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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ri Sep 29. 2015

전이상태(transition state) 넘기

transition state 후의 생성물의 안정성

화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면 전이상태(transition  state)라는 말이 익숙할 것이다. 왠지 모를 전공단어의 위압감이 느껴지지만 사실 그렇게 어려운 말이 아니다. 한 출발물질이 있다고 해보자. 이 출발물질이 최종 생성물질로 변하는 반응이 일어날 때 여러 경로를 통해 반응이 진행된다. 출발물질의 구조적 변화나 또는 반응에 참여하는 물질과의 상호작용 등 에너지적으로 가장 유리한 경로로 반응이 진행되게 되는데 이때 이 경로의 가장 높은 에너지 상태를 전이상태라 한다. 만약 두 단계를 거쳐 진행되는 반응이라고 하면 전이상태가 두 군데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높은 에너지 상태를 넘어갈 때의 단계를 속도 결정 단계라고 정의하고 이 구간의 반응속도가 제일 느리다. 일상생활에 비유를 하자면 내가 출발점에서 목적지로 가고자 할 때 여러 경로가 있겠지만 최단 거리로 선택해서 가고자 할 때, 그 경로에 존재하는 수많은 언덕들이 전이상태이고 가장 높은 언덕을 넘을 때 가장 힘이 들고 느릴 것이다. 화학과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상생활을 화학 이론의 관점에서 보는 경우가 많다. 자연계 대학생이라면 아마 교수들이 설명을 할 때 그런 비유를 많이 들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자전거 타는 것을 취미로 하고 있는 나는 이 전이상태의 존재를 자주 체감하곤 한다. 자전거 타기는 참 신기하게도 미세한 오르막이나 내리막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운동이다. 그냥 걸을 때엔 경사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정도의 길을 자전거로 지나갈 경우 다리에 걸리는 부하로 금방 경사가 있는지 알아 차릴 수 있다. 오르막 길에 취약하고 다리에 걸리는 부하가  부담스러워하는 나는 업힐 코스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즐겨 가는 자전거 코스가 있다. 한강 자전거 코스와 남산, 북악 스카이웨이 이 세 코스가 서울 라이더들의 주된 자전거 코스이다. 나는 주로 한강 자전거 코스만 애용하는 라이더이다. 평지 위주의  코스일뿐더러 서울 야경을 만끽하며 음악과 함께 라이딩을 할 때의 특별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강 코스를 돌다 보면 서울이 생각보다 작다는 느낌도 들고 천만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이 좁은 땅에 모여 사는 게 신기하도 하다. 그런 운치를 즐기는 한강 자전거 코스 찬양자로서 남산이나 북악 스카이웨이 자전거 코스는 오르막이 주는 위압감에 시도 자체를  두려워했었다. 갖고 있는 자전거 자체도 무거운 자전거이고 불어난 체중 때문에 분명 힘들 거란 생각에 도전을 하지 않았었다. 주로 평지인 한강에서 음악과 함께하는  '감성라이딩'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사는 곳과 가까운 북악 스카이웨이가 있어 미친척하고 도전해보기로 하고 휴일 아침에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사는 곳도 지대가 꽤 높은 편이라 집에 들어오면 밖을 나가는 게 귀찮을 정도로 가파른 언덕을 두개나 올라와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나갈 때엔 꽤 큰 맘을 먹고 출발한다. 북악 스카이웨이 도전에도 그랬다. 제일 낮은 지대까지는 쭉 내리막길이라 시원시원하게 1분도 안 걸려 내려온다. 성북동에서 올라가는 코스를 선택하고 집에서 출발하여 성신여대를 지나 한성대역으로 달렸다. 보기엔 평지였는데 다리에 부하가 걸렸다. 미세한 오르막이 직선으로 나있는 길이었다. 마치 험난한 길을 암시하기라고 한 듯 초반부터 무리를 주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성대역을 지나서 성북동으로 들어가 북악 스카이웨이로 가는 길을 찾는데 괜히 성북동이 아니었다. 내리막길이라고는 찾아 볼 수 잆는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전에 한번 다녀온 친구 말로는 그렇게 급하지 않은 오르막과 중간중간 평지도 있다고 했는데 그 말만 들은 것이 잘못이었다. 북악 스카이웨이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었고 초입까지의 길은 매우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임을 말해주지 않은 것이다. 당했구나 하는 생각에 남산을 먼저 가볼걸 하는 후회를 하며 억지로 성북동 탐험을 하게 되었다. 가파른 언덕이 나타날  때마다 화학반응에서의 전이상태를 생각했다. 힘들게 넘는 이 언덕은 몇 번째 전이상태에 해당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이 전이상태를 넘고 난 후의 에너지 상태는 그래도 출발점보다는 높아져 있으니 다음 언덕은 수월하겠지 하는 생각. 또는  이것만 넘으면 내리막이 나오거나 평지가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최저 기어로 열심히 페달질을 해댔다. 하지만 성북동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동네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넘은 언덕은 어떤 단계의 전이상태가 아니라 전이상태로 가는 중간 턱에 불과할 뿐이었다. 내리막이나 평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파르면 더 가파랐지 어째 점점 더 힘든 오르막만 나오는 길이었다. 괜히 부자동네가 아니구나, 다들 차가 있는 사람들이라 대중교통이나 걷는 것이 필요 없는 사람들만 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꾸역꾸역 북악 스카이웨이 초입을 찾으며 올라갔다. 5번의 자전거 하차 중에서 4번을 성북동 오를 때 하였다. 100미터도 못 가서 자전거에서 내려 끌면서 올라가고를 반복하니 마치 성북동 산책을 하는 사람인 마냥 자전거를 타고 온 게 무색했다. 그만큼 어려운 코스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초행길에 혼자 가는 길이었으니 암담함에 기운만 더 쭉쭉 빠지는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꾸역꾸역 북악 스카이웨이 초입에 도달했다.


