 역시 고향인 함경북도 흥남시를 가볼 수 없기에 주야장천 거제, 부산에만 가야 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뛰놀았던 함흥차사의 이성계 능과, 고향의 맛과 비슷한지 아닌지도 모를 함흥냉면의 원조를 찾아 떠나가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클까를 생각하면 어서 민족적 염원이 담긴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는다.


꼬맹이 시절 눈에 들어온 풍경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이토록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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