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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성호 Nov 04. 2024

감사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은혜

    저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아왔습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저는 조금은 특별한 제 인생의 이야기를 통해서 삶을 변화시키는 이야기와 습관의 형성에 대해서 말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1970년 후반에 한국의 집성촌인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마을의 대부분의 가정들은 저와 동일한 성을 가진 친척들이었습니다. 제 고향 마을은 한국의 전통적인 마을이었고 유교를 따라 다 같이 집안의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고향 마을 사진은 아니지만, 지리산 마을 사진 중 제가 살았던 동네와 가장 비슷하게 나온 사진입니다. Pixabay.com


    그 마을에서 아버지는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나 평생을 농부로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두 형님들이 돌아가시고 난 후, 아버지는 할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어떤 꿈을 가지고 계셨는지 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농부로서의 삶을 평생 감당해야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7명의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막내인 저를 아버지는 사랑하고 이뻐해 주셨고 제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아버지께서 저를 편애한다고 느낄 만큼 아버지는 다른 형제들보다 저를 더 사랑해 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오직 저만이 부모님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제가 부모님께 가장 받은 큰 축복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언제나 저는 아버지께서 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예뻐해 주셨다는 것이 제 인생에 주어진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사랑받은 사람이었고, 사랑받기에 충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6살 때 추석 때 찍은 사진입니다. 차례상에 오른 생선을 혼자 먹겠다고 접시를 들었을 때 찍힌 사진입니다. 거의 유일한 어렸을 때 사진입니다.

    

    농부셨던 아버지는 제가 11살일 때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1년 후, 어머니께서도 혼자서 생계를 감당하시다가 임종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입원했던 병원의 의사가 우리 가족들에게 어머니가 한 달 이상 살기 어려울 것이라고 얘기했을 때, 저는 그 말이 진짜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처럼 의사의 말이 사실처럼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한 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제 마음을 너무도 아프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병원으로부터 앰뷸런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후, 한 달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의식하기도 힘들 만큼 시간이 그저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은 5일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장례식 마지막 날 밤에 시골집 마당에 있을 때 집안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가족들과 친척들이 방 안에서 저에 대해서 의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당시 6학년이었기 때문에, 가족들과 친척들은 누가 저를 돌보아야 할지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11월 말 초겨울 찬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에서 저는 누가 저를 돌볼지에 대해서 온 가족이 회의를 해야 할 만큼 저를 책임지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도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대화를 들으며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찬바람이 불어오는 시골집 마당에서 저는 제 미래에 불행한 일들로 가득하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조금 전에 먹었던 닭죽 한 그릇이 마치 제 인생에 남아있는 유일한 달콤함처럼 느껴질 만큼 앞으로 제게 닥칠 일들이 혹독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고 누구도 저를 돌보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 뒤에 일어날 일들이 어떻게 될지 몹시 무섭고 궁금했었습니다. 하지만 찬 바람이 부는 마당에 서서 집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면서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미래가 불행으로 점철된다고 하여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불평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 순간 제게 일어난 일들을 제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감사합니다. 주어진 상황을 불평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마음, 그 마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생각인지 그 당시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마음만 가질 수 있다면 최소한 제 삶을 스스로 포기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제게 일어난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니, 저는 앞으로 제게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제가 특별히 무엇인가를 결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차가운 바람이 부는 그 겨울밤에, 누구도 저를 재정적으로 책임지며 제 생계를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그때 우리 가족은 누나 5명과 형 1명이 있었고 아흔한 살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성년이 된 사람은 누나 3명과 형이었는데 그중에서 결혼한 사람은 누나 2명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선뜻 저를 돌봐준다고 말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고 다른 친척들 집에 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나를 돌보기 어려운 상황이 그 당시 제게 주어진 나의 현실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 현실에 대해서 저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제게 주어진 현실이 너무도 분명해서 그것을 원망할 이유도 그럴 겨를도 없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날의 제 태도가 제게 주어진 최고의 축복 중 하나였습니다. 제 노력이나 결심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날 제 미래가 쉽지 않겠다는 것을 느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 제가 품었던 마음은 순전히 제게 주어진 선물이고 은혜일 뿐입니다.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의 태도가 그 순간에 제게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제 삶에 불행한 일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그 현실을 부정하거나 저주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날 밤 추운 겨울날의 바람이 차가운 날씨를 일깨워준 것처럼, 제 온몸이 제게 주어진 현실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오랜 시간 회의를 한 후 저를 돌볼 사람으로 작은 누나와 자형으로 결정했습니다. 그것 역시 제 인생 최대 축복 중 하나였습니다. 