북악 스카이웨이에 들어서기 전 숨을 한번 고르고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했다. 가는 내내 저 코너까지만 쉬지 말고 가자 다짐하며 내가 지금 자전거에서 내리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겠냐 하는 채찍질로 페달질을 했다. 스스로를 판단하기를 난 끈기가 부족하고 용두사미인 성향이 있어 이번 기회에 날 다잡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물론 한강 자전거 코스를 탈 때에도 좀 더 가보자 하는 식으로 목표의식을 갖기도 했지만 4년 넘게 한강만 타다 보니 이젠 무난하고 안일한 마음가짐이 들기도 했었다. 게다가 한강은 평지 위주였으니 몸고생이 덜하여 그에 비례한 성취감을 얻지는 못했었다. 북악 스카이웨이를 올라가며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몇 번을 했다. 나름 고난도 코스인 북악 스카이웨이인데 내가 너무 얕잡아 본 게 아닐까 하며 남산부터 갔어야지 하는 후회로 땅만 보며 기어가는 수준의 페달질을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것도 완주 못하면 앞으로 내가 할 일도 제대로 못할 거라는 다짐에 죽기야 더하겠냐는 생각으로 끊임없는 언덕을 올랐다.


중간쯤 갔을까. 정자가 나와 잠깐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자전거에서 내려 목을 축이며 얼마만큼 올라왔나 경치를 바라보았다. 아파트가 내려다보이니 생각보다 꽤 올라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숨을 돌리는데 한 무리의 라이더들이 쉬지 않고 내 앞을 지나며 올라갔다. 그곳에 앉아있는 내가 한심해 보이고 초라해 보이면서 이럴 때가 아님을 느끼고 조바심을 냈다. 얼른 자전거에 올라타 그들만큼 속도를 내기 위해 페달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다리에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와 턱끝까지 차오르는 숨에 다시 내리고 말았다. 바닥에는 2킬로미터 정도 더 가면 팔각정이라는 글씨가 보였고 페달에 발을 올린 채 생각을 가다듬었다. 지나간 라이더들은 자주 올라오는 사람이었고 나는 오늘 초행길이다. 조바심 내지 말자. 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오르막으로 남을 것이다 하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틀었던 노래도 껐다. 신나는 노래에 의지하지 않고 온전한 내 정신력으로만 이뤄보고 싶었다. 그들이 비웃는다고 해도 기죽지 말고 지금은 목적이 중요한 것이니 내가 속도를 못 내어도 상관없었다. 심호흡 한번 하고 다시 페달질을 시작했다. 평균 속도를 얼마를 유지하겠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니 다리에 무리도 덜 가고 숨도 덜 찼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완주하자. 자전거에서 내리지 말고 끝까지 가는 것에 목표를 두자. 어차피 끝은 있다. 올라가고 나면 시원한 내리막이다. 그리고 이것도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생각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몇 분이나 앞질러 지나가던 라이더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들과 함께 비슷한 시간에 정상에 도착했다. 중간에 정자에서 한번 하차한 이후 단 한 번도 하차하지 않았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고 숨은 폐가 찢어질 정도로 헐떡이고 있었다. 숨을 고르고 전망대에 다가가니 다행스럽게 하늘이 맑아 서울 전경이 깨끗하게 먼지 없이 펼쳐져 있었다. 