    1990년 12월 초에 저는 고향을 떠나서 누나의 집으로 갔습니다. 형이 저의 주소지 이전과 학교 전학과 같은 행정적인 절차를 처리해 주었습니다. 형이 바지 2벌과 티셔츠 2벌을 사 주었고, 공부할 책상과 의자도 사 주었습니다. 그 책상과 의자는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탈 수 있는 자전거도 한 대 있었는데, 그 자전거를 타고 누나의 심부름을 가는 것도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당시 거제도는 조선산업의 발전으로 인해서 대부분의 거제도 거주자들은 한국의 평균적인 소득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 수준에 있었습니다. 자형이 삼성조선소 정직원이었기 때문에, 제게도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많이 있었습니다. 거제도의 날씨는 따뜻했고, 풍경은 아름다워서 부모님 없이 사춘기를 보내야 했던 저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잠잘 곳이 있었고, 먹을 것이 있었고,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저는 정말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자 제 모든 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된 것 같았습니다. 일부러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의지를 북돋기 위해서 특별히 한 것도 없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모든 것이 그저 감사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었습니다. 


거제도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Pixabay로부터 입수된 blue4dia님의 이미지 입니다.


    거제도에 온 지 두 달 후에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전학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제가 받을 수 있는 상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대부분의 졸업생들이 받는 개근상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장례식 때문에 학교에 결석한 날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어떤 상도 받지 못한 채 졸업식을 마치고 집으로 혼자서 걸어갔습니다. 보통 졸업식에는 가족들이 참여해서 축하해 주지만, 누나는 집에서 어린 조카들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저 혼자 졸업식에 참석하고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제가 다녔던 고향의 초등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체 학생 수가 60여 명 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의 학교였기 때문에, 삼성 직원들의 자녀들이 대부분인 거제도의 중학교에서 내가 공부를 잘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고향 초등학교에서 6학년 전교생이 13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도 저는 1등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2등도 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1등을 하던 친구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고 나서도 2등을 하거나 종종 3등을 했습니다. 거제도에서 다닌 중학교의 한 학년의 전체 학생 수는 230명 정도 되었습니다. 대도시의 중학교 학생 수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전 학교보다는 20배 정도 학생 수가 많았습니다. 


    고향에 있을 때는 공부를 할 시간도 많지 않았습니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농촌에서, 농부의 아들이었던 저는 아버지의 농사를 당연히 도와야만 했습니다. 5살 때부터 누에고치를 돌보는 잠농 일을 했습니다. 가족들이 1년 동안 잠농 농사를 도우면, 아버지는 누에고치를 팔아서 돈으로 바꾸어 오셨습니다. 매년 누에고치를 팔고 오신 날이면 초코파이 한 상자를 사서 집으로 오셨습니다. 달콤한 초코파이가 한 해 동안 수고한 누에고치 농사일에 대한 보상이었습니다. 소에게 풀을 먹이고, 밭에 가서 잡초를 뽑는 일도 했고, 겨울이 오기 전에 친구들과 함께 산에 가서 땔감으로 쓸 나무를 구해와야 했습니다. 고향에서 제 또래 9살 소년들은 누구나 도끼와 톱을 사용할 줄 알았고, 지게에 나무를 가득히 싣고 옮길 수 있었습니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LoggaWiggler님의 이미지 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살다 온 제가 거제도에서 공부를 잘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그다지 지혜로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제도에서 다른 친구들은 중학교에 가기 전에 영어를 먼저 배우기도 했지만, 저는 중학교 영어 수업 외에 추가로 공부를 위해서 돈을 더 지불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거제도에 처음에 왔을 때, 당시 제가 가진 삶의 조건들은 열악했고 개선될 여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런 상황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거나 괴롭지 않았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그저 오늘 제가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습니다. 이미 제가 받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게 주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새벽에 신문을 돌렸습니다. 2년 동안 쉬지 않고 새벽마다 일어나 신문을 돌렸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제 삶을 원망하며, 삶의 조건들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고 그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좋았습니다. 불평과 원망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삶의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능력이나 의지로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시절 제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고 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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