탁 트인 경치에 힘들었던 기억이 사라졌다. 그 경치를 사진으로 남기고 다른 길로 내려가 보자는 생각에 경복궁 쪽으로 내려가는 길로 몸을 맡겼다. 페달을 밟지 않았음에도 자전거는 날개를 단 듯 시원시원하게 달리기 시작했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얼굴을 치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짜릿함과 힘들게 올라오는 다른 라이더들 보며 느끼는 희열감이 힘들었던 오르막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주고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올라왔던 시간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시간으로 최저점에 도달했다. 마치 정상에서 무언가를 깨닫고 매우 빠른 속도로 내려올 때, 부딪히는 바람에 나에게 쌓여있던 버리고 싶은 습관들을 다 날려 보낸 느낌이었다. 이렇게 금방 내려오는 높이었다는 생각에 억울하고 허무하기도 했지만 경복궁에 도착하여 아침 햇살을 느끼니 라이더들이 언덕을 오르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분명 한 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인데 언덕을 오르던 나와 광화문 앞에서의 내가 많이 달라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괴롭고 후회스럽고 암담했던 내가 그 고난을 이겨내고 나니 머릿속이 확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자신감과 뿌듯함이 온몸을 휘감았고 내려왔던 길로 한번 더 올라가 볼까 하는 패기도 생겼다.


화학 반응에서 전이상태가 높으면 촉매를 사용하거나 온도를 높여 그 에너지 문턱을 쉽게 넘어갈 수 있게 해준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힘들게 오랫동안 반응이 진행되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시간의 연속이 된다. 하지만 수만은 출발물질 중 하나가 꾸역꾸역 넘어 출발물질보다 에너지적으로 더 안정한 생성물질로 바뀌었다면 그 생성물질은 역반응도 높은 전이상태가 존재하기 때문에 다시 출발물질로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바꾸고자 했던 내 모습을 출발물질의 상태라고 했다면 내 모습 중 하나가 북악 스카이웨이를 한번 넘음으로써 안정하게 바뀐 형태를 갖게 되었다. 몇 번을 더 이 전이상태를 넘게 되면 더 많은 내 모습들이 바뀌게 될 것이고 내가 얻고자 했던 끈기와 목표의식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 전이상태가 익숙해지고 나면 별거 아닌 자전거 코스에 불과하겠지만 바뀌어진 나는 다음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전이상태를 찾아 나설 것이다. 물론 그 앞에서 고전하며 투덜투덜거리겠지만 처음에 느꼈던 괴로움보다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할  듯하다. 도전은 새롭고 낯선 것임은 분명하다. 즐겁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시작점에서의 설렘이 주는 즐거움이지 과정이 주는 괴로움을 보면 도전은 괴로움이 분명하다. 도전에 성공한 후 부여되는 성취감과 즐거움을 느끼고 그것을 희망 삼아 괴로움을  감내하는 것. 이 전이상태를 온전히 내 힘으로만 넘는 것. 촉매나 가열없이 하나씩 언덕을 넘겨보는 것.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내가 넘어가는 이 전이상태를 찬찬히 곱씹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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